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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5일 주일낮설교 (슬픈 뒷모습)

슬픈 뒷모습

6. 25, 2017

本文:마가복음10:17-22

:

타이거 맘이라는 책으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던 예일 대학교 법대교수인 에이미 추아는 그의 남편과 함께 트리플 패케이지/성공의 세 가지 유전자라는 책을 또 내 놓았습니다. 그녀는 이 책에서 자녀들에게 3가지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고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월감, 불안감, 절제력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이 있었기에 세계적으로 성공하는 민족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 그들은 선민이라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하지만 그들은 나라를 잃은 소수민족으로 늘 불안감이 있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부단히 노력하였기에 결국은 성공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농구선수인 마이클 조단도 늘 자신은 세계 최고의 농구선수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밀려 날까봐 늘 불안감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새벽 일찍 일어나서 1,000개 이상씩 슈팅연습을 하였다고 합니다. 현충의 달 6월을 보내면서 또한 그 끔찍한 6.25 67주년을 맞으면서 우리들도 우리들의 자녀들도 이 세상을 정복하고 승리 할 수 있도록 무엇인가 가슴에 새기고 변화를 만들어 내는 귀한 시간을 만들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돌아선 우리들의 뒷모습이 찬란하고 아름다울 수 있도록, 그리고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들의 이름 석 자 만큼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빛날 수 있도록 값진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기에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한 번 뿐인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뒷모습이 슬프고 초라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한 청년의 초라한 모습에 불과한 이 사건을 예수님께서는 친히 성경에 기록하시고 오늘 우리들로 하여금 인생여정의 아름다운 교훈으로 삼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슬픈 뒷모습

사람에게는 그 누구에게나 뒷모습이 있습니다. 사람은 앞으로만 걸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바로 성공한 사람이요 승리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뒷모습이 아름답지 못하게 되면 욕을 먹거나 비난을 받거나 초라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경부고속도로의 어느 휴게실에서 화장실에 갔었는데 깨끗한 하얀 종이에 검은 글자로 타이핑한 예쁜 종이가 남자 소변기 앞에 일일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그대가 떠난 자리는 아름답습니다!”는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결국 지저분하게 화장실을 사용하지 말라는 뜻인데 이렇게 고상한 문구로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그렇게 우리들이 머물고 떠난 자리가 아름다워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교회를 거쳐 간 두 장로의 이야기를 최근 다시 듣게 되었습니다. 목사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 두 사람의 이름 석 자가 나오게 되었고 그들이 머물렀던 직장과 교회에서 그들이 어떠하였던가를 말하는데 괜히 제 얼굴이 뜨끈하였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떠나가기를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그들은 맹비난을 받는 인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인생은 머물다 떠나기 마련인데 그 자리가 아름다워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떠나가는 그 뒷모습은 더욱 더 고상하여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청년은 예의도 바르고 재산도 많았고 거기에다가 영생에 관한 깊은 관심도 있어 친히 예수님을 찾아 나왔는데 불행하게도 그는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면서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가 떠난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슬픈 뒷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왜 그렇게 초라하고 슬픈 뒷모습을 보이고 말았을까요?

결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청년은 참으로 보기 드문 예의바른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그 누구도 예수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고 무엇을 여쭈어 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얼마나 예의가 발랐던지 예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 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 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럴 뿐 아니라 그는 당시 그 누구도 쉽게 가지지 못했던 영생에 관한 깊은 관심을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 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 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실로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보편적으로 볼 수 없는 놀라운 관심이요 아름다운 모습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정도라면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주시던지 그대로 따를 것 같은 예감까지 듭니다. 하지만 그 청년은 의외였습니다. 그토록 예의바르고 영생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친히 예수님을 찾아와 여쭈어 볼 정도였으면 주님께서 주시는 해답에 의심 없이 순종하고 따를 것 같았지만 그 결과는 전혀 예상치 못한 정 반대로 흐르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먼저 말씀 드리자면 그는 결국 슬픈 뒷모습을 보인 채 예수님을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10: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비로소 선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됩니다. 인생은 선택입니다. 성공도 선택입니다. 천국도 선택입니다. 축복도 선택입니다. 이 청년은 재물과 영생을 놓고 예수님 앞에서 재물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청년의 어리석은 불신을 엿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영생을 얻기를 원한다면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오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 청년으로 하여금 가난한 자를 만들어버리고 초라한 가난뱅이로 만들기 위해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과연 이 청년이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재물보다 천국을 더 사모하고 있는가, 모든 것을 다 버리면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채워 주실 것이라 믿느냐 하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영생을 포기하고 재물을 움켜잡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돌아선 그의 뒷모습은 너무나도 초라하고 슬픈 것이었습니다.

(10: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주님께 인생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을 친히 주관하시고 필요를 따라 채워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예수님이라는 엄청난 보배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께서 무엇인들 우리들을 위해 아끼시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두 손에 움켜쥐고 벌벌 떨고 있으니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단도직입적으로 반문하고 있습니다.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라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자 청년은 그 예수님을 버리고 재물을 선택하고 돌아섰으니 그의 마음이 슬플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기쁨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예수님을 선택하여야만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우리 손에 쥐어 주시는 것입니다.

죠나단 에드워드의 갈매기의 꿈이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갈매기가 어느 날 문득 부둣가에서 썩은 물고기 한 마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그것을 물고 하늘 높이 날아오릅니다. 그러자 동료 갈매기 수십 마리가 동시에 날아올라 자신을 추격하기 시작합니다. 그 썩은 물고기를 빼앗기 위해서입니다. 하늘 높이 날라 올라도, 바다 물결 가까이로 내려 와도, 그들은 끊임 없이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하늘 높이 날라 올라 그곳에서 그 썩은 물고기를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수십 마리의 갈매기들이 일제히 그 썩은 물고기를 쫓아 자신을 떠나갔습니다. 혼자서 유유히 푸른 창공을 날던 그 갈매기는 비로소 푸르디푸른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그 하늘은 그 누구도 방해꾼이 없는 자신만의 것이었습니다. 썩은 물고기 하나를 버리고 나니 그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더 넓은 푸른창공이 자신의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친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썩은 물고기를 포기해라 그러면 내가 비교도 할 수 없는 천국을 네게 줄게.”라고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이렇듯 선택입니다. 썩은 것을 포기하고 신선한 것으로 회복 받을 수 있도록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부자 청년을 늘 가슴에 교훈으로 품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재물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 초라하고 슬픈 뒷모습을 남긴 것은 끝내 자신의 재물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생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나왔던 그 청년에게 우리 주님은 너무나도 가혹한 주문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라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라는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과연 오늘날 진짜로 이렇게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만 구원 받을 수 있다면 천국은 아마도 텅텅 비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위인이 우리들 가운데서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의 핵심은 이웃 사랑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영생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온 이 청년에게 십계명의 후반부를 다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10: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와 같은 십계명의 후반부는 이웃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너무나도 당당하게 이와 같은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선언하였습니다.

(10:20)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청년의 고백이 진실인가 여부를 시험해 보신 것입니다. “네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는 결국 예수님을 포기하고 돌아서고 만 것입니다. 그의 신앙고백은 엉터리였던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과연 어떻습니까? 입술로 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신앙생활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 송오형, 고상철집사님이 희승이 준수 재천이를 데리고 파킹장 맨홀공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준수가 집사님들을 대접하며 저녁식사를 제공하였다는 미담을 들었습니다. 교회 일을 하였으면 교회가 대접을 해야 하고 그것도 아니면 청년들을 불러 일을 시킨 집사님들이 대접을 해야 마땅하겠으나 청년이 오히려 집사님들과 동료들을 대접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제대로 되어 가는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여겨져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주 사소한 것 같지만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하고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재물을 사용할 줄 모르는 인색함은 이처럼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되고 초라한 뒷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재물을 모아 놓고 위로를 받고 더 나아가서는 그것으로 교만하며 잘난 척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면 그 재물은 오히려 자신에게 화가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8:11-19)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경고의 말씀을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재물은 없어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많아서 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약시대에 예수님께서도 친히 경고하신 말씀과 일치합니다.

(12:16-21)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생활 속에서 실천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일 법대 에이미 추아 교수는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월감을 가지는 대신 불안감을 가져야 하고 또한 절제할 수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밸런스인 것입니다. 배도 비행기도 밸런스가 무너지면 침몰하거나 추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하나님과 이웃들에게 나눌 줄 아는 부와 사랑의 밸런스를 맞출 줄 아는 것이 인격이요 신앙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부자 청년은 불행하게도 이처럼 너무나도 평범한 밸런스의 지혜를 얻지 못해 모든 재물이 자신의 것인 줄 알고 포기하지 못했다가 슬픈 뒷모습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나의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신앙고백입니다.

오래 전 미국에서 인기리에 상영된 걸작 희극 영화인 [O! God]가 있었습니다. 이 작가는 이 작품에서 하나님께서 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그들에게 옷을 입히지 않으셨는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옷을 입혀 주었다면 그들은 즉시 그 옷에 호주머니를 달아 달라고 졸랐을 것이고 호주머니를 달아주면 거기에다가 돈을 채워달라고 하였을 것이며 그렇게 돈을 채워주면 그 순간 하나님을 떠나고 죄악의 길로 달려 갈 것을 아셨기 때문에 결국 옷을 입히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오죽 오늘 우리 인생들의 욕심과 개인주의가 팽배하였으면 이렇게까지 해석을 하였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깊은 깨달음을 가져야 합니다. 결국 이 세상을 떠나갈 땐 빈손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삼성에 돈이 없어서 이건희 회장 하나 살려내지 못하고 저렇게 식물인간처럼 남겨 두었겠습니까? 스티브 잡스가 돈이 없어 56세의 꽃 같은 나이에 애플이라는 거대 기업을 남겨 두고 이 세상을 떠나갔겠습니까? 돈보다 더 귀한 것이 신앙이고 그 신앙의 주인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부자 청년처럼 그 돈 때문에 예수님께 슬픈 뒷모습을 보여드리지 않도록 오늘 말씀이 커다란 도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메리 스토더드 미국 프린스턴대 생태학 및 진화생물학부 교수팀은 조류의 알이 타원형인 이유는 비행 능력 발달에 따른 신체 변화 때문이라는 연구를 사이언스 622일자에 발표했습니다. 에너지 효율 면에선 알이 구형인 것이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질량이 같다면 구형이 다른 어떤 형태보다 부피가 작습니다. 즉 알의 내용물인 노른자와 흰자 양이 같다면 동그란 알이 타원형 알보다 크기가 작아 더 쉽게 낳을 수 있습니다. 표면적도 작아 암컷이 알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도 덜 쓸 수 있습니다. 알껍데기의 주성분은 탄산칼슘인데, 암컷은 알을 만들기 위해 자기 뼈의 칼슘을 씁니다. 닭이 알 1개 분량의 껍질을 만들려면 몸 전체 칼슘의 10%가 필요합니다. 구형 알은 어느 정도 외부 충격을 받아도 알이 구르면서 충격을 흡수해 깨질 위험도 줄어듭니다. 이렇듯 말 못하는 닭들도 인류를 위해 알을 만들고 그 알을 위해 자신의 몸의 칼슘을 뼈에서 빼내서 그것도 알 하나에 10%나 쓴다는 사실에 그저 감동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들도 이제는 무엇인가 주면서 나누는 복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부자 청년은 결국 예수님을 포기하고 그 소중한 재물을 선택한 채 슬프고도 초라한 뒷모습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닌지? 겸손히 우리들의 현실을 재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돈 때문에 부모형제와 등을 돌리고 돈 때문에 우정도 애정도 버리는 이 시대에 우리들인들 이 청년과 같이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낯설고 물설흔 이 미국 땅에서 그 누구의 도움도 기대하지 못한 채 그렇게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것 없으면 굻어야 하고 아파트에서 쫓겨나야만 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그 돈 때문에 예배도 빠지고 말씀도 뒤로 한 채 그렇게 적당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청년이 재물을 선택하고 결국 주님을 떠났지만 그 청년이나 그 청년이 선택했던 재물은 이 땅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놀라운 진리 하나를 남겨 두셨습니다.

(24:35)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13:31)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21:3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공관복음인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똑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때가 지나면 사라지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무리 움켜잡아도 세월 속에서 다 사라지고 마는 것이 우리들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들의 삶이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존재해야 하고 이루어져야 함을 깊이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102:19-27)

여호와께서 그 높은 성소에서 하감하시며 하늘에서 땅을 감찰하셨으니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케 하려 하심이라 때에 민족들과 나라들이 모여 여호와를 섬기리로다 저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케 하시며 내 날을 단촉케 하셨도다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

고 말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깨달음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부자 청년과 같이 세상의 소중한 것 때문에 우리들의 생명 줄을 쥐고 계시는 하나님을 포기하거나 떠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것을 가장 극명하게 깨달았던 사람이 바로 성군 다윗이었습니다. 그는 왕이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고 그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모든 것들을 다 갖다 바쳤던 인물이었습니다. 단순하게 바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바칠 수 있었던 것 그 자체를 하나님의 축복이었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대상29:3-5)

성전을 위하여 예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에 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므로 나의 사유의 금은으로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드렸노니 곧 오빌의 금 삼천 달란트와 천은 칠천 달란트라 모든 전 벽에 입히며 금 은그릇을 만들며 공장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쓰게 하였노니 오늘날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

3천 달란트와 은 7천 달란트를 오늘 미국의 단위인 온스로 한산하면 금 360만 온스와 은 840만 온스입니다. 그리고 금 1온수는 대략 1500불정도 합니다. 그렇게 보면 다윗은 엄청난 재물을 하나님께 바쳐드린 것입니다. 그 옛날, 그 당시에 다윗은 이렇게도 엄청난 예물을 하나님께 갖다 바쳤던 것입니다. 과연 다윗은 대단한 하나님의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오히려 이렇게 하나님께 바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대상29:10-14)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가로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이것이 바로 성군 다윗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자신이 왕이 된 것과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었던 것과 그것을 다시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음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었다는 하나님 절대주권 신앙이 바로 다윗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와 같은 다윗을 통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탄생하시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몸으로 마음으로 예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림으로 생애의 최고가 하나님이심을 입증하는 그런 신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인생과 재물은 유한하나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우리 자손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6.25 67주년 겸 현충의 달 마지막 주일입니다. 살같이 빠르게 세월이 지나고 있어 어느 덧 2017년도도 절반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소중한 세월을 낭비하며 소중한 재물을 낭비하며 그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소중한 생명을 흘러 보내고 있습니까? 우리들이 떠난 자리가 아름다워야 하며 우리들의 뒷모습이 또한 행복하게 보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그렇게 살아가라고 예수님께서는 친히 한 사건을 성경에 기록하시고 오늘 우리들에게 도전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청년의 때에 재산이 많아 부자소리를 듣는다면 참으로 복 받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청년은 결코 아름다운 뒷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지를 못했습니다. 슬픔을 띄고 돌아선 그의 모습은 차라리 초라하고 불쌍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앞에서 바른 선택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요,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한번 뿐인 소중한 생명을 주님 위해 바치고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배워야 할 교훈은 이 청년이 살아간 삶을 반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세상과 재물을 선택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재물을 값지게 사용하고 빈손으로 떠날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면 결국 하나님 앞에 서야 할 것이므로 그 하나님을 우리들의 삶의 주인으로 모셔야 하겠습니다. 가장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이와 같은 결단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초라한 뒷모습을 남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영원히 이 땅에서 살 수가 없는 유한환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늘 떠날 준비를 하고 떠나서 가야 할 곳을 또한 준비해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기왕에 하는 신앙생활과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 되고 축복과 소망이 가득한 그런 진실한 행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귀한 날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예배자로 우뚝 선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풍성한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7625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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