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7일 주일낮설교 (어린이는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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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Wednesday, 10 May 2017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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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는 희망입니다
어린이주일
5. 7, 2017
本文:마태복음18:1-7
說敎:崔 仁 根 牧師
경기도 오산에 있는 한세교회에 지난 달 부흥회를 다녀왔습니다. 지금까지 다녀 본 교회 중에서 가장 작지만 가장 아름답게 훈련되고 영적으로 잘 다듬어진 그런 좋은 교회였습니다. 말씀 중심으로 예배에 올인 하고 온 교인들이 감사와 십일조로 하나님을 섬기며 어린아이처럼 말씀을 달게 받아 먹는 그런 교회를 보기란 이 시대에 쉽지 않기에 큰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은 조금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오래 전 그 교회의 80%가 교회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생 목회하면서 겪은 확신 하나는 오래된 어른들은 절대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부터 키워서 교회의 일꾼이 되게 하고 미래를 기대하는 것이 최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어린아이부터 훈련하고 함께 공부하고 예배드리며 찬양하고 헌금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교회에는 주일학교 어린아이부터 중고등부 청년대학부까지 다 같이 예배를 드리며 새벽기도까지 동참하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부교역자 대신 목사님께서 선택하여 훈련한 6명의 간사로 하여금 교회의 모든 교육과 훈련을 맡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전 교인이 작지만 하나가 되어 가정 같은 교회를 이루고 활기차게 내일을 향해 전진하는 전형적인 교회의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오늘 우리교회와 흡사한 데가 많아 공감을 하면서 감명을 많이 받고 돌아왔습니다.
어린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를 상상하면서 어린아이를 키워야 합니다. 우리교회도 동일한 문제를 경험해 왔습니다. 어른은 결코 변화 되지 않는다는 한세교회 목사님의 진단은 옳았습니다. 어른들은 자기 주장한 내 세울 뿐 예수님의 사람으로 결코 변화 되지 않습니다. 어른이 예수님 믿고 온전히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은 거의 보지를 못했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렇게 약속해 놓고서도 돌아서면 십일조를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릴 때 용돈에서부터 십일조를 드리는 훈련을 받은 어린아이는 어른이 되어 많은 연봉을 받아도 아깝다 하지 않고 십일조를 반드시 드립니다. 이는 훈련 받고 자랐기 때문에 그것이 아깝다가거나 부담스럽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은 2017년도 어린이주일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는 희망입니다!”는 결론을 얻고 이를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어른들은 변화 되지 못하는 자신을 되돌아보고 아이들만큼은 올바로 키워야 하겠다는 결단을 하는 복된 역사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린이는 희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른들을 교훈하실 때 어린아이를 그들 앞에 세우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어른의 선생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부터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하겠습니다.
(마18:1-6)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참으로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고 모를 것 같으면서도 알 것 같은 아리송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어른들이 불행하게도 아이들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오늘 함께 공부하면서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기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른은 자기중심이나 아이는 예수님 중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무리 못나도 오늘 우리들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그들은 최소한 예수님을 두 눈으로 보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려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보고 배웠습니다. 왜 3년일까요? 3은 완전 숫자입니다. 그들은 더 배워야만 될 정도로 시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배우려면 완전하게 배울 수 있는 기간이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졸업식을 앞두고 참으로 추악한 모습을 예수님께 보여주었습니다.
(막10:35-37)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 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막10: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이것이 3년씩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오늘 본문에서는 천국에서는 과연 누가 더 클 것인가에 대해 논쟁하다가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마18: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집사가 되어도 장로가 되어도 심지어 지도자인 목사가 되어도 이와 같은 인간 본색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 모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 앞에 어린아이들을 부르시고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 아이들을 선생처럼 세우시고 가르치셨습니다.
(마18:2-3)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충격적인 말씀을 듣게 됩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는 결코 단순한 교훈이 아닙니다. 천국과 연관이 있는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왜입니까? 교만한 자는 결단코 천국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잠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호7:10)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 저희가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
이런 말씀들은 한결 같이 교만한 자가 어떻게 되는가를 증거해 주는 놀라운 말씀들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이와 같은 교만이 거의 다 있음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아직 아이들이 교만하다가 망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옳았습니다. 우리는 늘 어린아이들을 가슴에 새기고 교훈으로 삼아 천국으로 가지 못하는 교만의 길에서 돌이켜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은 곧 천금보다 귀하여 수천 년이 지나도 그대로 열매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이주일을 맞아 우리 속에 잠재하고 있는 교만만 내어버릴 수 있어도 우리는 곧 복 받은 성도들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어린아이는 도화지와 같습니다
우리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미술 시간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는 꼭 도화지와 크레용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리고 제한된 시간에 선생님의 지시를 받아 풍경화든 정물화든 인물화든 그림을 그렸습니다. 하얀 도화지에는 크레용을 든 아이의 손에 따라 그림이 채워졌습니다. 이와 같이 어린아이는 하얀 도화지와도 같습니다. 그곳에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 그 아이의 장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모나 우리 모든 어른들은 무한 책임감을 가지고 아이들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의 먼 장래가 오늘 우리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은 참으로 무섭고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한 마디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는 그만큼 어린 자녀들의 장래가 그 부모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또한 결정지어 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엡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는 말씀의 의미는 그래서 그렇게도 무겁고도 중차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얼마 전 대한민국 방송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마스터(국수의 신)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아주 악한 사람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집에 불을 질러 살해하고 그 아버지의 국수에 관한 레시피를 훔쳐 큰 사업에 성공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이 불에 탈 때 그리고 그 부모들이 불에 타 죽어가고 있을 때 몰래 숨어서 그 악한 사람의 행위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어린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어린 시절과 청년의 시절을 오로지 부모를 죽였던 그 악한 사람의 원수 갚는 일에 올인 하여 결국은 장성한 청년이 되었을 때 그 원수를 갚고야 맙니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들의 아이들에게 이와 같은 악한 그림이 그 마음 판에 그려지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딸은 아버지 같은 신랑감을 찾아 나서고 아들은 엄마 같은 신붓감을 찾아 나서는 그런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릴 때 그 어린 가슴에 아픔과 고통을 심어주게 되면 그 아이의 평생은 그 원망과 아픔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기에 극히 조심하여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어린 가슴은 하얀 도화지와 같아서 부모들이 무엇을 그려 넣는가에 따라 그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1889년 이 땅에 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한 아이는 오스트리아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 부모는 서로 4촌 남매였기에 부부가 될 수 없는 부부였습니다. 아버지는 몹시 성미가 급했고 어머니는 주부로서의 일이나 엄마로서의 일에는 흥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는 죽고 엄마는 이 아이를 알코올중독자인 숙모에게 내맡기고 도망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16살이 된 아이는 학교를 중퇴하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입에 풀칠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군대에로 들어갔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하자 그는 정치 사회에 투신하여 극렬분자가 되었습니다. 반란음모에 개입하였다가 투옥되며 더욱 맹렬히 정치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가 결국 1933년 자기 자신을 독일 국민의 절대 영도자인 Fuhrer(통치자, 독재자)가 됩니다. 그가 바로 세계적인 원흉인 아돌프 히틀러였습니다.
같은 1889년에 또 다른 아이가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 하며 자라났습니다. 그 부모는 이 아이를 데리고 켄사스 농촌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아이에게 농촌생활을 통한 신앙훈련을 하기 위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이 아이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가훈을 가르치며 신앙의 모범으로 보여 교회에서 죽도록 헌신하며 충성하였습니다. 이 아이도 군대에 흥미를 안고 웨스트포인트 육사를 졸업하였습니다. 1944년 6월 6일 이 두 두명의 동갑나기가 전투에서 마주 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11개월을 마주보며 싸웠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였습니다. 그 후 19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방공 지하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사라졌습니다. 전 세계는 그로 인해 박수갈채를 보내며 기뻐하였습니다. 1969년 아이젠하워가 80세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날 때 전 세계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두 사람의 인생이 그들의 부모에게 달려 있었음을 우리는 극명하게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들의 어린아이들에게 어떤 그림을 그려주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삶이 바로 그들의 미래가 된다는 사실을 두려운 마음으로 깨닫고 신선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우리들의 아이들에게 그려줄 수 있도록 믿음으로 인격으로 승리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됩니다
아이는 자랍니다. 그래서 아이는 소망입니다. 결코 아이로 영원히 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아이들이 잘 자라도록 우리 모든 부모들과 어른들은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아이들은 자라서 소망스런 어른이 될 수도 있고 절망적인 어른이 될 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른 앞에 아이를 세우시고 교훈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을 걸고 엄명 하셨습니다. “아이와 같이 되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아이들에게 소망을 심어 주는 책임 있는 어른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실상은 어떻습니까? 그릇된 어른들로 인해 꿈을 안고 자라나야 할 아이들이 그 얼마나 무서운 희생을 당하고 있는 모릅니다.
[두 살배기 딸을 집에 홀로 두고 외출해 사망에 이르게 한 친 엄마가 경찰에 붙잡혔다. 서울 수서경찰서는 A(29·여)씨를 아동학대치사 혐의로 긴급 체포했다고 2일 밝혔다. A씨는 지난달 30일 오후 3시께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전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딸 B(2)양을 홀로 두고 나갔다가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다음날인 1일 오후 4시께 귀가한 A씨는 B양이 침대에 옆으로 누워 숨을 쉬지 않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병원에 데려갔지만 B양은 결국 사망했다. 담당 의사는 1일 오후 5시27분께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3시간 뒤 오후 8시께 A씨를 자택에서 체포했다. 조사 결과 A씨는 B양에 대한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A씨가 만나러 간 전 남자친구가 B양의 생부는 아닌 것으로 파악됐다. A씨는 경찰 조사에서 “B양의 존재를 엄마와 남동생, 친한 언니에게만 얘기하고 비밀로 해왔다”며 “전 남자친구도 전혀 알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경찰 관계자는 “B양에게 외상 등 상습 폭행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상당히 야위어 있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정확한 사인을 규명하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B양 시신 부검을 의뢰하는 한편 A씨를 상대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다.](5월 2일자 동아일보)
이와 같은 기사는 각 신문사 마다 넘쳐나고 있습니다. 미래의 꿈이어야 하고 부모와 이웃과 나라의 소망이 되어야 할 아이들에게 부모의 무관심과 태만이 얼마나 치명적인 고통과 희생을 주는지 이와 같은 사건을 통해 단적으로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많은 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고급스럽게 키워야 한다는 말도 더욱 아닙니다. 다만 똑바른 가치관과 인격이 형성 될 수 있도록 삶 속에서 모범이 되어주고 신앙관을 바로 심어주라는 말씀입니다. 3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올바른 가치관과 신앙관을 심어주면 아이들은 스스로 소망스럽게 자라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필라델피아에 12살 먹은 쟌이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가정 형편이 어려워 벽돌 공장에서 일을 하며 자라야 하는 불운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이가 비가 내려 교회당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물이 고이고 성도들이 드나들기에 불편하자 새벽 같이 니어커에 벽돌을 실어 와서 깔았습니다. 그는 벽돌공장에서 자신이 받을 임금 일부를 벽돌로 받아 그렇게 길에 깔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본 성도들이 크게 감동을 받아 특별헌금을 하고 길을 포장하고 교회를 수리하였습니다. 이 교회가 필라델피아 베다니교회였고 그 아이가 훗날 백화점의 왕이라 불리운 쟌 와나메이커였습니다. 그는 백화점을 통해 돈을 벌게 되자 30여개의 교회당을 지어주었고 YMCA건물을 전 세계에 20개 이상 지었습니다. 종로에 있는 YMCA건물도 바로 이 사람이 지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는 또한 4년 동안 미국우정국장관으로 재직하였는데 매 주일마다 필라 본교회에 나와서 주일학교를 인도할 만큼 열성적으로 교회를 섬겼던 인물이었습니다. 어릴 때 받은 바른 신앙교육은 이렇게도 소망스런 역사를 이 땅에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의 꿈나무들을 믿음으로 키우고 소망스럽게 자라도록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곧 나라의 기둥이고 교회의 초석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2017년도 어린이주일입니다. 누구나 어린 시절을 지나 왔습니다. 그때 좋은 부모를 만나 좋은 교육과 가치관으로 자라났다면 일생이 행복하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했다면 빚진 마음으로 우리들의 아이들과 교회의 꿈나무들을 바로 키우려는 의지와 가치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이 바로 천국을 상속할 수 있는 바른 믿음의 시금석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올바른 삶이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까지도 아이들을 통해 배워야 할 만큼 불행한 어른들이었습니다. 경험으로 볼 때 어른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자기 생각이 굳어 있고 고집이 세며 끝까지 자신들의 유익만을 챙기는 인간으로 굳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는 가르치는 대로 훈련하는 대로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엄명하셨던 것입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오늘 우리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됩니다. 어린아이들이 살아갈 먼 미래를 오늘 우리들이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신앙이란 이렇게도 진정한 미래를 위해 오늘을 투자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가깝게는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자녀들을 잘 키우고 멀게는 교회와 이웃들의 아이들을 함께 키워가야 할 사명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이와 같은 깊은 시대적 사명으로 신앙생활을 하여 오늘 우리들도 복을 받고 후손들로 소망으로 성장시켜 잘 수 있는 그런 멋들어진 빌립보의 모든 권속들이 되시기를 되기를 좋으신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7년 5월 7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