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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6년 10월 9일 주일낮설교 (지켜주시는 하나님)

2016년 10월 9일 주일낮설교 (지켜주시는 하나님)

지켜주시는 하나님

10. 9, 2016

本文:시편121:1-8

:

 

2014416일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하면서 승객 300여 명이 사망, 실종된 대형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특별히 이 배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 거의 대부분이라 더욱 더 아픔을 더했습니다. 꽃 같은 아들딸을 차가운 바다에서 잃어버린 아픔이란 사는 날 동안 잊지 못할 무서운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모들은 한결 같이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통곡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우리 인생들의 현실입니다. 아무리 사랑하고 이뻐해도 결정적인 순간에 지켜주지 못하는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들이 안고 있는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을 지켜 줄 수 있는 절대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을 만드시고 우리들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지켜 주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121:4-5)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라는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 말씀을 믿고 하나님께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녀들의 내일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는 자들이 바로 신자들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어른들이든 아이들이든 자신의 인생을 자신들이 살아가는 것인 냥 맡기지를 못한 채 스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처럼 생각지도 못했던 끔찍한 변을 당했을 때 비로소 통곡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현대의 인생들이 가장 똑똑한 바보라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인정할 것을 인정하고 수긍할 것을 수긍하며 절대자를 찾아 의지하고 내일을 맡길 줄 아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교회에 다니고 믿음을 키우는 이유가 바로 이처럼 생활 속에서 지혜를 얻어 주어진 짧은 삶을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그리고 누구나 떠나는 이 세상을 떠날 때는 천국으로 향하는 구원 열차를 타기 위해 신앙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우리들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자명하고도 안타까운 현실 앞에 겸손이 엎드려서 절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귀를 기울여 보면서 새로운 내일의 희망을 품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켜주시는 하나님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종교라는 특수한 세계를 통해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와 같은 종교가 세상의 타락과 함께 타락하여 일부 특수계층의 탐욕과 교권주의로 전락하고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만큼 인간 중심의 계급투쟁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어떻게 선과 진실을 앞세운 종교 지도자들이 조폭보다도 더 악하게 타락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썩어버린 현실을 목도하게 됩니다. 참으로 서글프기 이를 데 없는 21세기의 현실입니다.

[조계종이 최근 종단을 비판하는 책을 펴낸 우희종 서울대 교수를 두고 갈등을 빚고 있다.

이날 조계사와 봉은사 스님, 신도, 대한불교 조계종 중앙신도회와 종무원조합 관계자 등 70명은 한국 불교는 변태불교등의 내용을 담은 '! 개불릭' 책을 펴낸 우 교수의 해임과 공개 사과를 촉구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우 교수가 근거 없는 비난과 조롱으로 한국불교를 폄훼하고 있다며 우 교수는 본연의 책무인 연구와 후학 양성을 뒷전으로 하고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을 막말과 욕설로 도배하고 서울대 교수의 명예를 땅에 추락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서울대 총장은 서울대의 명예를 추락시키고 교수 직위를 악용해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타인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우 교수를 해임하고 불자들 앞에 참회하라고 촉구했다.

반면 바른불교재가모임 등 7개 불교계 단체는 '우희종 교수 죽이기'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른불교재가모임, 신대승네트워크, 참여불교재가연대 등 7개 불교계 단체도 이날 성명을 내고 우희종 교수에 대한 조계종단의 공격적 행위가 도를 넘고 있다우희종 교수 죽이기는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저열한 대응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성숙한 조계종단이라면 우 교수의 표현에 대하여 집단 항의를 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파렴치한 악행을 돌아봐야 한다""한국불교의 청정성 회복과 자정기능의 정상화를 위하여 조계종단은 하루 속히 스스로 죽비로써 잘못을 돌아보고, 참회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우 교수는 앞서 김용민 시사평론가, 김근수 가톨릭프레스 편집인과 함께 진행하는 종교 팟캐스트인 ! 개불릭의 방송 내용을 최근 동명의 책으로 엮어 출간했다.](조선일보 105일자 기사에서 발췌)

이에 앞서 서울대 교수인 우희종씨는 대한민국의 현재 불교는 변태, 암흑가의 갱단이라고 표현하며 맹비난을 쏟는 책을 펴냈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불교계만의 문제이겠습니까? 부끄럽지만 이는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총회장이 되겠다고 돈을 물 쓰듯 쓰고 상대를 짓밟고 죽이고 자기편을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등 감히 목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악을 저지르는 교계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들 밑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결국 높아지려는 욕망과 남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려는 탐욕으로 부패하고 타락하여 남은 고사하고 자기 자신조차도 자정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하게 엎드려져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길밖에는 더 이상의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은 언제나 한결 같은 사랑으로 지난 주일에 받은 말씀처럼 가난한 우리들을 먹여주시고 외롭고 고달픈 우리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안아주시며 천국까지 인도해 주시는 참 좋은 우리들의 아버지로 우리 곁에 머물고 계십니다. 눈물 나도록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이렇게도 어리석고 미련한 우리들을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신 채 지켜주신다고 하시니 참으로 이 세상에 우리 하나님 같이 좋으신 분은 그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 모두 순전한 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이와 같이 고마우신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서 그 말씀 그대로 믿고 따르며 우리들의 불투명한 내일을 희망과 소망으로 승리하는 하나님의 친 백성들이 되어가야 하겠습니다.

근심 걱정에서 지켜주십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가장 많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눈에도 보이지 않는 근심 걱정입니다. 그 누구보다 우리들의 현실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유언과 같이 남겨 주신 첫 말씀이 바로 이와 같은 근심 걱정에 관한 것만 보아도 이는 우리 인생들의 현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4장은 전체가 예수님의 유언입니다. 그런데 그 시작이 우리들의 근심에 관한 것이었으니 우리들이 얼마나 근심 걱정에 눌려 있는지 주님은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엄마의 따뜻하고 포근한 배속에서 280일 동안 안전하게 머물다가 태어납니다. 그곳에서 이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 우리는 온갖 위험과 두려움과 고통과 근심 걱정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아시고 유언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지켜 주시되 이처럼 근심과 걱정에서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정신분석학자들이 재미있는 실험을 하고 그 내용을 발표한 것이 있습니다. 즉 인간본성과 환경이 주는 영향을 실험적으로 조사하여 본 것입니다. 병원 너서리(Nursery)에 가면 많은 신생아들이 누워 있습니다. 한 아기가 울기 시작하면 그 울음은 다른 아이에게도 영향을 주어 여기저기에서 울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자들은 무엇인가 불편해서 우는, 세상에 처음 탄생하여 새로운 환경 속에서 새로운 영향을 받고 있는 이와 같은 신생아들을 상대로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태속에 있을 때 그들이 듣던 어머니의 심장의 고동소리를 녹음하여 들려주었더니 한 아기씩 울음을 멈추기 시작하였고 평화롭게 잠들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실험은 인간본성과 환경에 대한 관계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을, 혹은 적응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오는 불안을 모든 신생아들은 가지고 있는데 그런 아이들을 근원적인 환경, 즉 그 아이들이 처해 있던 모태라는 환경으로 돌아가게 하는 경험을 갖게 함으로 두려움과 불안을 해소시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감으로서 진정한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을 지켜주신다고 약속해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탕자의 비유는 바로 이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이 비유에서 등장하는 둘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상속될 자신의 몫을 일찌감치 받아서는 그 아버지의 품을 떠납니다. 아버지의 그 어떤 간섭과 지나친 사랑에서 해방 되어 마음껏 자신의 삶과 행복을 누려보리라는 계산에서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살벌했고 가졌던 것은 곶감을 빼먹듯 다 없어지고 결국에는 비참한 거지가 되고 맙니다. 할 수 없이 그는 빈손으로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한결 같은 사랑으로 그를 맞아주었고 더 좋은 것으로 다시 채워주었으며 큰 잔치를 벌이기까지 자신을 성대하게 맞아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배워야 할 삶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없는 하나님을 있는 것으로 가장하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가장하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하나님을 모든 것을 다 가진 하나님으로 가장하지도 않습니다. 어린아이에게 태속의 평안함을 제공해 주듯이 우리들에게는 엄마의 태속과 같이 포근한 하나님의 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지켜주시고 품어주시고 근심 걱정을 해소시켜 주신다는 말씀은 진실인 것입니다.

절망에서 지켜주십니다

인생을 사노라면 근심 걱정이 문제가 아니라 가장 소중한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절망하고 낙심하여 인생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을 때, 소중한 건강을 잃어버렸을 때 혹은 재산을 다 잃어버렸을 때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환경은 삶의 의욕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게 되어 자살을 하거나 삶을 포기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조국 대한민국에서는 하루에 46명이 자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도 이와 같은 환경에 처해 먼 산을 바라보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라는 탄식으로 말입니다. 이것은 특정한 사람들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험악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은 경험하는 삶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은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나약한 인생들은 어리석고도 극단적인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며칠 전에 대한민국을 깜짝 놀라게 하는 한 사건이 발행했습니다. 26살 먹은 딸이 집 옷장에서 죽은 채로 발견 되었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52살의 그녀의 엄마가 인근 호수에서 죽은 채로 또 발견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나서는 강에서 12살의 아들이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왜 일가족이 이처럼 비참하게 시신으로 발견되었는지 그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찰이 조사한 바로는 타살보다는 자살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그 원인을 생활고로 파악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절망의 늪에 빠지게 되면 소중한 생명을 극단적으로 버리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의지할 곳 없는 인생들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으면 다릅니다. 우리는 욥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10남매를 한 순간에 다 잃었습니다. 건강도 잃어버리고 몸서리처지는 고통으로 잿더미 위에 올라 앉아 기와조각으로 피부를 긁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 많던 재산도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래도 그는 평소에 믿고 의지했던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모든 절망을 견뎌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되었고 갑절의 축복으로 보상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시편 기자는 이와 같은 절망을 하나님을 발견하면서 이겨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121:1-2)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절간에 올라 앉아 있는 Made in China의 돌부처와는 다릅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을 만드시고 능히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권세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처럼 거들먹거리며 망하고 지친 우리들을 무시하지도 않으십니다. 부르면 달려와 주시고 찾으면 만나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은 절망에 빠진 우리들을 지켜주시고 해결해 주십니다.

세계1차 대전 때 미국의 국방상을 맡았던 Newton Baker의 감동적인 일화가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을 읽었습니다. 전쟁 중 유럽에 있는 어느 야전 병원을 방문한 그의 눈에 너무나도 비참한 병사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두 다리를 잃었고 한 팔과 두 눈을 잃은 채 누워 있었습니다. 가슴이 서늘한 안타까움을 가슴에 담은 채 그 병원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닿아 또 다시 그 병원을 찾게 되었는데 그는 제일 먼저 그 환자의 안부부터 물어 보았습니다. “그 안타까운 청년은 아직도 살아 있느냐?” 그랬더니, 그 병사가 그를 치료해 주던 간호사와 결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몹시도 감사한 마음으로 병원을 나왔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그는 국방상을 사임하고 미국의 유명한 의대인 쟌스 합킨스(Johns Hopkins)대학의 재단이사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의대에서 졸업식이 있어 참석을 했는데 박사학위를 받는 한 사람을 보고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는 바로 야전병원에서 보았던 그 청년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에게로 달려가 그의 한 손을 붙들고 축하와 격려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베이커에게 오히려 위로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베이커장관님, 신문을 통해서 얼마 전에 은퇴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도 이 세상에는 할 일이 많이 있으니 낙심하지 마시고 남은 생을 더욱 더 할 일을 하시면서 편안하게 보내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베이커장관님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그 때보다 더 큰 용기와 힘을 받아본 적이 없었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언제나 이처럼 소망이 넘치고 기적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죽음 앞에서도 지켜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무서운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죽음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말은 하지 않아도 이와 같은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고 무서워합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이와 같은 마지막 두려움 앞에서도 우리들과 함께 하시고 우리들을 지켜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코 우리들의 외로운 죽음을 우리들 홀로 감당하도록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저는 부산, 서울, 미국에서 44년 동안 목회하면서 수많은 죽음을 보아 왔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죽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죽는 것은 그 자체가 하늘과 땅으로 다른 것을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확실히 한 사람의 마지막 죽는 순간을 보면 그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천국으로 가는지 하나님 없이 지옥으로 가는지를 알 수 있을 만큼 사람의 죽음은 모든 것을 다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성도의 죽는 것을 지켜주시고 귀중히 여겨주신다는 이 말씀은 진실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사역 중에 그의 사랑하시던 나사로가 죽게 되었을 때의 상황을 보면 이 말씀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11:5-11)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 하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우리는 이 짧은 한 말씀 속에서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 예수님께서 얼마나 따뜻한 사랑으로 함께 하고 계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 무엇이 외롭다 해도 죽는 것보다 더 외로운 것은 없습니다. 그 누구도 그 길을 함께 갈 수 없고 또한 동행해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도 무섭고 외로운 그 길을 하늘의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신다면 그 보다 더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종에게는 친 형제이면서도 친구처럼 가깝고 소중한 셋째 형님이 있었습니다. 혼자 신학교에 다닐 때 부모님이 원치 않으시는 신학대학으로 갔다고 모든 가족들이 종에게 다 등을 돌렸지만 그 형은 종에게 참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드랬습니다. 그리고 늦게나마 예수님을 영접하고 너무나도 말씀과 교회중심으로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열정적으로 하셨던 집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암으로 인해 50대의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종이 가장 슬프고 가슴 아팠던 경험을 하였습니다. 태권도 3단의 유단자이고 신체 건장한 분이셨는데 암으로 인해 앙상한 뼈만 남아 스스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쇠약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스스로 일어나 샤워하고 단장하고 양복을 입고 예배당에 나아가 기도드리고 돌아오셔서 하는 말이 예수님이 나를 데리러 오시니 나는 이제 가야한다.”고 하시면서 하늘나라도 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지켜주십니다. 한 순간만이 아니라 천국에 입성하는 그 순간까지 지켜주십니다.

(121: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는 약속의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도 귀하고 좋으신 하나님께 등을 보여서는 결코 안 됩니다. 이 세상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신앙생활을 바로 하려면 신앙의 주체이신 하나님에 관한 분명한 지식과 확신이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지켜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십니다. 이것을 모른 채 교회에만 다닌다면 돈을 호주머니에 가득 담고 다니면서도 굶어죽는 사람과 같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곳곳에 하나님이 누구신지 분명하게 기록하시고 우리들로 하여금 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로 알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그 중에서도 우리들을 지켜주신다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8절의 말씀 중에 다섯 번이나 우리들을 지켜주신다고 약속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찌하지 못하고 당하는 근심 걱정과 삶의 고통과 절망에 빠졌을 때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해 주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과 같이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 하나님께 대한 기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우리들의 삶의 무게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다가오시고 또한 우리들로 하여금 그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들의 삶 중에 죽음보다 무섭고 두려운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 까지도 귀하게 여기시며 동행하시고 또한 지켜 인도해 주십니다. 그리고 눈물과 아픔과 죽음이 없는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의지하고 따를 수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는 이처럼 소중한 믿음이 필요하고 하나님은 그와 같은 믿음을 통하여서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모쪼록 복된 날 하나님 전으로 올라와 예배로 영광을 돌려드리는 우리 모든 성도들은 이와 같은 굳건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풍성한 은총을 누리시게 되기를 좋으신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주후 2016109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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