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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21일 주일낮설교 (나그네와 같은 인생)

나그네와 같은 인생

8. 21, 2016

本文:베드로전서2:1-11

:

 

조용필씨가 어느 날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신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시골에서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왔다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소외를 당하며 고생을 하는 외로운 나그네들의 아픔이 구구절절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거기에 큰 감동을 받은 그는 그 자리에서 볼펜을 들고 그들의 애환을 메모해 나갔습니다. 그것이 그의 대표적인 노래 중의 하나가 된 []이라는 노래입니다.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그곳은 춥고도 험한 곳 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문턱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괴롭고도 험한 이 길을 왔는데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사람들은 저마다 고향을 찾아가네

나는 지금 홀로 남아서 빌딩 속을 헤매다

초라한 골목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저기 저 별은 나의 마음 알까 나의 꿈을 알까

괴로울 땐 슬픈 노래를 부른다

슬퍼질 땐 차라리 나홀로 눈을 감고 싶어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저기 저 별은 나의 마음 알까 나의 꿈을 알까

괴로울 땐 슬픈 노래를 부른다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슬퍼질 땐 차라리 나홀로 눈을 감고 싶어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이것이 꿈이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가슴이 짠하여 옴을 느낍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더 큰 아픔과 외로움과 소외감으로 우리들의 보이지 않는 가슴에 멍이 되어 남아 있는 것을 잘 압니다. 우리는 타향이 아닌 타국으로 와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향하여 베드로 사도가 따뜻한 가슴으로 한 말씀을 남겨 두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벧전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고 말입니다. 베드로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향하여서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나그네요 행인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나그네를 Alien이라고 표현하여 두었고 행인을 Stranger라고 해 두었습니다. Alien은 재류 외국인,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 영주권이 없는 재외 외국인, 외계인을 뜻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리고 Stranger는 문자 그대로 이상한 사람, 불청객, 혹은 낯선 객을 뜻할 때 쓰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왜 우리 인생을 이렇게 표현하였을까요? 어쩌면 자신의 지나온 삶 속에서 뼈 속 깊이 느낀 고백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본향인 하늘나라를 바라며 이 땅에서 나그네와 행인과 같이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육신대로 살다가 육신대로 망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기에,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억울하고 원통하기에 그렇게 살지 말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나그네와 행인 같은 우리들의 삶을 어떻게 개발하고 변화시켜야 후회 없는 멋지고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지, 함께 고민하며 함께 그 길을 찾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나그네와 같은 인생

8월 한 달 동안 우리는 우리 인생의 본질을 성경은 무엇이라 말하는지 공부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질그릇이라고 하였고, 풀과 풀의 꽃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한결 같이 허무하고 초라한 표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깨어지기 쉽고 쉽게 사라지기 쉬운 존재가 우리 인생인 것 같습니다. 31차 세계 올림픽이 브라질 리우에서 열리고 있는데 독일에서 온 한 카누 선수 코치는 왕년에 은메달까지 목에 걸었던 그 부분 전문가인데 택시를 타고 선수촌 숙소로 돌아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자세한 소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이 치안과 안전 부문에서 역대 최악의 올림픽이라고 평가를 받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사고가 발생했다. 올림픽에 참가한 독일 카누대표팀 코치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독일 올림픽 팀은 16일 독일 카누 슬라럼 코치이자 2004 아테네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슈테판 헨체(35)가 부상을 이겨내지 못하고 리우의 병원에서 사망했다고 밝혔다.

헨체는 지난 12일 올림픽 선수촌으로 돌아가는 도중 타고 있던 택시가 콘크리트 분리대를 들이박는 사고로 머리에 큰 부상을 입었다. 사고 직후 병원으로 옮겨진 현체는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IOC는 진정한 올림피언의 손실에 대해 애도를 표한다""우리는 그의 친구, 가족, 독일 대표 팀과 함께 할 것"이라고 추모했다.

독일 대표팀은 17일 올림픽 선수촌에서 추모식을 개최할 계획이다. 또한 이날 하루 동안 독일 국기는 올림픽이 열리는 모든 경기장에서 조기로 게양될 예정이다.]

왕년에 은메달 선수였고 그 실력으로 막강 독일의 선수들을 이끌고 코치로 올림픽에 참가하였던 방년 35세의 피 끓는 청년이 교통사고로 순식간에 이 세상을 떠나게 될 줄을 감히 누가 상상이나 하였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질그릇과 같고 꽃과 같은 우리 인생의 현주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육신을 따라,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지 말고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꿈을 안고 살아가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눈에 비친 인생이란 나그네와 같고 행인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베드로는 왜 우리 인생을 나그네와 행인 같은 것이라고 하였을까요? 그 말씀에 내포된 우리 인생의 진정한 모습은 과연 무엇일까요? 함께 생각하면서 본질과 대안을 동시에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나그네는 외로운 존재입니다

미국에 오면 모두가 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다녀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더 더군다나 70년대 80년대는 더욱 더 그랬습니다. 한국에서는 운전대 한 번 잡아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직장에 다니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중고차를 하나 사서 운전을 배우고 그렇게 운전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운전미숙과 피곤한 노동 속의 졸음운전으로 우리 한인들이 이민초기에 너무나도 많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망 원인 넘버원이 바로 교통사고였으니 말입니다. 이 종도 1000불짜리 자동차를 하나 구입하여 그러한 전철을 밟고 왔습니다. 그런데 달리던 자동차가 갑자기 고장이 나 길옆에 세워 놓고 토잉카를 한없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셀폰이 없던 때라 지나가던 폴리스가 와서 토잉카를 불러 주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느껴보지도 못했는데 생생 고장 없이 달려가는 자동차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가짜 목사라고 이민국에 고발을 당하여 영주권을 빼앗기고 한국에도 가지 못한 채 한국에 가는 성도들을 공항에 데려다 주고 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어쩌면 그렇게 나오는지... 개를 주어도 먹지 않는 그 영주권 때문에 이 미국에서 눈물을 흘리며 살아가는 우리 교민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나그네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영주권 없이 미국에 사는 이가 나그네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안타까움과 불안과 외로움과 고통은 공기처럼 가슴 깊숙이 젖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고향에서 그렇게도 그립던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찾아가 뵙지도 못하게 되는 현실이, 나그네가 온 몸으로 겪는 안타까움인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 인생들을 이와 같은 나그네에다가 비유하였습니다. 왜입니까?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꼭 영주권도 없이 남의 나라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고국에는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고, 현실에는 숱하게도 많은 제약을 받으며 그렇게 아픔과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성경에도 이와 같은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그 추종자들을 추격하고 있을 때 어쩔 수 없이 살벌한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도망가던 두 사람의 모습이 바로 나그네의 대표적인 모습니다.

(24:13-17)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 하더라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나그네는 슬픈 것이요 외로운 것이요 정처가 없는 아픔을 품은 자들인 것입니다. 이는 구약의 3대 족장이었던 아브라함이 그랬었고 이삭이 그랬으며 또한 야곱이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 길의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기까지 해야만 했었습니다.

(12:11-13)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이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6:6-7)

이삭이 그랄에 거하였더니 그곳 사람들이 그 아내를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나의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곳 백성이 리브가로 인하여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나의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훗날 이삭의 아들 야곱은 아예 자신의 하란의 생활과 지나온 고달픈 인생길을 나그네의 길이었다고 바로 앞에서 고백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7:8-9)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연세가 얼마뇨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족장들이요 한 세대를 풍미한 위대한 인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개인적인 삶의 현실은 역시 나그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사랑하는 그의 흩어진 성도들에게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외 없는 우리 인생들의 민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그네와 행인 같은 우리들의 삶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매니지먼트 하면서 복되고 소망 넘치는 삶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성경 속에는 비록 나그네와 행인 같은 인생이었지만 그 삶을 복되게 만들어서 자신들도 행복하고 후손들에게도 귀감이 되는 멋진 삶을 살아갔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함께 배우면서 우리들의 삶에 교훈으로 삼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육신의 욕심을 털어내야 합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바와 같이 사도 베드로는 매우 인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솔직하고 또한 꾸밈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단도직입적으로 내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내가 무엇을 받게 될 것입니까?” 하고 물어 보았을 정도였습니다.

(19:27-29)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또한 예수님을 위해 한 목숨을 다 내 놓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해 놓고 주님께서 보시는 면전에서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우를 범하기도 하였습니다.

(26:33-35)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베드로는 과연 그랬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매우 육신적인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수도 많았고 주님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돌아섰으며, 주님께 다 버리고 주님을 쫓았는데 무엇을 받게 될 것인가를 따지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깊은 깨달음을 갖게 하였던 것입니다. 인생은 나그네와 행인과 같은 존재인데 육신적인 그런 것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는 것을 뼈 속 깊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나그네와 행인 같은 우리 인생들이 복되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육신의 욕심을 버리는 것뿐이라고 말입니다.

(벧전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그의 생생한 삶의 경험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행인과 나그네 같은 초라한 인생길에서 육신의 욕심이 그 얼마나 초라하고 부끄러운 것인가를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제는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육신의 욕심을 조금은 과감하게 던져버리는 결단을 해야만 하겠습니다. 그 길만이 나그네와 행인 같은 우리들의 삶에서 신선한 소망과 하늘의 은총을 덧입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의 욕심을 버리고 신선한 성도의 변화를 받게 되면 어떠한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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