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22일 주일낮설교 (더불어 사는 지혜)

더불어 사는 지혜

1. 22, 2017

本文:사도행전2:4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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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25년 여 경에 우리 교회에 한 여자 집사가 어떤 남자랑 재혼을 하고 혼자 출석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은 상식적으로 보기 힘든 아주 특이한 사람이었습니다. 서울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하고 유학을 와서 공부한 소위 말하는 엘리트였는데 그 속사람의 생각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을 몹시 싫어하였고 한국 사람과 한국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매우 컸습니다. 그러므로 전혀 한국 사회에 나오는 법이 없었고 심지어는 목사인 제가 그 집에 심방을 가도 아예 집에서 나가버리고 만나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변에 친구도 없고 서로 교제하며 왕래하는 사람 또한 없었습니다. 오로지 자신이 하는 자그마한 사업장과 집에서 부인과 만나는 것이 유일한 삶의 반경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부인과도 문제가 생겨 결국은 그 여 집사는 집에서 나와 아파트에서 혼자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연고가 없이 너싱홈에서 혼자 지내게 되자 할 수 없이 같이 살지 않기로 결심을 하고 집을 나와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었으나 그 여집사가 하루 종일 일하고 밤에는 그 남편에게로 가서 몸을 닦아 주고 보살펴 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 종은 그의 초라한 장례를 치러 주면서 한 가지 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외톨이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더불어 관계를 맺고 상대방의 좋고 나쁜 점을 자신에게도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함께 어우러져 살아야 하겠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지난 금요일인 120일은 미국의 45대 대통령인 트럼프가 취임하는 날이었습니다. 18분가량 계속된 취임사를 귀를 기울이고 들어 보았습니다. 확실히 그는 포플리즘에 빠져 있는 사람이었고 보호주의적인 사상이 강하였으며 미국 우선적 정치를 강하게 펼칠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은 잘 살게 해 주고 우리 미국 시민들은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을 강력 비판하고 그러한데 쓰여지는 돈을 미국 시민들이 더 잘 살 수 있도록 재투자하겠다는 데는 공감하면서도 조국인 한국의 방위비 문제가 상대적으로 떠올랐습니다. 특히 극단 무슬림들은 절대 용납하지 아니하고 이 지구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하겠다는 말에는 섬뜩함이 묻어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일하게 성경을 인용하고 하나님을 들먹였는데 그것은 아주 좋았습니다. 그가 인용한 성경은 바로 시편 1331절의 말씀이었습니다.

(133: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여기에서 트럼프는 우리는 더욱 번영하고 잘 살아가기 위해서 서로 연합해야 한다는 것을 이와 같은 성경을 중심으로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전능하신 하나님이 도와 줄 것이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두 말씀은 진리 중의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면 못 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무리 도와주셔도 우리들이 서로 연합하여 협력하지 않으면 공동체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와 같은 사상과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와주신다는 믿음과 이를 성취하기 위해 우리 모두는 함께 하고 연합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사상을 말입니다.

더불어 사는 지혜

성령 받고 회개한 초대교회에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 바로 연합하고 협력하고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초대교회의 모습은 극단적으로 이기화 된 오늘 날에는 이해조차 되지 않는 그런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살았고 그로 인해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으며 그로 인해 하늘의 하나님의 직접적인 축복을 만들어 냈습니다. 성경 속에서 그들의 모습을 직접 한 번 경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2:43-45-47)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은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초대 교회 성도들의 삶의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성령 충만 받으면 그리고 속사람이 회개하고 깨끗하게 변화를 받으면 이렇게도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무엇보다도 기쁨이 충만하고 하늘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아낌 없이 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살 수 있는 용기와 변화를 만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저께 트럼프 대통령이 강력하게 외친 한 마디가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말만 하고 실천은 하지 않는 워싱턴의 정치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것은 워싱턴의 정치인들만이 아닙니다. 심지어 교회의 지도자들인 목사들조차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입으로 약속하고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는 그러한 분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인 목사가 이 정도라면 세상 사람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행동으로 말하고 행동으로 사랑하며 행동으로 믿는 변화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임재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복된 2017년도를 맞아서 하나님으로부터는 축복을 받고 이웃들에게는 칭찬을 받으며 우리들에게는 놀라운 기쁨과 축복이 되는 그런 삶이란 과연 어떠한 것인지 함께 공부하면서 도전을 받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외톨이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고, 사람들이 또한 가장 밥맛 없어하는 사람의 유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웃들과 담을 쌓고 혼자 외톨이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의외로 우리 이웃에 많이 있음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혼밥족이라는 신종어가 나올 정도로 많이 있습니다. 이는 혼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자그마치 이러한 사람이 백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 놀라운 변화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식당에서는 이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칸막이를 만들어 놓고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고 혼자서 식사를 하고 즐길 수 있도록 배려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달라진 풍속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종이 이 미국 땅에서 13년이란 긴 세월을 혼자서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활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식사문제였습니다. 그때는 이 시애틀 바닥에 한국 식당이 단 두 개 뿐이었습니다. 그 두 개도 다운타운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식사 한 끼를 위해 다운타운까지 나가야만 했었고 그것도 혼자서 식당에 앉아서 밥을 먹으면 모든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아 도저히 갈 수가 없었습니다. 혼자서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은 고역 그 자체였습니다. 밥은 여럿이 같이 먹어야 하고 노는 것 또한 여러 사람들이 서로 어우러져 같이 놀아야 재미가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혼자서 밥 먹고 혼자서 밤이 새도록 개임하고 혼자서 자고 혼자서 사는 것을 가장 편안하다고 선호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와 같은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원래 하나님은 남자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혼자서 사는 것을 보시고 , 저런 것이 좋지 않구나!” 판단하시고 여자를 다시 만들어 그에게로 데리고 와서 함께 살도록 하셨습니다.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최초의 결혼제도가 들어 왔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계속 되고 있으며 어제도 의룡이와 수원이가 하나님의 이와 같은 법을 따라 결혼식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둘이 함께 하라고 하셨으나 하와가 혼자 있다가 그만 사탄 마귀의 미혹을 받고 말았습니다.

(3: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면서 다가와 미혹하고 넘어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힘이 센 남자하면 삼손을 떠올리게 됩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삼손에게 친구가 있었다거나 친구와 함께 다녔다거나 여러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졌다는 기록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그는 혼자였습니다. 그러다가 들릴라라는 여자에게 빠지게 되었고 그 여자와 함께 하다가 적들에게 붙잡혀서 비참하게 두 눈이 빼이고 짐승과 같이 맷돌이나 돌리며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요나단과의 깊은 우정을 통해서 목숨을 건지고 나라의 큰 일을 감당해 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톨이로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것은 사탄 마귀가 좋아하고 범죄에 빠지게 되며 비정상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하나님께서도 이와 같은 자들을 비판하셨습니다.

(18:1)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교회에서까지 이렇게 편을 가르고 비판하고 스스로 나뉘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서로 양보하고 도와주고 사랑하면서 함께 어우러져서 한 목적을 함께 이루어가는 교회는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상의 낙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남녀노소 빈부격차가 함께 어우러져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곳은 없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Safari(사파리)에서 노니는 동물들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그렇게도 등치가 좋은 얼룩말들이 떼를 지어 함께 노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한 순간에 사자가 나타나 그들을 공격하면 얼룩말들은 그런 위기 중에서도 함께 뛰고 달리며 무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한 마리가 외톨이가 되면 그것을 먹잇감으로 찍고 끝까지 따라가서 마침내는 양식으로 삼는 것을 봅니다. 짐승들이라도 이처럼 무리 지어 사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함께 찬송하고 함께 말씀 듣고 함께 섬길 때 사탄 마귀가 공격해 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리에서 떨어져나가는 어리석은 외톨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더불어 사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미국 땅은 참으로 외롭습니다. 정든 친구들도 없고 가족들이나 친척들도 없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 오로지 일터와 마켓만이 우리들의 삶의 적막한 반경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속사람이 삭막해지고 거칠어지며 메마른 여름 논바닥처럼 마음이 갈라지고 황폐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라는 곳에서 우리는 많은 위로와 소망과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따금씩 그런 교회를 이용이나 하는 그런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음을 이민목회 35년 동안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너무나도 많이 경험하고 잘 알기에 유학생들이나 국제결혼 한 사람들, 그리고 시애틀로 최근에 이사 온 분들에게 부탁을 드립니다. “묵묵히 교회에 뿌리를 두고 부지런히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교회가 참으로 큰 도움이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다가 위기를 당하게 되면 그때서야 교회를 찾고 목사를 찾습니다. 참으로 불쌍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인생은 별것 아닙니다. 함께 할 때만 의미가 있고 유익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케이스를 예수님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배우게 됩니다. 십자가를 지셔야 할 때가 가까워지시자 심히 고민하시고 답답하셔서 12제자들 중에서 특별히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선택하시고 마음을 열어 자신의 현실을 고백하십니다. “내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들은 나와 함께 깨어 있어 기도해 다오.”하시면서 그들을 데리고 겟세마네라는 동산으로 올라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한참 기도하시고 돌아보니 세 제자들이 기도는커녕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실망하셨겠습니까? “너희들은 한 시 동안도 깨어 있어 기도할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하시고 다시 기도하시는데 얼마나 기도를 열렬히 하셨던지 땀방울이 떨어지는데 피가 되어 붉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시고 돌아 나오시니 세 제자들은 아예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오늘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십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왜 주님께서는 그렇게도 깨어 있어 기도도 못하고 기도는커녕 주님의 마음조차도 이해하지 못한 채 졸고 자고 있었던 그들을 무엇 때문에 함께 가자고 하셨을까요? 그렇게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그들이었지만 주님은 함께 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결코 주님 혼자 가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해서 함께 가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함께 가는 것이 오히려 더 방해가 되고 고통이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고 함께 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달래고 찾아가고 부탁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없으면 안 되어서가 아니라 함께 가야 할 예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끝까지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함께 가셨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배신하고 원점으로 되돌아가버린 그러한 황당한 상황 속에서도 부활하시자 말자 곧바로 그들이 사명을 버리고 갈릴리 호수로 달려가 물고기나 잡고 있는 그들에게 달려가셔서 손수 조반을 만들어 먹이시면서 까지 그들과 함께 하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결국 오늘 본문의 기적을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2:43-45)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함께 가야 합니다. 우리는 같이 가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공동체 속에서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결코 혼자 떨어져 나가 외톨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종이 44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이렇게 혼자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 잘 되는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을 향해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의 유익을 구하여 떨어져 나가서 온갖 지혜를 다 배척하니 그 결국은 망하는 것 뿐이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가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공동체에서 벗어나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공동체는 그 하나가 없어도 잘 되지만 그는 공동체에서 떨어지는 순간 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오늘날 교회를 세우시고 운영해 나가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말 못하는 철새들도 떼를 지어 나르고 이동합니다. 그렇게 하면 공기의 저항을 70%까지 막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하 40-50도가 넘는 강추위 속에서 펭귄들은 서로 몸을 맞대고 겨울을 지냅니다. 그렇게 하면 혼자 있는 것 보다 추위를 40%까지 막아낼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만물의 영장입니다. 혼자 너무 똑똑해서 혼자 다 잘해 낼 수 있을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자녀들이 결혼을 해도 목사가 필요하고 부모님께서 하늘나라도 가셔도 목사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최소한 목사 한 분만은 좋은 관계를 맺어두어야 합니다. 절대로 믿음의 공동체에서 스스로 앙탈부리며 떨어져 나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교회라는 그룹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공동체 안에서 역사해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 예수님께서 하신 한 말씀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고 새겨 두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누구와 함께 해 주시는가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와 함께 하시는지 아십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혼자가 아닌 두 세 사람들 중에 함께 하십니다. 여기에서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양질의 음식을 먹으면 건강에 유익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영혼도 주님께서 함께 해 주셔야 잘 되는 것은 상식이요 우리들의 경험으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해 주시지 않는다면 어린 아이에게 엄마가 없는 것과 같이 허무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셔야만 우리들이 평안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고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들과 함께 하시는 곳이 바로 교회라는 사실을 우리는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11:4)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2: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이상의 말씀들은 한결 같이 똑 같은 의미로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여호와께서 이렇듯 성전에 계실까요? 그곳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성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복된 영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막연하게 모여 있다고 하나님께서 그곳에 함께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은 그렇게 모인 성도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역사를 만들어 갈 때임을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만 함께 해 주신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형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삶의 여정과 우리들의 자손들에게 최고 최상의 축복은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축복 중의 축복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멀리 하란으로 도망가던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시고 엄청나게 놀라운 축복을 주시던 광경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축복의 핵심은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너를 떠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 후에 야곱의 생애를 보면 과연 하나님은 야곱을 떠나지 않으시고 라반이라는 외삼촌댁에서 큰 부자가 되게 하시고 야반도주하는 야곱을 잡아 죽이겠다고 살기등등하여 따라 갔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가로 막고 선악간에 말조차 못하게 하시던 것을 기억합니다.

(31:29)

너를 해할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야곱이 그렇게도 무서워하던 형 에서까지도 하나님께서 그 악한 마음을 돌려 형제가 화목하게 재회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던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만 함께 해 주신다면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들의 삶은 형통,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축복의 시은소인 성전을 떠나거나 축복의 공동체인 무리에서 떠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예외 없는 하나님의 방법이요 하나님의 약속이요 하나님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결코 하나의 구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들이 잘 살아갈 마지막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성경이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외톨이가 되어 감정에 따라 어리석은 자신의 눈앞의 유익을 따라 살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제자들까지도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하실 만큼 함께 가는 것을 귀하게 여기시고 몸소 실천하시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더불어 모이고 더불어 찬송하고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우리 주님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함께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얄팍한 우리들의 감정을 따라 무리에서 나뉘이고 떨어져 나가는 어리석은 우를 더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 34년이란 세월 동안 달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말씀을 먹은 신자답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도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믿음과 삶을 온 몸으로 실천하고 또한 후손들에게 유산해 주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그런 멋들어진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른 신앙이요 또한 바른 축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귀한 날 귀한 믿음으로 하나님 전에 나아와 예배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이와 같은 믿음으로 밝아온 2017년 새해에도 풍성한 축복으로 승리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7122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