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18일 주일낮설교 (하나님을 닮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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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18 June 2017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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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닮은 사람
아버지주일
6. 18, 2017
本文:누가복음15:20-24
說敎:崔 仁 根 牧師
미국 아버지날은 6월 세 번째 주일에 지키는데 우리가 사는 워싱턴 주에서부터 시작되어서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첫 아버지날은 스포켄 Sonora Smart Dodd 여사에 의하여 제정되었습니다. 어머니날이 지켜진지 2년 후인 1910년 5월, 교회에서 어머니날 설교를 듣던 그녀는 홀로 6남매를 키우며 고생하신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목사님에게 아버지의 생일인 6월 5일을 아버지 날로 제정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시일이 너무 촉박하다는 이유로 19일을 아버지날로 정했습니다. 전국적으로 아버지날에 대한 지지가 확산되었으나 상업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로 연방의회에서 통과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62년 후인 1972년에야 닉슨 대통령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제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아버지에 대한 자녀들의 존경이나 사랑이 너무나도 부족하고 이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그릇된 자녀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자녀들보다 더 아내들의 남편에 대한 무관심과 무시가 더욱 도를 넘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내들이 모여 앉아 나누는 농담을 들어보면 이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하게 됩니다. ‘남편 덩어리 시리즈’ 유머에 실소를 거두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집에 두면 근심 덩어리, 밖에 데리고 나가면 골치 덩어리, 마주 앉으면 웬수 덩어리, 며느리에게 맡겨 놓으면 구박덩어리, 혼자 내보내면 사고 덩어리.” 심지어 남편들이 나이 들수록 부인에게 어디 갔다 왔느냐 물었다가는 쫓겨나고, 쳐다봤다고 쫓겨나고, 밥 달라 했다고 쫓겨나고, 안 죽고 숨 쉬고 있다고 쫓겨났다는 웃지 못 할 유머까지 유행하고 있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사실 돌아보면 아버지가 되어 있는 남자보다 더 불쌍한 존재도 없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이민 와서 살고 있는 이곳 미국의 한국 아버지들은 더욱 더 불쌍합니다. 한국에서 대학까지 나와 잘 나가다가 미국이 좋다고,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등등의 이유로 미국이 어떤 곳인지도 모른 채 푸르른 무지개 꿈을 안고 왔다가 언어도 통하지 않고 많은 자본도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온 몸으로 노동을 하면서 청춘을 다 보내버린 존재가 바로 우리 아버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자라나는 자녀들을 공부시키느라 허리가 휘고, 또 결혼시키느라 혼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버지들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와 같은 아버지의 외로움과 아픔을 알아주고 위로해 주는 이는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조용히 생각해 보면 우리들이 사랑하고 섬기는 하나님을 많이 닮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를 뛰어 넘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어불성설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함께 공부하면서 아버지를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공경하고 섬기면서 하나님 사랑의 증거로 삼을 수 있는 진정 지혜롭고 복 받은 심령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닮은 사람
무심코 지나버리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조용히 눈을 감고 아버지를 생각해 보면 우리 아버지들이 하나님의 근본 속성을 많이 닮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감히 사람을 두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았다고 표현하기가 두렵기는 하지만 선한 마음으로 그 기본을 생각해 보면 그러한 부분이 없지도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경에는 대충 “아버지”라는 말이 345번 나타나고 “아비”라는 말은 660회 나타나 총 천 번이 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육신의 아버지를 일컫는 곳도 있고 하나님을 일컫는 말도 있습니다. 어쨌든 오늘 우리는 성경 속에 아버지에 대한 말씀이 꽤나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바로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아버지에 대해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아버지도 섬기지 못하면서 하늘의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語不成說(어불성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라는 이 단어가 품고 있는 기본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공부하면서 잊혀져가는 아버지 사랑에 다시 한 번 불을 지피는 소중한 호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는 우리들을 존재케 하신 原因(원인)이십니다
이 땅에 우리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이와 같은 아버지가 안 계시면 우리는 이 땅에 존재할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버지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명이 소중하다면 그 생명을 만들어 주신 아버지가 또한 소중해야 합니다. 자신의 존재는 귀한데 자신을 존재케 하신 아버지를 부인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비인격적인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들을 이 땅에 존재할 수 있도록 아버지를 주신 하나님을 또한 우리들이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아버지는 하나님을 닮은 것입니다. 다 같이 우리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소중한 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아버지를 공경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조용히 묵상해 보면 아버지는 참으로 존귀하신 분이시고 두 아들은 참으로 안타까운 자식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두 아들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아버지의 존재를 존귀하게 여기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결 같이 그들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는 불효자들입니다. 그들은 오로지 상속 받을 자기 몫만 챙기는 자들이요 아버지가 자기들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가만 챙기고 있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밭도 아버지의 것이요 재산도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소중한 자신들의 생명과 건강 또한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아버지의 것을 덤으로 누리고 있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그것으로 인해 아버지께 사례하는 자들은 없었고 오직 자신이 더 못 챙겨서 안달이 난 그릇된 자식들이었습니다. 이는 2천 년이 지난 오늘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부모는 당연히 자기들을 공부시켜 줘야 하고 또한 결혼도 시켜줘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님은 그들에게 교육시키고 결혼시키고 나서 뭐가 되는 것입니까? 빈껍데기만 남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부모님의 노후를 걱정하거나 섬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나 지금이나 그릇된 자식들의 그릇된 사고방식이라는 것이 서글플 뿐입니다.
시애틀에서 3시간 쯤 달려 나가면 워나치나 야끼마에 당도하게 됩니다. 그곳은 방대한 과수원이 널려 있습니다. 어린 과일 나무를 심고 열매를 따기까지 참으로 무섭도록 농부들은 수고와 땀과 재산을 투자합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할까요? 그 과일나무를 통해 더 많은 수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가꾸어 놓았는데 과일나무가 주인 된 농부보고 “이것은 내 열매니 따지 마세요, 내가 직접 판매해서 수입을 얻겠습니다.”고 한다면 그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이 꼭 농부가 과일나무를 키우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평생을 고생하고 키웠으면 그들을 통한 무엇인가 얻는 기쁨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우리 아버지들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자식들이 우리 위해 일생을 고생하셨다면서 모시고 행복하게 섬기고 있는가 말입니다. 새처럼 훌쩍 둥지를 떠나고 나면 빈 집에서 쓸쓸히 늙어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모든 아버지들이 아닌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를 잘 모시고 아버지가 계셨기에 오늘 우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이 땅에 아버지의 날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서두에서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엄마 없이 혼자서 6남매를 묵묵히 키워 오신 아버지를 잊을 수 없어 Dodd라는 여인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목사님께 아버지의 날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여 생긴 날이 바로 아버지의 날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이렇듯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쏟아 바치는 자식들의 도우심의 덩어리입니다. 아버지가 자식들을 위해 무엇인들 망설이고 아끼겠습니까? 하지만 이 땅에 존재하는 자식들이 아버지의 그 사랑과 희생을 기억하고 감격하며 눈물로 보답하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아버지의 날을 통해서 잊었던 자식 된 도리를 다시금 회복하라고 사회도 가르치고 성경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다 컸다고, 많이 배웠다고, 잘났다고 뻐기며 스스로 잘 살아가는 것 같아도 인생이란 그렇게 호락호락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에서 무슨 변수가 나타나게 될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 타코마에서 참으로 끔찍한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35세 된 애기 엄마가 6살 된 아들과 함께 시장을 봐 와서 뒤쪽 트렁크 문을 열고 짐을 내리는 동안에 6살 아들이 자동차의 백기어를 넣어 어머니를 치어죽인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눈 깜빡 할 사이에 일이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엄마는 임신 8개월로 복중에는 새 생명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병원으로 급송하는 구급차 안에서 제왕절개를 하고 아기를 꺼냈으나 아직도 의식불명이라고 하니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는 날 동안 아버지와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약속해 주셨습니다.
(사43:1-3)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고 말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들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과 함께 “내가 너를 조성하였고 내가 너를 창조하였으며 내가 너를 구속하였다.”고 굳이 밝히고 계시는 것일까요? 이는 오늘 우리들의 존재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사인 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연약한 질그릇들입니다. 우리 스스로 험악한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탕자는 끝내 그 아버지의 도우심을 바라고 회개하며 터벅터벅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아들을 어떻게 맞았습니까? 거짓말 같이 환영하고 영접하고 잔치까지 벌여 아들을 맞아 주었습니다.
(눅15:22-24)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우리 아버지는 이러한 분이십니다. 우리들이 가장 어려울 때 가장 가까이서 도우시고 문제를 해결하여주시고 고통과 슬픔이 변하여 기쁨과 즐거움이 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유수의 대학의 학장의 아들과 유수한 재벌인 S그룹의 회장 딸이 결혼을 하였습니다. 모든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흠모하는 그런 멋들어진 결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참으로 모든 사람들이 원하지만 하지 못하는 일들을 그들은 장난처럼 멋들어지게 잘 해냈습니다. 모두가 다 아버지를 잘 만난 덕분이었습니다. 마침내 학위를 따고 귀국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재원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들에게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백방으로 아기를 얻기 위해 양가 부모님과 그들 부부가 노력을 하고 걱정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아기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해 양가 가족들과 친지 친구들을 초대하여 거대한 파티를 열고 마음껏 행복을 누렸습니다. 마침내 해산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설레는 기대와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아이가 태어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뇌성마비였던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는 소설이나 주변에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나 있는 일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두 부부는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부끄럽고 챙피하고 자존심 상하고 앞날이 캄캄해왔던 것입니다. 아내는 밤낮으로 울기만 하였고 남편은 밤낮으로 술만 마셨습니다. 그들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망가지고 흐트러지며 패인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지독하게 자존심 강하고 가문을 중시하였던 둘은 그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하며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거절할 수 없는 어떤 부부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저 평범한 집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해 보이지도 않았고 물론 박사학위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온 가족들이 자기들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나와 인사를 하는데 휠체어에 앉아 머리를 흔드는 자기 집 아이와 똑 같은 뇌성마비 아이가 그 집에 있었던 것입니다. 두 부부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우물쭈물 하고 있는데 그 부부가 쇼의 MC라도 맡은 듯, “우리 집에서 가장 멋진 천사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하자 아이들이 손뼉을 치고 와 하고 소리를 지르며 휠체어에 앉아 있던 아이도 몸을 흔들어 대며 뭐라고 마구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집 벽 곳곳에 그 뇌성마비 아이의 그리 아름답지도 않은 사진들이 넘치게 붙어 있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앨범에 넣어 두어도 그들이 스스로 찾아 볼 수 있지만 이 아이는 스스로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벽에 붙여 두고 언제든지 볼 수 있도록 배려해 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중심으로 다른 세 아이들이 한결 같이 돌보고 웃고 장난치며 행복해 하는 모습에 그 두 부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결국 울음을 터트렸고, “사실은 저희들도 이 아이와 같은 아이가 있답니다.” 하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부부가 조용히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저희들도 이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습니다. 너무나도 놀랐고 당황했고, 어떻게 해야만 할는지 알지를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이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너무나도 감사하며 키우고 있답니다.” 그러자 젊은 부부가 물었습니다. “그럼 하나님을?”, “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이랍니다.” 그들은 그 좋은 집에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의지와 능력을 넘어선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결코 인생은 화려한 스팩과 재산, 박사 학위가 아닌 진솔한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한 평생은 그렇게 단순하거나 녹록치 않습니다. 순간순간 닥치는 삶의 바람을 막아 줄 아버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신적인 그런 것으로 교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묵묵히 지켜 봐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과 도움을 기대해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언제 어떠한 모습으로 찾아올지라도 반갑게 맞아주시고 소를 잡아 잔치를 열어주시는 그런 멋진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아버지는 모든 것을 다 주시며 함께 하십니다
불행하게도 아무리 사랑해 주는 아버지실지라도 결국은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때 아버지는 작은 것 하나라도 다 자식들에게 남겨 주시고 떠납니다. 평생을 통해 모으고 아끼며 보관해 오셨던 그 모든 것들을 다 자식들에게 남겨 두고 달랑 수의 하나 입고 영원히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아버지는 아들에게 분명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눅15: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큰아들은 아버지의 이 속 깊은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오로지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고 불평만 하고 있었습니다.
(눅15:29-30)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고 말입니다. 더욱 불행한 것은 이것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큰아들만의 불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자식들도 똑 같이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에게 해 준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말입니다. 결국 아버지를 이해해 주는 자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돈 밖에 모른다. 아버지는 너무 인색하다. 아버지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불평만 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자식도 아버지가 자신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버지들의 슬픔이요 아픈 가슴인지도 모릅니다.
(말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예배당에 올라와 예배를 드리고 있으나 진정으로 우리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가슴 저미도록 느끼며 예배드리는 성도들은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대부분이 습관적으로 그저 주일이니까 예배는 드리고 있지만 그 사랑을 절절히 깨닫고 감격하는 영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렇듯 아버지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그 사랑 받고 오늘까지 살아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루지애나주에 있는 폰차트랜 호수에서 기선이 한 척 파선된 일이 있었습니다. 아수라장이 되어 가라앉고 있는 그 속에는 여섯 명의 아들을 데리고 탄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용감하고 결단력이 있는 사람으로서 수영을 매우 잘 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이제는 성공을 하던 못 하던 아이들을 하나씩 데리고 헤엄쳐 육지에다 구해내는 수밖에 없다고 작정을 했습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당부하기를 아버지가 육지에 갔다가는 반드시 돌아 올 것이니 겁내지 말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당부 했습니다. 아이들을 하나하나 육지에다 데려다 놓는 아버지의 노력은 필사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섯 아들을 간신히 육지로 옮겨 놓게 되었습니다. 이제 꼭 한 아이만이 가라앉는 배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섯 번째의 아이를 건져다 놓고는 거의 쓰러질듯이 기진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다시 호수로 뛰어 드는 것을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막내 지미가 아직 배에 있습니다. 나는 지미에게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라고 하며 다시 물로 뛰어 들었습니다. 간신히 배에 헤엄쳐간 그 아버지는 지미에게 물로 뛰어 내리라고 하였습니다. 더 이상 기운이 없는 그 아버지는 뛰어내린 아들을 가슴에 꼭 껴안은 채로 함께 물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지쳐 막내를 안고 육지로 나오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는 막내를 혼자 버려 둘 수가 없어 그렇게 희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말로 표현 되지 않는 속 깊은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2017년도 아버지의 날입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아버지는 외롭습니다. 평생을 가족들을 위해 오로지 일만 하다가 지치고 늙은 것이 우리들의 아버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욱 슬픈 것은 그와 같은 아버지의 진정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식들은 아버지에 대한 정과 사랑을 잊은 지 오래고 아내들 또한 원망과 불평으로 남편 곁에서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아버지의 날을 맞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탕자의 비유를 통해 이처럼 참담한 현실을 고발하시고 아버지의 진정한 모습과 사랑이 무엇인가를 똑바로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아버지는 우리들의 생명의 원인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힘닿는 데까지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생명이 끝나는 순간까지 오로지 자식들만 걱정하며 표현하지 못하는 뜨거운 사랑으로 모든 것을 다 자식들에게 남겨 두고 빈손으로 떠나는 분들이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진정한 신자라면, 그래서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섬기는 성도들이라면 눈에 보이는 아버지부터 먼저 섬겨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신앙의 순서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명이 소중한 것임은 알면서도 그 생명을 전수하고 오늘 우리들이 존재하기까지 말로 다할 수 없는 인내와 눈물과 땀으로 키워 오신 아버지의 그 희생과 사랑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진정한 인격자도 아니고 신자도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자이기 이전에 사람이 되어야 하고 사람이기 이전에 자식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쪼록 복된 주일에 아버지 하나님께 예배로 영광을 돌려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효성어린 믿음으로 육신의 아버지와 영의 아버지를 잘 섬기고 자손만대에 축복을 누리시는 그런 신자들로 거듭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7년 6월 18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