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27일 주일낮설교 (더 귀한 것을 잡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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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27 November 2016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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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귀한 것을 잡으라!
11. 27, 2016
本文:누가복음18:15-24
說敎:崔 仁 根 牧師
스피노자라는 철학자가 남긴 유명한 말 한 마디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할지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미래지향적인 놀라운 발상이요 생각이요 가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 성도들은 오늘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정의해 두셨던 것입니다.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말입니다. 믿음은 미래를 바라는 것이요 아직 보지도 못한 것을 본 듯 희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렇게 먼 곳을 바라보고 내일을 기대하며 오늘을 손해 보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래는 망하게 될지라도 오늘 풍성하게 얻을 수 있다면 바로 그 길을 택하겠다는 사람들로 지구가 만원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대명사라고 할 만한 사도 바울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미래의 꿈과 소망과 영광을 위해 오늘이라는 소중한 삶을 다 포기하였던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사상이 담긴 몇 마디의 말씀을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롬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고전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빌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대충 이와 같은 말씀들이 사도 바울의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한 가치관이요 거룩한 삶이었습니다. 그렇게 산 그가 생의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습니다.
(딤후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고 말입니다. 누가 과연 인생을 마감하는 임종 시에 이토록 장엄하고 담대하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생애는 성공적인 삶이었고 승리한 삶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미래를 위해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되는 복된 말씀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눈앞의 유익만 추구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내일과 미래를 위해 오히려 눈앞의 유익을 포기하고 내일의 보다 큰 은총을 사모할 줄 아는 바른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더 귀한 것을 잡으라!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우리들이 과연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또한 그렇게 값지고 아름다운 삶을 살으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한 비유를 들어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대충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들을 초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그 잔치보다는 자신의 일과 유익을 더 중하게 여기고 완만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밭을 샀는데 그곳에 가 보아야 한다고 거절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소를 다섯이나 샀는데 그 소들이 일을 잘 하는지 시험해 보아야 한다고 거절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마침 장가를 들었으므로 갈 수 없다고 거절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은 매우 노하였습니다. 그래서 길거리나 골목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청하여 잔칫집을 채우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한 선언을 하였습니다. 청함을 받고도 스스로 거절한 그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내 잔치를 다시는 맛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잔치가 바로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잔치가 천국잔치요 구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잔치를 배설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세상 일이 급하고 중하고 바빠서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눈앞의 유익을 위해 먼 천국의 보금자리를 포기하는 어리석은 인생들의 단면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함께 듣고 배워서 구원의 소중한 축복을 누리는 미래를 살아가는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르실 때 거절하지 말라
놀랍게도 우리 하나님은 아무런 조건도 없이 엄청난 잔치를 배설하시고 사람들을 초대하셨습니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그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한결 같이 사양하고 그 잔치를 외면하였습니다.
(눅14:17-18)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은 다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밭을 샀기 때문에 가 보아야 하고 소를 샀기에 시험해 보아야 하며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얼핏 보면 그 이유들이 한결 같이 그럴 듯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인은 이들에 대해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화를 냈습니다.
(눅14: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그들의 익스큐즈를 주인이 받아주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주인의 초청이 더욱 귀하고 소중하였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나서 하나님을 선택하고 교회를 선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신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에 관한 한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역사요 은혜요 축복입니다. 우리들이 아직 훈련이 덜 되고 온전히 준비가 덜 되어서 그렇지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부르심에 응답한 백성들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실 때 두 가지로 부르십니다. 하나는 외적으로 부르시는 외적소명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내적으로 부르시는 내적소명입니다. 외적인 부르심은 우리 인생들이 거역할 수 있으나 내적인 부르심은 우리 스스로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께서 사역 초기에 열 두 제자들을 부르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주님께서 부르실 때 그들은 한결 같이 자신들의 모든 사업과 직업과 가족들까지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마4:21-22)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어떻게 아버지를 모시고 물고기를 잡던 사람들이 한 순간에 배도 부친도 다 버리고 이처럼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따라 갈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내적 소명의 단면입니다. 그만큼 우리 하나님의 부르심은 권위가 있고 능력이 있으며 거역할 수 없는 놀라운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이 그와 같은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요 기적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한 평생 살아가면서 이와 같은 소명을 등한히 여기면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자리로 돌아오고야 말텐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눈앞의 유익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역한 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았던 가룟 유다는 왜 그렇게도 비참하게 스스로 자신의 목을 매고 죽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요? 그렇게도 돈을 좋아해서 스승까지도 팔아서 어렵게 얻었던 그 돈을 왜 그는 써보지도 못하고 도로 갖다 주었을까요? 거기에 대한 성경의 증거를 다음에서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마27:3-5)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행1:16-19)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 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이에서 우리들이 배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역하고 끝까지 자기 자신의 눈앞의 유익을 위해 쫓아가는 삶은 결코 유익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쟁취하면 되는 것 같아도 그 돈을 쓰지 못하게 하시면 쓸 수 없을뿐더러 그 생명 또한 스스로 망하게 하고 만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영광인 줄 알고 기쁨으로 화답하며 우선적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쫓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이라고 우리 스스로 살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이와 같은 사건을 통하여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확실히 배워야 하겠습니다.
기회가 왔을 때 바로 잡으라
인생의 흥망성쇠는 기회가 왔을 때 어떻게 응답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만큼 기회는 자주 오지 않고 또한 그만큼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 어렵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것이 극명하게 나타나게 되는데 잔치를 배설한 주인은 아무나 초청하지 않고 우선권을 주어 특별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초청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눅14:17)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결 같이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주인은 다시 한 번 더 그와 같이 거절한 자들에게 선언한 말씀이 있는데 그 주인이 남긴 말씀이 두렵습니다.
(눅14: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것이 무엇입니까? 초청을 거절한 그들은 두 번 다시 기회를 가질 수 없도록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신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함부로 쉽게 거역하였다가 두 번 다시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히6:4-6)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육신에 젖어 영적인 세계와 하나님에 관해 지나치게 무지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지혜롭고 똑똑하게 잘 살아가는 것 같아도 이런 면에서 보면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꿈에도 모르면서 몇 십 년을 내다보고 준비하고 예비하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이 말씀을 가슴으로 받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분명한 결단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20여 년 전 꼭 이맘때 익산의 한 나환우 정착촌에서 살 때다. 성탄 전 4주 대림 피정이 끝나는 날 미사 강론을 시작하며 나는 물었다. "여러분 중에 혹 자신의 병을 하느님이 주신 은총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분 계십니까?" 그 순간, 나는 그때 성당의 분위기를 평생 잊을 수 없다. 얼마나 싸늘하고 적막하고 엄숙했던지. 잠깐의 그 적막이 나에게는 얼마나 길었던지.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적막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해하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지그시 눈을 감은 채―사실 그녀는 시력을 잃었다―혼잣말처럼, 그러나 차분히 고백했다. "네, 이 몹쓸 병은 나에게 큰 은총이지요." 그러자 "맞아요. 은총이죠" "은총이죠"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날 나는 그 미사를 어떻게 마쳤는지 모른다. 솟아오르는 눈물을 참아가며 간신히 그 미사를 마쳤다. 성당을 나오는데 한 자매가 수줍은 듯 다가와 속삭였다. "신부님, 이 몹쓸 병은 저에게 큰 은총이죠. 이 몹쓸 병이 아니었으면 나, 이 좋으신 하나님을 어떻게 알았겠어요. 정말 은총이죠. 은총이에요." 핏기 없는 피부에 그냥 그려놓은 눈썹이 무척 고왔다. 그 고운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권이복신부-남원성당, 대장암, 후두암을 앓으며 쓴 에세이에서-11월 24일 조선일보게재)
여기에서 우리는 그 무서운 질병이 하나님을 만나게 된 기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다양한 기회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신부님은 그렇게도 무서운 암과 싸우면서도 질병으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과 가까워졌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똑바로 만난 자들의 아름다운 공백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멀리를 내다보고 오늘을 투자하라!
우리는 육신을 지니고 현실을 살아가는 고로 늘 눈앞의 일과 문제로 허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자꾸 말씀을 듣고 기도를 드리면서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터득하게 되면 사도 바울과 같이는 살 수 없을지라도 보다 더 현재보다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 초청을 사양한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다들 그만큼 다 바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낯선 이민 땅에서 살아가야 하고 자녀들을 양육하여야 하고 불투명한 내일을 개척해 나가자면 피곤하고 바쁘지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영적인 눈을 들어 말씀을 보고 내일을 내다본다면 오늘 우리 하나님의 말씀들이 구구절절이 옳고 또한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지금 믿음이 필요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이 절실한 것입니다. 삶의 늪에 빠져 허덕이다 보면 하루하루가 살 같이 지나가버리고 어느 날 자신을 문득 들여다보았을 때 늦었구나! 하고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을 보면 그들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거울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댜. 이를테면 세례 요한과 같은 분은 이 세상에 와서 33년도 체 살아보지 못한 채 악한 헤롯의 칼날에 목을 잃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우선 그의 삶을 현실적으로만 판단한다면 그는 어리석게 살아간 인물 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비록 이 땅에서의 삶은 짧고도 비참하였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고 거의 2천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도 그를 잘못 살았다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제대로 나가고 거듭난 성도라면 세례 요한을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었으나 오고 오는 성도들의 가슴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눈앞의 유익을 위해 스승이신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 돈을 챙겼으나 그는 스스로 죽었고 결국은 많은 성도들의 가슴에 파렴치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은 결코 땅에서 한 시대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품안에서 영원을 살고 이 땅에서도 세례 요한과 같이 영원히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앞의 유익을 위해 영원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한 번 살펴 보십시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고 실제로 꼭 가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처럼 돈을 모아 땅을 샀는데 어떻게 안 가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소를 다섯 마리나 샀는데 그 소들이 어떤지 시험해 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또 장가를 들었는데 남의 잔칫집에 갈 여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 나름대로 사양하는 이유가 다 타당하고 또한 공감이 갑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들이 객관적으로 저들을 한 번 들여다 보십시다. 지금 그들의 땅은 어디에 있고 그들의 소는 어디에 있으며 그들의 결혼은 지금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을 보지 말고 내일과 미래를 내다보아야 할 가장 분명한 이유입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눈앞의 유익만 바라보고 먼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신령한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육신만으로 보고 듣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단순하게 죽어서 천국 가는 것 이상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눈에도 보이지 않는 신령한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도 죽고 나서도 우리는 세상 육신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에서 자유 하여 거듭나야 하고 오늘이 아닌 내일을 살아가는 신령한 변화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고속도로를 만들 때 박정희 대통령은 정주영회장을 불러 이 일을 의논하고 고속도로 건설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때 야당의 총수였던 김대중, 김영삼씨들은 길길이 날뛰며 극렬히 반대했습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사는 것도 없는데 그 엄청난 돈을 들여 왜 고속도로를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사장에 들어 누워 공사를 방해하며 난리 난리를 쳤습니다. 지금 그들의 행태를 우리는 어떻게 판단하게 됩니까? 한 나라의 미래를 한 치도 내다보지 못한 근시안적인 정치자들이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미국에서도 있었던 일입니다.
1867년 구소련이 눈과 어름덩어리로 덮여 있는 알라스카를 미국이 좀 사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당시 17대 대통령이었던 엔드류 존슨이 사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시워드를 의회에 보내 인준을 받아오도록 하였습니다. 의회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어디에 돈 쓸데가 없어 어름과 눈으로 덮여 있는 그 쓸모없는 땅을 돈을 주고 사려고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때 시워드 장관은 이렇게 설득하였습니다. “의원 여러분, 저는 눈 덮인 알라스카를 바라보고 그 땅을 사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 안에 감추어진 엄청난 자원을 보고 사려고 합니다. 저는 지금 우리들을 위해 그 땅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다음 세대를 위해 그 땅을 사고자 합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천신만고 끝에 720만 달러를 주고 알라스카를 샀습니다. 그 이후 30년이 지나고 그곳에서 엄청난 금광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20세기에는 엄청난 기름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때나 지금을 막론하고 엄청난 해산물과 자원이 돈처럼 쏟나져 나오고 있습니다. 소련은 그 땅을 팔고 땅을 치고 후회하였고 미국은 손뼉을 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지금 720만 불이라는 돈은 교회당 하나 값도 되지 않는 껌 값입니다. 그런데 알라스카에서 쏟아져 나오는 자원은 문자 그대로 천문학적입니다.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지도자 한 사람이 얼마나 엄청난 역사를 만들어 놓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단면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결코 눈앞의 유익과 오늘만 내다보는 어리석은 근시안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목사는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자녀들의 미래를 책임지는 지도자입니다. 믿고 순종하며 미래 지향적인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원시안적인 신앙인이 되어 함께 미래를 개척해 나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복된 감사의 달 11월이 저물고 있습니다. 감사는 결코 저절로 나오지 않습니다. 가시석인 감사의 역사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야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작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그 풍성한 축복을 맛보고 싶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큰 가슴이 없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큰 자가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응답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순종할 수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천국을 상속할 수 있는 큰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그 복된 부르심을 거절하였던 어리석고 초라한 육신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들도 거의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장 현명한 척, 가장 바람직한 척 살아가지만 실상은 그렇게 어리석을 수가 없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영원한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그렇게도 귀하게 여기는 우리들의 건강도 자랑스러운 모든 스펙도 다 생명 하나 사라질 때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그렇게 아끼고 사랑했던 재물 또한 우리들이 죽고 나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단 하루도 예외 없이 그것들을 위해 소중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들이 이렇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영원한 것을 붙잡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 길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거듭나야 뒤돌아보고 후회하지 않는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디 오늘 11월의 마지막 예배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섬기시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지 말고 눈앞의 유익을 과감히 포기하고 영원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성도들로 거듭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자손 만대에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죽어도 영원히 사는 그런 진정한 영생을 누리시는 구별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6년 11월 27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