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2일 주일낮설교 (마지막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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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12 March 2017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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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희망
3. 12, 2017
本文:마태복음14:22-33
說敎:崔 仁 根 牧師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우리 모든 직분자들이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의 삶 속에서 얼마나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내는지, 우리들이 기도 드릴 때나 찬송할 때 그렇게도 많이 들먹이는 예수님의 능력을 일상에서 얼마나 많이 체험하고 있는지, 한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냥 관념적으로, 습관적으로 교회에만 다니며 말씀도, 예수님도 없는 빈 영혼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돈이 있고 능력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반대로 그것이 없으면 그저 낙심하고 절망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신자라면 참으로 생명 버리시며 우리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 앞에 너무나도 초라하고 부끄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자랑할 만한 것이 없을지라도, 비록 세상에서는 무시를 당할 만큼 초라하고 무능하여도 오히려 모든 것을 다 가진 그들 앞에서 더 당당하고 더 소망이 넘치는 이런 역설적인 삶을 살아야 스스로 잘난 그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21세기 지금도 기적을 베푸시고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를 이 땅에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지금 지구촌에서 가장 악랄한 집단은 IS일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야쿠자일 것입니다. 그들의 잔인함은 사람을 새 한 마리 죽이는 것보다 더 쉽게 죽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자살폭탄을 터트리는 데야 누가 그들을 당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에도 김정남이 독살 되어 전 세계적으로 곤역을 치루었던 말레이시아에서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의 방문 때 그 국왕을 죽이겠다고 7명의 자살테러집단이 준비하고 있다가 체포 되어 간신히 국제적인 위기를 모면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슬람국가(IS)가 말레이시아를 방문한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을 차량 폭탄테러로 암살하려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말레이시아 당국이 국왕 방문 직전 범인들을 체포하지 못했다면 김정남에 이어 또 자국에서 고위급 해외인사 암살이 벌어질 뻔했다.
할릿 아부 바카르 말레이시아 경찰청장은 지난달 26일 말레이시아를 방문한 살만 빈 압둘아지즈 사우디 국왕을 암살하려던 예멘인 4명, 인도네시아인과 말레이시아인 2명, 국적을 밝히지 않은 동아시아인 1명 등 7명을 체포했다고 7일 밝혔다. 이들 중 2명은 2015년 시리아에서 IS로 투신한 말레이시아인 무함마드 웬디 모하메드 제디와 교신하며 테러를 준비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암살 계획은 현지 경찰이 지난달 21~26일 쿠알라룸푸르 인근에서 범인들을 모두 잡아들이면서 무산됐다. 암살은 예멘인 1개 팀, 인도네시아인과 말레이시아인 1개 팀, 동아시아인 1개 팀으로 총 3개 팀이 나눠 맡았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다.
암살 작전은 미국의 주요 동맹국인 사우디에 적대적인 IS 주도 아래 예멘의 후티 반군 등이 합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체포된 예멘인 4명은 이란의 지원을 받는 후티 반군 소속으로, 말레이시아에서 가짜 여권과 마약을 판매해왔다. 이들이 잡힌 집에서는 각기 다른 화폐로 6만 달러 상당의 금전이 발견됐다. 사우디는 예멘 내전에서 서방과 함께 정부군을 도와 후티 반군에 폭격을 가하고 있다.](동아일보 3월 8일자)
이것이 바로 IS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자행하는 범죄의 단면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와 같은 IS의 고위직에 있던 악랄한 인간이 예수님을 영접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거의 상상이 가지 않는 기적 같은 역사가 얼마 전에 실제로 일어나 미국 CNN의 전파를 타고 전 세계에 전해졌습니다.
마지막 희망
지난 2월 14일 미국 CNN과 가스펠헤럴드, 영국 크리스천투데이 등 기독교 매체들은 일제히 IS의 수니파 최고위급 지도자 무함마드(가명)의 개종 소식을 특종으로 다루어 보도했습니다. 그는 The Leading the Way의 소속 선교사역자들을 잔혹하게 살해하려고 준비를 하던 중 이 선교단체의 사역자 피터(가명)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이 선교단체는 IS의 잔악상을 전 세계에 알리며 그들을 향해 선교하는 선교단체입니다. 그런데 만나자고 하니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십중팔구 이는 유인책임에 틀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피터는 만나자고 응하였습니다. 선교를 하려면 일단 만나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본부에서는 강력 반대했습니다. 잔인한 그들에게로 갔다가 인질로 잡히거나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피터는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린 문제니 죽으면 순교하리라는 결사 각오로 무함마드를 만나러 갔습니다. 피터는 그 잔인한 무함마드에게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사랑, 그리고 그 놀라운 구원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피터가 전한 복음의 말씀에 큰 감동을 받은 무함마드는 피터를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그 다음에 성령님의 강력한 감동이 무함마드의 심령에 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꿈속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나를 따르라”는 강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꿈속에서 그는 그 예수님을 영접하겠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다시 The Leading the Way로 연락을 했고 다시 그 지도자들을 만나 이 모든 사실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수염을 깎고 정식으로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과 피터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사실 피터를 만나려고 한 것은 그를 잔인하게 죽이려고 유인하기 위해서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가장 잔인하게 살인과 납치 및 인간으로 할 수 없는 범죄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야쿠자 출신 다츠야 신도씨도 그곳에서 탈출하여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결국에는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는 온 몸에 야쿠자로 살겠노라고 문신을 했고 충성맹세를 위해 새끼손가락을 도끼로 잘랐던 잔인한 인물이었습니다. 마약과 폭력과 살인으로 3번씩이나 감옥에 들어갔고 그곳 독방에서 너무나도 심심하고 무료하여 성경을 읽었는데 그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만기 출소한 후 그는 도쿄 외곽 사이타마현에 있던 어머니께서 운영하시던 가라오케를 개조하여 교회를 만들고 지금 100여명의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이 종은 이 두 사건을 접하면서 이것이 바로 21세기 하나님의 능력이요 성경 말씀의 기적임을 의심의 여지없이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적은 성경 속 인물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꾸준히 하나님은 살아 계신 능력을 만 백성들에게 친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서 인생의 진면목과 그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함께 체험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를 원합니다.
인생은 풍랑의 연속입니다
오늘 본문을 조용히 묵상해 보면 예수님 없는 이 세상은 그 자체가 거센 풍랑의 연속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14:22-24)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을 뒤돌아보면 전혀 이 말씀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눈을 뜨면 죽어라 일을 하고 일을 끝내면 고단하여 또한 잠을 자야만 합니다. 이와 같은 반복을 끝내고 나면 이미 늙고 병들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일상의 모습입니다. 이민생활이라는 게 다들 예외 없이 그렇게 되어 있음을 35년이란 세월을 경험해 보니 그렇습니다. 젊어서는 조금이라도 더 벌어 보겠다고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일하고 돈이 좀 모이나 싶으면 그 몸이 병들어 그렇게 온 몸이 병드는 줄도 모르고 벌었던 돈을 다 투자하여 병든 몸을 살리려고 몸부림치는 그런 것임을 누군들 모르겠습니까?
한국일보에서 재미있는 보도를 하나 내 놓았습니다. 직장인 1030명을 대상으로 “언제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그만 두고 싶으냐?” 는 질문에 대한 응답을 정리해 해 보도한 것입니다.
[직장인들이 사표를 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상황 1위는 '회사에 비전이 없다고 느껴질 때'인 것으로 나타났다. 사표 충동을 유발하는 상대로는 직속상사를 1순위로 꼽았다.
취업포털 사람인은 직장인 1천30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93.2%가 '사표를 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고 답했다고 8일 밝혔다.
충동적으로 사표를 내고 싶은 상황은 회사에 비전이 없다고 느껴질 때(56.3%·복수응답)가 가장 많았다.
또 '열심히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34.4%), '내 잘못도 아닌데 책임져야 할 때'(31%), '잦은 야근 등 격무에 시달릴 때'(30.1%), '남들보다 낮은 연봉 등이 비교될 때'(30%), '일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26.4%)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사표 충동을 유발하는 상대로는 단연 직속상사(58.3%·복수응답)가 꼽혔다.
CEO(최고경영자) 등 임원(45.8%), 고객(7.9%), 거래처(7.5%), 동기(6.3%), 인사 관련 부서(5.7%), 후배(5.4%) 등이 뒤를 이었다.
사표 충동을 느끼는 빈도는 '하루에도 수시로(24.3%)'와 '어쩌다 한 번(24.1%)'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이어 '2~3일에 한 번(13.1%)', '매주(11.1%)', '매달(11.1%)', '매일(9.2%)' 등의 순이었다.](한국일보 3월 7일자)
다들 이렇게 마음고생 몸 고생을 하면서 삶의 전선에서 뛰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이 넉넉한 것도 아닙니다. 1년 개인 수입의 평균이 290만 원 정도인데 이것저것 다 떼고 나면 손에 남는 것은 2-30만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싱글들은 집과 먹는 것에 다 들어가고 중년들은 아이들 학원비로 다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은퇴를 하고 나면 백수가 되어 오갈 데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실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제자들과 같이 캄캄한 밤에 작은 배 안에서 풍랑을 맞은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왜 IS와 야쿠자에서 삶의 보람을 느끼지 못했을까요? 그들은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두렵지 않는 그리고 스스로 선택한 삶의 최고봉이라고 느끼고 살았을 텐데 말입니다. 인생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모르지만 결국은 늙고 병들어 이 세상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의 선택이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이 선언합니다. 죄로 얼룩진 인생은 수고와 슬픔과 죽음을 면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창3:17-19)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시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욥5:7)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는 말씀들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 할진데 우리들이 애써 외면하며 아니라고 도리질을 한 들 무슨 달라질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희망을 오직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위하여 생명까지도 내어 주신 예수님께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이 마지막 때의 희망입니다
막연한 이야기가 아니라 삶 속에서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그 예수님과 대화하고 그 예수님을 기대하며 의지하는 성도는 이 시대에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이 시대에 교회가 희망이 되지 못하고 아무리 절망해도 성경 속에서 길을 찾으려는 사람이 없는 것은 이처럼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 희망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조용히 들여다보면 오늘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차라리 지극히 정상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을 지금에서 모시고 숱한 이적과 기적을 본 제자들마저도 풍랑 속에서 예수님을 기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최악의 절망 속에서도 예수님을 찾지 않았고 실제로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지만 유령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들도 그 한 밤에 풍랑 속으로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비현실적인 신앙의 단면입니다. 신앙은 그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기대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상황 속에서 제자들의 신앙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마14:24-26)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이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어려울 때 마음의 위로나 받자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들의 삶의 근본이요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이 실제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배가 고플 때 빵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빵을 들고 나타나 주실 예수님을 기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시23:1-4)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는 사울 왕의 정예된 3천 명의 군사들에게 쫓기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로부터 당할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실제적인 신앙입니다. 이것이 가장 구체적인 신앙인의 고백이요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렇게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오늘 우리들에게 그렇게 믿을 수 있는 팁(Tip)
을 하나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시37:4-6)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고 말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막연하게 예수님을 희망으로 삼고 그 예수님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먼저 그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과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친히 한 가지 축복의 지름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과감하게 결단해야 합니다. 이 마지막 고통의 때에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그 예수님의 은총과 축복을 얻을 수 있도록 그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IS와 야쿠자에서 탈출하여 예수님의 품에 안긴 위대한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또 생각하고 또 재보고 또 우물쭈물 하다가는 결국 사탄 마귀의 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옳다고 성령님께서 조명을 조시면 그 즉시로 결단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폐일언하고 이 마지막 시대의 우리들의 마지막 희망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십니다. 바로 지금 이 예수님과 손을 맞잡으시기 바랍니다!
남북 전쟁 때 미국의 워싱턴 장군이 가장 고전한 전투는 필라델피아의 벨리 포지(Valley Forgy)라는 마을에서의 전투였습니다. 군인들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탈진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워싱턴이 전투에서 승리할 것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워싱턴의 비서인 루이스는 '필승'을 확신했습니다. "장군은 하루에 네 번씩 성경을 펴놓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그의 얼굴은 너무나 평화로웠습니다. 전투는 끝까지 침착성을 유지하는 쪽이 승리하는 법입니다." 워싱턴은 성경 묵상과 기도를 통해 마음의 평안과 지혜를 얻어 대승했습니다. 벨리 포지에는 지금 워싱턴기념교회가 설립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기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민족의 지도자들이 겸손한 마음으로 백성을 섬기게 하소서." 이렇듯 예수님을 모시고 드리는 기도에는 '절망, 한숨, 눈물'을 '희망, 찬양, 미소'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삶에 예수님께서 친히 물 위를 걸어 오셔서 풍랑을 잔잔케 해 주시는 기적을 베풀어 주신다면 그 얼마나 더 좋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결코 꿈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들과 함께 하시려고 친히 하늘 보좌도 버리고 이 땅에 강림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워싱턴과 같이 눈앞에 보이는 절망만 보지 말고 눈에도 보이지 않지만 우리들과 함께 역사해 주시는 예수님을 가슴으로 모시고 의지하는 멋들어진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의 주인공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추상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 땅에 존재하셨고 숱하게도 많은 역사를 남겨 놓으신 하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3년의 공생애 동안 성경에 남겨 두신 기적만도 37가지나 됩니다. 그 외에도 예수님의 행적을 다 기록하려면 하늘 아래에 다 쌓아 둘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행적과 기적을 일일이 다 기록하지 아니하고 선별적으로 기록하여 남겼노라고 성경에다 그 이유를 기록해 두었습니다.
(요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1:25)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고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단순하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자체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이유는 보통 사람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이적과 기적을 통하여서 미련한 우리들에게 믿음의 확신을 주시고 진정한 구원을 베풀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빌립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당부하시기를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께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만약 그것을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행했던 숱한 기적을 보고 믿으라.”(요14:11)고 말입니다. 이렇듯 우리 예수님은 숱하게도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신 기적의 주인공이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늘의 하나님이심을 만 백성들에게 친히 증거해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참으로 독특한 기적으로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나타나 주시고 불안과 고통에 떠는 제자들을 건져내 주셨습니다.
(마14: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라는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렇게도 짧고 단순한 말씀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만 세상에 증거해 주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그 누구도 이렇게 바다 위를 걸어서 다닐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순하게 예수님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도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마14:28-29)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정도이면 예수님이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삼척동자도 다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게네사렛 땅의 모든 환자들이 몰려들었는데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모든 병이 다 낫는 엄청난 역사를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마14:34-36)
저희가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그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다만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이제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신앙생활을 접고, 막연하게만 믿었던 예수님을 기적의 주인공으로 가슴에 모셔야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삶의 위기의 순간에 이와 같은 예수님을 모시고 기적을 체험하는 그런 멋들어진 신앙생활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기 위해 한 모퉁이를 돌아가면 길 오른 쪽으로 아담한 동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동네의 이름은 베다니라는 곳입니다. 바로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가 살고 있었던 동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그래서 자주 모시고 대접을 하며 말씀을 배우는 아름다운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 우리들처럼 인간적으로만 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말씀의 주인으로 알고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다가 불행하게도 부모와 같이 의지하고 있었던 오라비 나사로가 중한 병에 걸리게 됩니다. 그러자 두 자매는 즉시 멀리 계시는 예수님께 이와 같은 위급상황을 통보하여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요11:1-3)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중병으로 결국은 죽어버린 오라비 나사로를 그곳에 오신 예수님께서 친히 살려내시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요11:39-44)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과 이 내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처럼 예수님을 기적의 주인공으로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모시지를 않습니다. 이 사건을 머리로만 알고 생활은 우리들의 경험과 지식과 돈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결코 관념이 아닙니다. 신앙은 실제입니다. 예수님은 그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더 이상의 소망이 없는 줄 알고 기적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곳에만 마지막 희망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유일무이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봄을 여는 3월도 벌써 중순입니다. 우리들의 마음과 가정과 생업에도 봄기운이 넘쳐나서 신선한 회복과 축복이 가득하게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복 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이 세상에서 마지막 희망은 오직 기적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뿐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밤 깊은 4경에 일엽편주와 같이 풍랑에 흔들리며 고통당하는 제자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없었습니다. 바로 풍랑에 시달리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21세기 광풍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인 것입니다. 그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다급하게 달려오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고통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아실뿐만 아니라 근본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 급히 물 위로 달려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동화 속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의 생생한 증거입니다. 삭막한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남 모르게 당하는 고통을 알아주는 사람이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그리고 그 고통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주실 분은 또한 누구입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마지막 희망은 우리들의 고통을 다 아시고 친히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예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눈 산으로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뉴욕이나 LA로 비행기를 타고 갈 필요도 없습니다. 그 고귀하신 능력의 주님은 오직 성경 속에 머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들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모쪼록 복된 주님의 날에 예배자로 성전에 올라오신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이와 같은 마지막 희망으로 예수님을 찾아 성경으로 돌아가는 가장 멋들어진 성도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7년 3월 12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