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23일 주일낮설교 (하늘에 기록된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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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23 July 2017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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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기록된 이름
7. 23, 2017
本文:누가복음10:17-20
說敎:崔 仁 根 牧師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들의 물결을 보면 신비감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 중에 단 하나도 같은 색깔 같은 모델 같은 모양의 자동차를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자동차들은 저마다 자신의 출신회사와 이름을 꽁무니에 붙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거기에 기록된 이름이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차는 비록 새 차이지만 그리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들이 있고 또 어떤 것들은 비록 낡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자동차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브랜드(Brand)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들도 저마다 다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는 순간 이름이 붙여지고 그 이름은 죽는 날까지도 고유하게 가지고 다니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 이름이 이 땅에서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도 사용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녹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밝히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들의 이름이 하나님 앞에 펼쳐져 있는 생명록에 기록되어 있어야만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의 이름은 참으로 소중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당에 새워진 자동차의 이름을 보면 그 자동차가 어떤 회사의 어떤 수준의 자동차인지 우리들이 밝히 알 수 있듯이 우리들의 이름 또한 들어보면 그 사람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어떤 지식과 경제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인지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한 교회에서 34년을 섬기다 보니 더 더욱 잘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우리들의 이름값이 헛되지 않도록 바로 사는 훈련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옳지 못한 이름을 바꾸어 주시기도 하셨고 그 이름값을 못할 때는 책망도 하셨던 것입니다. 수련의 달 7월의 네 번째 주일인 오늘은 우리들의 이름에 관한 말씀으로 도전을 받고 우리들의 이름 석 자가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길이 빛날 수 있도록 새로운 변화와 결단을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롤 모델로 세워주신 귀한 인물들을 구약에서 한 분, 신약에서 또 한 분을 찾아보면서 오늘 말씀을 엮어 보려고 합니다. 마음 귀를 열고 우리들의 삶에 복된 모델로 삼을 수 있도록 말씀에 귀를 귀울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쪼록 듣고 풍성한 은혜를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기록된 이름
이 땅에서 그 어디를 가든지 우리들의 이름 석 자는 쓰여지고 또한 불리워지고 사용되어 집니다. 하지만 이름이 필요 없고 또한 불러주지도 않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감옥입니다. 그곳에서는 가슴에 붙은 번호표가 그 사람을 대신해 줍니다. 결코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서로 알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과 부모님께서 주신 이름을 더럽히고 들어가 있는 곳이 감옥이기에 그곳에서는 이름이 더렵혀지지 않도록 사용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이름에 걸맞도록 이름값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이 우리들에게 항복하는 것보다 더 우리 이름이 하늘나라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녹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에 걸 맞는 삶을 살지 못할 때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 이름을 바꾸어 주시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그렇게 아름답지 못한 이름으로 천국에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뜻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 이름을 바꾸어 주셨을 것입니다. 천국에 합당한 이름이 되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그와 같은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오늘 우리들은 과연 어떠한지 도전과 변화를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야곱과 이스라엘
우리는 이삭의 아들 야곱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눈이 어두운 아버지의 약점을 이용하여 그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형이 받아야 할 축복을 대신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를 알아차린 형 에서가 분노하여 그를 잡아 죽이려고 하자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형제를 떠나 머나먼 타향 하란으로 도망가서 오랜 세월 동안 종살이를 하여야만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곳에서도 그는 외삼촌을 속이고 재산을 가로채고 야반도주 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고향에서 기다리는 형 에서를 두려워하여 얍복강가에 엎드려 기도하며 새롭게 변화를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발뒤꿈치를 잡음, 사기꾼, 거짓말쟁이”라는 뜻의 이름 야곱을 버리고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로 새로운 이름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역사로 새로운 이름을 가졌던 그는 그의 이름에 걸 맞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디를 가든 남을 속이고 또한 자신도 속임을 당하는 그런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과 인류에 길이 남는 그런 새로운 변화의 삶으로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와 같은 놀라운 변화는 평탄하고 행복했던 삶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리려 삶의 가장 무서운 위기를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든지 그는 그 위기를 넘어보려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를 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창32:9-11)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일생일대의 최악의 위기를 만난 그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 엎드러진 작은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본 받고 배워야 할 삶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 누구나 약점이 있고 잘못이 있고 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풀어 가는가에 따라 성공자도 될 수 있고 또한 실패자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야곱을 통해 하나의 삶의 성공적인 진리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삶의 위기에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바로 그 길입니다. 이제 야곱은 홀몸이 아니었습니다. 형 에서가 죽이려 하자 하란으로 도망을 갔드랬습니다. 그 때는 홀몸이었기에 아주 간단하고 쉬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넷이요 자식들이 13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평생 이루어 놓은 재산인 소떼와 양떼가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그런데 형 에서가 여전히 살기가 등등하여 자신을 추격해 온다면 이것은 보통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면초가에 빠진 그는 사람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방도를 다 취하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기도에 몰입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넘길 수 없는 오늘 우리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바른 신앙자세입니다. 오늘날 기도만 하면 다 된다는 기도만능주의에 빠져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기본도 하지 않는 그릇된 신앙인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하되 사람이 해야 하는 방도를 다 찾아 최선을 다 했던 것입니다.
(창32:13-25)
야곱이 거기서 경야하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암염소가 이백이요 수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수양이 이십이요 젖나는 약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나귀가 열이라 그것을 각각 떼로 나눠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 종들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상거가 뜨게 하라 하고 그가 또 앞선 자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엣것은 뉘 것이냐 하거든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고하고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의 생각에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으리라 함이었더라 그 예물은 그의 앞서 행하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경야하다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압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야곱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유익을 위해 남의 것을 탐하고 빼앗고 누리며 그것이 이 땅에서 가장 잘 사는 것일 줄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올무가 되어 우리들의 발목이 잡히고 그래서 고통당하고 근심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몰라 또 다른 올무에 빠지고 고통과 슬픔 속에서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현명하게 문제를 똑바로 인식하고 해결책을 찾았으니 그것이 바로 인간의 방도와 기도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배워야 할 가장 바람직한 문제 해결의 방법을 오늘 야곱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먼저 다 하고 그 다음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기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야곱은 기적 같은 놀라운 축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로소 사기꾼이라는 이름 야곱을 던져버리고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도 두려워했던 형 에서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친히 녹여 잔잔한 호수와 같이 만들어 주셨고 더 이상 위험하고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 함께 하고 위로하며 도와주는 혈족으로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도 두려워하고 무서워했던 형 에서가 얼싸 안고 포옹하며 사랑으로 화답하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창33:4)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 맞추고 피차 우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우리들의 삶에도 이처럼 두려움이 사라지고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과 축복과 기쁨이 가득한 변화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그 길은 오직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야곱과 같이 기도로 하나님을 만나고 응답을 받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 인생 여정의 안식이요 축복이요 기적을 만들어 내는 최고의 능력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시몬과 베드로
우리는 시몬 베드로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 또한 이름을 개명 받은 특별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원래 시몬이었고 그의 직업은 물고기를 잡는 어부였습니다.
(마4: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시몬이라는 이름은 가장 평범하여 유대인 사회에서 가장 많이 지어준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당대에는 이와 같은 시몬이라는 이름으로는 누가누구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많은 시몬과 구별하시기 위해 “바요나 시몬”이라고 불러주셨던 것입니다.
(마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그의 아버지 요나의 이름과 합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렇게라도 구별하지 않으면 어떤 시몬인지 알 수가 없을 만큼 흔한 이름이 바로 시몬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평범했던 그가 비범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제자로 부르신 까닭이요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가장 정확하게 고백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신 까닭이었습니다.
(마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는 이 고백 하나로 일생일대의 획기적인 인물로 제 등장하게 됩니다.
(마16:17-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나도 평범하여 누가 누구인지 구별조차 되지 않았던 그의 이름을 베드로라고 고쳐주셨습니다. 이 베드로라는 이름의 뜻은 “반석”입니다.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반석과 같은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반석이라는 이름으로 고쳐주신 베드로의 터 위에 최초의 교회를 세워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쥐어 주셨습니다. 오늘날 천주교에서는 이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여 베드로만이 천국 열쇠를 쥐고 있다고 믿어 어디를 가든지 대성당을 짓고 그 이름을 베드로 성당이라고 이름 지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반석이라는 이름의 베드로는 그 자체로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반석처럼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는 이름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놀라운 하나님의 뜻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난 7월 4일은 미국이 독립된 지 241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독립기념의 날에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곳이 바로 사우스 타고다의 럿쉬모아 산이라고 합니다. 그곳에는 60피트 높이의 화강암에 조각된 워싱턴, 제퍼슨, 루주벨트, 링컨 대통령의 얼굴이 있는 곳입니다. 세계적인 조각가 보그럼이 1927년 착공하여 14년 동안 조각한 걸작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작업이 너무 느리다고 불평을 쏟아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이 대작을 완성하고 몇 달 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만큼 그는 이 걸작에 그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었던 것입니다. 그가 죽기 전에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적어도 10만년까지는 사람들이 저 위인들을 바라보며 배울 것입니다. 아울러 내 이름도 저기에 함께 있을 건데 14년이라는 세월은 그렇게 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작품 하나를 만들어 내면서 최소한 10만년을 내다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14년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의 모든 것을 그 작품 하나에 쏟아 부었던 것입니다. 과연 오늘 우리는 우리들의 이름 석 자를 무엇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남겨 두시겠습니까? 오로지 육신적인 그것만을 위해서 우리들의 소중한 이름을 투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고 또한 천금보다 귀한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친히 이름까지 바꾸어가며 구별해 주었던 베드로는 과연 어떻게 그 이름을 유지해 나갔습니까? 불행하게도 그는 육신적인 연약함에 빠져 그만이야 반석으로서의 삶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부르심을 받지 않았던 원점으로 되돌아 가 물고기나 잡으며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마26:69-74)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 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요21:1-3)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육신을 지닌 우리 인생들의 한계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처럼 육신적인 연약함으로 인해 수도 없이 예수님을 떠나고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리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그러한 우리들을 찾아오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옛 사람으로 되돌아간 우리들을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요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라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무엇입니까? 지금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무엇이라고 부르십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 이름은 주님께서 친히 버리시고 새롭게 베드로라고 지어주신 이름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야” 하고 부르시지 않고 “시몬아” 라고 부르시는 것입니까? 불행하게도 그가 반석이요 교회의 기초가 된 베드로의 삶을 살지 못하고 그 옛날 물고기나 잡아먹고 살던 육신의 삶을 사는 시몬으로 되돌아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랬습니다. 그는 불행하게도 그 아름다운 베드로의 삶을 살지 못했던 것입니다. 물고기나 잡는 시몬으로 돌아 가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육신으로도 실패하고 영적으로도 실패한 초라한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요21: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그는 단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평생 어부로서 물고기를 잡고 살았던 그가 어떻게 밤새도록 단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기를 못했을까요? 우리는 여기에서 깊은 깨달음을 가져야 합니다. 육신적인 삶일지라도 내 능력과 재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물고기 한 마리라도 하나님께서 주셔야 우리들이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쫓아 사는 거룩한 베드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수련의 달 7월이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흐르는 시간 앞에서 우리들도 어느 날엔가 이 세상을 떠나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할 텐데 우리 이름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럭저럭 이 세상에서 시간만 보내고 오라고 우리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본질은 야곱이나 시몬과 진배없는 이 세상의 가치대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이 세상에서 부르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지금 야곱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시몬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되었던 지난날은 하나님께서 상관하지 않으시니 이스라엘과 베드로로 거듭나 남은 삶만큼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변화된 역사를 만들어 내야 하겠습니다. 늦어도 깨닫는 사람은 복을 누리게 되나 고집스럽게 변화를 만들어 내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게 되면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기에 야곱과 같은 두려움을 안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야 하겠습니다. 야곱과 이스라엘도 시몬과 베드로도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조금만 더 지나고 나면 우리들도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떠나고 난 자리에 우리들의 이름 석 자는 과연 어떤 형태로 남아 있게 될는지? 깊이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복을 받아 예배자로 부르심을 입고 성전에 나아와 있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이스라엘과 베드로와 같은 변화와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7년 7월 23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