2016년 8월 7일 주일낮설교 (질그릇 같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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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07 August 2016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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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그릇 같은 인생
8. 7, 2016
本文:고린도후서4:7-15
說敎:崔 仁 根 牧師
어느 덧 2016년도 8월 첫 주일 입니다. 엊그제 같이 송구영신예배를 드리고 새해를 맞았는데, 그리고 밀레니엄버그라 하여 1900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갈 때 컴퓨터의 오작동으로 지구의 종말이 올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1999년 12월을 보내고 2000년 새해를 맞을 때 두려움과 설레임 속에서 긴장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17년의 세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빠르게 흐르는 세월이 우리 앞에 언제까지 존재하게 될는지, 조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오늘의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세월 앞에 서 있는 우리 인생들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요? 인간의 두뇌와 기술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현세를 살아가면서 인간을 만드신 신은 점점 작아지고 인간은 점점 더 커져서 앞으로는 그 인간이 만든 로버트나 무기나 법이 하나님을 능가하고 결국은 그 하나님의 심판으로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흑인을 무차별 사살하는 경찰들에게 대항하여 흑인들의 인권을 주장하며 데모하는 시위대를 제지하던 경찰들에게 높은 빌딩에서 조준 사격하여 경찰관을 다섯이나 사살하는 끔찍한 사건이 지난 달 올랜도에서 일어났습니다. 경찰들이 범인들을 수색하고 검거하는 과정에 최초로 로버트를 투입하여 숨어 있는 무장 범인을 사살하는 개가를 올렸습니다. 말로만 듣던 로버트의 실체를 실감하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북한이 핵으로 무장하고 날마다 미사일을 개발하여 미국과 한국을 위협하자 미국에서는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사드를 배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드라는 말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날라 오는 미사일을 요격하여 적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하는 무장체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기술이 이렇게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인생들에게 오늘 하나님은 과연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한 번 들어보아야 하겠습니다.
(렘18:1-6)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의 집으로 가서 그가 하는 일을 지켜보라고 하신 다음 토기장이가 자기 마음에 원하는 대로 토기를 만들듯이 나도 이 땅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만들 것이니 그들의 삶이 내 손에 있도록 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제 아무리 잘나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작은 존재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도 위대했던 사도 바울도 단 한 마디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해 두었습니다.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들을 질그릇에 비유하고 예수님을 보배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말씀들을 중심으로 “질그릇 같은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가슴으로 듣고 놀라운 변화와 결단을 만들어 내시기 바랍니다.
질그릇 같은 인생
저는 지난 목요일 스웨디쉬 병원의 암병동인 이스트빌딩 12층에 가 보았습니다. 거기엔 이 세상에서 가장 가슴 아픈 사람들이 각 병실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창 하나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브라드웨이로는 쉴 새 없이 자동차들이 질주하고 있는데 그곳에 입원해 있는 수많은 환우들은 그렇게 바깥세상에서 질주하고 있는 자동차의 꼬리를 물고 함께 활기차게 살아가기를 학수고대 기대하며 투병하고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을 토기와 질그릇에다 비유하였을까요? 외견상으로는 아름답고 멋져 보이지만 자칫 잘못하여 강한 물체에 부딪히기만 하면 순간에 박살이 나 흔적도 없이 그 아름다운 자태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 토기요 질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렇게도 잘났다고 자부하며 하나님도 거역하는 우리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허하게 우리들의 현실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을 주관하시도록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화요일(8월 2일) 12시 경에 부산에서 평화로운 한 가족의 나들이가 시작되었습니다. 60대의 아버지가 휴가철을 맞아 친정으로 놀러온 33살의 딸과 3살과 2달 된 손자손녀와 부인을 태우고 물놀이를 가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단란한 가족을 태운 차량은 무슨 영문인지 도로 곁에 불법으로 주차해 놓은 대형 트럭을 그대로 들이받아 운전자만 큰 부상을 입고 부인과 딸과 손주들은 그 자리에서 죽는 끔찍한 사고를 내고 말았습니다. 단란하던 한 가족이 이처럼 끔찍한 사고의 도가니로 빠져드는데 드는 시간은 오직 10초였습니다. 한 순간에 일가족이 이 세상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이 질그릇과 같이 한 번 깨어지면 그만인 것을 이와 같은 사건을 통해서 그냥 그대로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영원을 살 듯 그렇게 아옹다옹하며 살아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사고가 나기 전 이틀 전에는 해운대에서 53살의 한 운전자가 접촉사고를 내고 그대로 도망가다가 신호를 기다리던 자동차들을 연쇄적으로 들이 받고 행단보도를 건너던 행인을 치어 3명이 죽고 14명이 크게 다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망한 사람들 중에는 경기도에서 방학을 맞아 18살 아들을 데리고 해운대로 놀러 왔던 44살의 어머니와 아들도 있어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였습니다. 한 번 깨어지면 다시는 새롭게 될 수 없는 것이 질그릇입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다를 바가 전혀 없기에 사도 바울은 우리들의 인생을 “질그릇”이라고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이와 같은 존재가 우리 인생이라면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배우고 무슨 교훈을 얻어야 하겠는지? 함께 말씀으로 돌아가서 깊은 깨달음과 은혜를 받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질그릇은 반드시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대선지자 예레미야를 토기장이의 집으로 보내 그가 하는 일을 목도하게 하였습니다.
(렘18:1-4)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예레미야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가서 본 것은 아주 간단하고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토기장이가 녹로로 토기를 만들다가 부서지니 그것을 뭉쳐서 다시 다른 그릇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토기는 토기장이의 손에서 새롭게 탄생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토기장이의 마음이더라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들이 이와 같은 토기라면 우리들을 만들어 내시는 분은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성경에 남겨 두었습니다.
(히3: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을 이 땅에 존재하게 하신 이가 하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결코 이렇게도 단순한 진리를 고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 자아가 누구인지, 바로 알고 우리들을 만드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어쩌면 질그릇보다 더 잘 깨어지는 것이 우리들의 몸인지도 모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가장 처절하고 가슴 아픈 일이 바로 이처럼 한 순간에 질그릇 같은 몸이 깨지고 이 세상을 떠나버린 성도들의 장례식입니다.
우리교회의 집사들이요 시애틀 다운타운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40대 부부가 대학 초년생 아들과 고등학교를 다니는 딸과 함께 단란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7월 4일 친척들과 함께 놀러가기로 하고 린우드에 살고 있는 그 집사님의 집으로 아침에 다 모이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침에 집으로 와 보니 일가족이 다 총에 맞아 죽어 있었습니다. 밤새 안녕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들과 이 종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참으로 사람이 산다고 할 수 없는 아픔과 허무감에 한 동안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질그릇과 같고 그 질그릇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을 하늘의 하나님께서 다스려 주셔야 하고 지켜주셔야 하며 보호해 주셔야만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찍 우리들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시121:4-8)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고 말입니다. 이것을 겸손히 믿고 그와 같은 절대자에게 인생을 맡기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렇게도 단순하고도 분명한 진리 하나를 바로 알지 못해 평생을 허덕이며 외롭게 살아가는 인생들은 그래서 너무나도 불쌍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만드셨다면 엄청난 그 능력으로 우리들을 지키실 것을 또한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제대로 살아가는 인생이요 그 길이 바로 믿음의 길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질그릇이 고귀한 것은 보배를 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질그릇이라는데 대하여서는 이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질그릇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릇 중에 가장 값없는 그릇이 아마도 질그릇일 것입니다. 그만큼 잘 깨어지고 보잘 것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놀라운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와 같은 질그릇에 보배가 담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보배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 보배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질그릇으로, 그렇게 귀할 게 없지만 그 그릇에 보배를 담았으니 값진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보배 중의 보배인 성령님이 거하신다고 말입니다.
(고전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비록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우리 속에 보배이신 예수님께서 머물러 계시고 성령님께서 친히 거하시는 성전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보배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몸으로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도 하늘의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예배를 영적인 예배로 받아주시고 인정해 주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롬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5대 독자에게 시집간 며느리가 임신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집에서 당장에 최고로 대우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도 시집을 살리던 시어머니가 하루아침에 이 며느리의 종이 되어버렸습니다. 여름에 목이 마르다고 입만 열면 시원한 수박냉체며 가진 모든 것으로 들고 와 섬깁니다. 심지어는 천장에서 파리가 째려본다고 하면 온 가족들이 파리채를 들고 그 파리를 끝내는 잡아 없애버립니다. 무엇이 먹고 싶다고 하면 몇 십리 밖에 가서도 기필코 구해와 먹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런 여왕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렇게도 놀라운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까? 그 며느리가 순간에 예뻐져서 입니까? 아닙니다. 그 며느리의 배속에 대를 이을 아들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왜 그렇게도 존귀한 존재가 되어 있는 것입니까?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이요 보배이신 예수님께서 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하나님께 한 것이라고까지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질그릇이 깨어져야 보배가 보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존재가 질그릇과 같다는 것과 그 질그릇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뜻대로 만드셨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비록 질그릇이지만 그것이 보배로울 수 있는 것은 그 질그릇 속에 성령님께서 거하시고 예수님께서 머무시기 때문이라는 진리도 확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질그릇과 같은 우리 인생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일생 동안 결혼조차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바쳤던 사도 바울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시고 이 땅에 거하게 하신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삶은 그렇게 살게 하신 하나님께 무엇을 하든지 그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가슴으로 깨달았던 사도 바울은 일생을 통해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던 세기에 보기 드는 고귀한 사도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 세상을 떠난 지 2천년이 지났지만 오고 오는 모든 세대들의 가슴 속에서 살고 있는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그리고 우리들의 존재가 쉽게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존재임을 안다면 우리들을 이 땅에 존재케 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다 돌려드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사도 바울은 우리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은 고귀한 말씀을 남겨두었습니다.
(고후4:8-11)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우리들의 생명을 죽음에까지 넘겨준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들의 연약한 육체에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매우 역설적인 설명이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이 종은 여기에 더 하여 한 가지 더 제안하고자 합니다. 우리 속에 거하시는 우리들의 진정한 보배이신 예수님께서 온 세상 앞에 나타나게 하려면 질그릇인 우리 자아가 깨어져야만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야만 우리 속에 거하시는 예수님이 밝히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질그릇인 우리들 자신을 어떻게 깨뜨릴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말씀을 남겨 주셨습니다.
(마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신자들로 하여금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하기를 원하십니다. 소금은 부패한 곳을 회복하고 빛은 어두운 곳을 비취게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들의 삶이 소금과 같이, 빛과 같이 그 사명을 다하게 될 때 비로소 질그릇이 깨어지고 그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게 되는 역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들의 삶만을 위해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한 시대를 예수님의 영향력을 온 세상에 나타내게 하는 놀라운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우리들의 생명조차도 죽임 당하는 곳에 내어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들 가운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들을 또한 다시 살리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고후4:14-15)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함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뿐인 생명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이와 같은 사명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조금도 소중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다 내어 놓았던 것입니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로마에서 순교의 제물로 자신의 소중한 삶을 모두 다 하나님께 바쳐드렸던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처럼 과감하게 한 생명이라도 내어 놓을 정도로 우리 자신들을 깨뜨리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들의 몸은 질그릇이라 언젠가는 깨어지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할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생명은 주님의 손에 달려 있으므로 우리들이 아낀다고 우리들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담대하게 주님께 맡겨두고 생명이라도 버릴 각오로 충성하면 그 생명을 주님께서 친히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질그릇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만드신 이가 하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질그릇이 가장 값진 것은 그 속에 예수님과 성령님이 거하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젠가는 깨어지고 말 질그릇이 더욱 빛나고 아름다울 수 있도록 능력의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질그릇인 우리들이 이 세상 그 어떤 금그릇 보다 더 빛나는 멋들어진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소중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무엇보다도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질그릇처럼 깨어지기 쉬운 우리들을 오늘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함께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들이 지금 어떻게 이렇게도 복된 예배자가 되어 하나님의 집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 한 순간도 교만하거나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우러러 모든 영광을 돌려드리고 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우리들도 복을 누리고 후손들에게도 유산하는 그런 멋들어진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인본주의로 치닫고 사람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이런 안타까운 종말에 우리들만이라도 말씀으로 돌아가 믿음을 만들고 우리들의 근본이 무엇이며 하나님은 누구신지 분명하게 깨달아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는 그런 바른 신앙생활을 유지해 가야 하겠습니다. 하늘이 찢어지고 땅이 갈라져 없어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여상하고 하나님의 통치는 계속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복된 주일에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나온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질그릇이 변하여 금그릇이 되는 복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승리하는 멋들어진 신자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6년 8월 7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