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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13일 주일낮설교 (감옥에서 부른 노래)

감옥에서 부른 노래

11. 13, 2016

本文:사도행전16:19-34

:

 

기도로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며 우리들에게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던 사도 바울이 실라와 함께 기도하는 곳으로 가다가 뜻하지 않게 귀신이 들린 여자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 여자는 이렇게 귀신에게 뒤덮인 여인을 고용하여 점을 치면서도 돈을 버는 사람의 하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바울과 실라를 보더니 느닷없이 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말입니다. 이것을 한 번만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바울 일행들이 기도를 하러 갈 때나 길에서 만날 때마다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사도 바울이 엄청 짜증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을 향하여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더러운 귀신아 그 여인에게서 나오라.”고 외치니 순간에 그 여인에게서 귀신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을 고용하여 점을 치며 돈벌이를 하던 주인이 노발대발하여 바울 일행을 관가에 고발하고 투옥을 시켜버렸습니다(16:16-24). 사도 바울과 실라는 그냥 투옥이 된 것이 아니라 거반 죽을 만큼 매를 맞고 발이 쇠사슬에 매인 체 그렇게 비참하게 투옥이 되었습니다.

(16:22-24)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참으로 억울하기 짝이 없는 고통이요 감옥살이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더러운 귀신 하나 쫓아냈을 뿐인데 그는 그렇게도 터무니없는 고통을 당하고 감옥 깊은 곳에 갇혀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 누구라도 원망하며 불평하였을 것입니다. 더 더군다나 만물을 공평하게 판단하시고 공의롭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하던 사람이라면 더욱 더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와 같은 고통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음에도 그곳에서 기쁨으로 기도하고 또한 노래를 불렀기 때문입니다.

(16: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범상한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사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감사의 달 두 번째 주일에 이와 같은 모습을 배우고 본 받기를 원합니다. 억울함 속에서도 드릴 수 있는 감사의 노래, 고통 중에서도 부를 수 있는 찬송이 있는 그런 제2, 3의 바울과 실라가 되기를 원합니다. 함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옥에서 부른 노래

이 세상에서 가장 열악하고 고통스러운 곳이 있다면 그곳은 바로 감옥일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인간의 근본인 자유가 박탈을 당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은 상대적으로 원망과 불평이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과 실라는 바로 그러한 곳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것도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맞고 옴짝달싹도 할 수 없도록 발이 착고에 채이고 감옥 깊은 곳에 갇힌 체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와 같은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억울하게 매를 맞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그들이기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그 사슬을 풀어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믿고 배우고 따라야 할 신앙인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공의롭게 판단하시고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고통을 보상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을 믿고 따르는 것이 또한 신실한 성도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에는 다니고 있으면서도 전혀 이와 같은 복된 신앙관을 가지지 못한 안타까운 심령들이 많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모든 생각과 판단을 하나님이 없는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영을 가진 사람들은 생각과 판단의 근본을 예수님의 잣대에 맞추어야 합니다. 감사는 그래서 예수님의 심장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심장으로 사물을 보고 환경을 판단할 수 있는 그런 성숙한 변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래서 우리들에게 많은 도전과 축복이 되는 귀한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겪은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상하시고 영광을 받으셨는지 본문을 중심으로 자세하게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듣고 은혜 받아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성숙한 성도들로 거듭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과 실라는 억울한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갑이니, 을이니 하는 말과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말들이 난무합니다.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트럼프도 부모 잘 만나서 부동산 재벌로 크는데 큰 힘을 덧입은 인물입니다. 그러한 그가 어떻게 고도로 숙련된 전문 정치인인 힐러리 클린턴을 이길 수 있었습니까? “우리는 미국의 주인인 백인들인데 우리가 왜 외국인과 유색인종들에게 눌려 있어야 하는가? 우리도 먹고 살기 힘드는데 왜 우방이니 뭐니 하면서 고귀한 재산을 남의 나라 지켜주는데 다 허비하느냐? 아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부터 잘 살아야 한다.”는 등의 백인우월주의적인 막말과 패기어린 자신감으로 역차별을 받으며 움츠려 있던 백인들과 소외계층의 가슴에 불을 지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백인들과 미국인들은 원래 갑이고 원래 금수저니 그것을 되찾아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연찮게 유색인종들에게 주권을 내어 주고 움추려 있던 주류세계가 총 결집하여 거짓말 같은 기적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은 바로 이런 곳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가진 금수저요, 능히 갑질을 해야만 하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던 사도 바울은 과연 어떻게 살았습니까? 트럼프와 정반대의 가치관으로 인생을 살아갔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바로 그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들이 수천 년이 지난 지금 냉정하게 또 객관적으로 바울이 당한 사건을 판단해 보아도 그들은 너무나도 억울한 고통을 당하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한 여인이 귀신이 들려 정상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을 고쳐주었다면 상을 받고 칭찬을 받아야지 어떻게 그것으로 매를 맞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지극히 소수의 그 잘난 갑질로 인한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16:19)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갔다가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과연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자기가 데리고 점을 쳐서 돈을 벌어 왔던 그 여인에게서 귀신을 쫓아냄으로 자신들이 더 이상 점을 칠 수 없고 그래서 돈벌이를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이 예나 오늘이나 갑질하는 자들의 행태인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유익을 위해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부류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입에 거품을 물고 사도 바울 일행에게 달려들어 행패를 부리고 짐승을 잡듯이 때리고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으니 감옥에까지 집어넣어 버렸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왜 저렇게도 난리법석입니까? 왜 거품을 물고 거리로 나와 이렇게 추운 밤에 촛불을 들고 시위를 하며 대통령은 당장 하야하라고 아우성입니까? 최순실이라는 여자 하나가 대통령을 꿰어 차고 나라를 자지우지 하며 국정을 농간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니 소외계층들이 그 분노를 이겨내지 못하고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는 억울함을 절대로 그대로 방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보복을 하고 잃었던 그 무엇을 되찾아 와야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억울해도 그 보다 더 억울할 수가 없는 온갖 고통과 모욕을 다 당하고서도 당연한 듯 태연하게 노래나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여기에서 우리들이 교훈을 받고 오늘을 살아가야 할 지혜와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절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라면 이와 같은 억울함을 하나님께서 과연 어떻게 해결하시고 역사하시는지, 오히려 기대감을 가지고 기다려 보는 미덕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삶에서 억울함이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들의 마음이 억울하다고 느낄 뿐입니다. 하나님은 늘 그와 같은 억울하고 원통한 것을 통하여서 우리들의 삶을 인도하시고 기적과 은총을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의 눈에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한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사람이 그 장본인입니다. 그는 시골에서 볼 일을 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다가 많은 사람들이 웅성대고 소란스러워 뭔 일인가 하고 가까이 갔다가 예수님을 잡아가는 잔인한 유대인들에게 붙잡혀서 그 무거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고생고생하며 올라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억울한 노동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지만 그는 그렇게 억지로 진 십자가로 인하여 전무후무한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렇게도 고생하시는 예수님의 짐을 덜어드리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고 또한 성경에 기록 되는 위인이 되었으며 그 아내와 가족들 또한 성경에 기록되는 놀라운 인물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16: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대 사도 바울이 구레네 시몬의 아내를 향하여 그는 내 어머니라고 할 정도였으면 이 보다 더 영광스러운 축복이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순간의 고통을 감내하고 영원히 성경에 기록되는 인물이 될 수 있다면 그 누가 마다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억울함이란 우리들의 생각일 뿐 우리 하나님은 더 좋은 것으로 보상하시고 되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그저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감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참으로 놀라운 감동을 받게 됩니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그런 모진 매를 수도 없이 맞고 그것도 모자라 두 발이 착고에 차인 체 깊은 감옥에까지 갇히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마치 감옥으로 수련회라도 간 사람인 냥 그곳에서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16:22-25)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이는 말하기는 쉽고 글로 읽기는 쉬우나 온 몸으로 당하면서 실천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토록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놓게 하였을까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을 향한 기대와 감사가 넘쳐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기대하는 사람은 그리고 그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은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하실 놀라운 역사를 다 내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하나님은 오래지 않아 기적을 베풀어 주시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16:26)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들이 더욱 놀라는 사실은 이와 같은 기적이 사도 바울과 실라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갇혀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기대하고 믿고 노래하는 그들(사도 바울과 실라) 때문에 그 감옥에 갇힌 모든 사람들이 다 혜택을 입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뿐만 아니라 우리들 때문에 우리 곁에 있는 모든 이웃들조차도 하나님의 은택과 축복을 누리게 해 주는 그런 멋들어진 삶을 우리들도 이제는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가 있고 그 감사가 기도와 찬송이 되어 나타나는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고 말입니다. 갇힌 자를 풀어 주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억울하고 답답한 누명을 벗겨주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가난하고 병든 삶에서 해방 되게 해 주시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감사로 제사 드리는 자들에게 구원을 친히 보여주십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은 바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기적인 것입니다.

지난 10월 중순에 미국의 중요 극장가에서 새롭고 신선한 기독교적 영화 하나가 개봉되었습니다. 그 제목은 “I am Not Ashamed"(나는 부끄럽지 않습니다)입니다. 이 영화는 실화입니다. 지난 1999420일 콜로라도 주에 있는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 사건을 배경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날 어이없게도 동급생 두 명이 총을 들고 학교에 나타나 동급생 아이들 13명을 쏘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도 그 자리에서 자살한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첫 번째 희생자는 독실한 크리스챤인 레이첼 조이 스캇양이었습니다. 가해자들은 그녀를 세워 두고 팔, 다리에 수발의 총을 먼저 쏘았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지금 이래도 넌 하나님을 믿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레이첼은 똑똑하게 그들을 쳐다보며 대답하였습니다. “You know I do"(그렇다는 걸 네가 더 잘 알잖아)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래, 그럼 네 하나님이랑 같이 있어라고 하면서 머리에 총을 쏘아 그 자리에서 즉사시켰습니다. 레이첼을 하나님을 극진히 섬긴다는 이유로 학교에서도 왕따를 당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당당하게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그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이 영화는 이와 같은 레이첼의 믿음과 고민이 담긴 일기장과 그녀의 가족들, 그리고 사건 당시의 목격자들, 친구들의 증언을 토대로 제작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영화의 홍보영상이 갑자기 지난 11개월 동안 유투브에서 차단되어 이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여론이 일어나자 다시 게재되게 되었고 마침내 지난 1021일 대 개봉이 이루어졌습니다. 비록 억울하기 짝이 없고 소중한 생명까지도 잃었지만 그 정신은 만고에 길이 빛나는 너무나도 멋진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비록 17세의 어린 소녀였지만 이 세상 그 누구도 감히 보여주지 못한 당당한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 길이 나타내 주었으니 그녀야 말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가장 위대한 신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사도 바울과 실라와 같이 그리고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 레이첼과 같이 진정한 신앙을 가지고 환경에 굴하지 않는 그런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유지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기적을 통하여 생명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기적같이 옥문이 열리고 몸을 옭아매었던 모든 사슬이 다 풀어졌는데도 죄수들이 단 한 사람도 탈출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16:27-28)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억울하게 옥에 갇혔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옥문을 다 열어 주시고 착고를 다 풀어주셨는데도 그들은 왜 도망가지 않고 그대로 감옥에 머물고 있었을까요?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용기요 여유요 사랑인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줄줄이 감옥에서 나가버렸다면 본문에 기록된 그대로 간수가 자결을 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한 생명이라도 구원하고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도 바울 일행은 감옥에서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진정한 신자들의 마음인 것입니다. 나에게 아무리 유익이 있다 해도 나의 유익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피해가 간다면 나의 유익을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 바로 이 시대에 이런 신자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더욱 놀랍게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16:29-34)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비록 몸은 매를 맞고 터졌으나 그리고 몸은 착고에 채여 감옥에 갇혔으나 결국 그 일로 인하여 이처럼 소중한 영혼들이 다 구원을 받고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으니 전화위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며 노래하는 자들에게 이처럼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 성도들은 영혼 구원에 삶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우리 그렇게 하라고 예수님께서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매와 채찍에 맞으셨고 두 손과 두 발에 못이 박히는 고통을 당하셨으며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희생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이 마지막 때에 믿음이 있는 성도들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모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잘 믿고 바른 구원을 받는 기적 같은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기록하시고 오늘 우리들에게 읽히고 듣게 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처럼 살아가라 하시는 사인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믿음에서 멀어진 삶을 청산하고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며 눈앞에 있는 유익만 쫓아가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말고 멀리서 기적을 안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믿음의 안목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은 이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사건이 아닙니다. 귀신을 쫓아 낸 사건이나 감옥의 터가 흔들리고 모든 착고가 다 풀어진 사건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특단의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순간의 고통과 억울함으로 하나님의 엄청난 계획을 어그러뜨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예견하였고 그러므로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부르심을 받은 본연의 사명에 충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매를 맞아도 원망하지 아니하였고 감옥에 투옥되어도 불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기적으로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다 풀어졌어도 뛰쳐나오거나 그 지긋지긋한 감옥에서 즉시 도망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끝끝내 그는 간수를 구원하였고 그 가족들을 건져내었던 것입니다. 감사는 단순하게 주신 은총에 대한 화답만이 아닙니다. 진정한 감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 드리는데서 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사건들을 우리는 우리들의 영혼 깊은 곳에 새겨 두고 사는 날 동안 거울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모든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것을 통하여서 죽어가는 영혼이 구원을 받을 때 비로소 우리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열매를 맺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의 삶에 나타나는 모든 사건들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고통 앞에서 당당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바로 그것들을 통하여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복된 날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와 예배로 영광을 올려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사도 바울과 같이 고통을 감사로 노래할 수 있는 그런 멋들어진 영혼들이 다 되시기를 우리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61113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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