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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7년 10월 1일 주일낮설교 (쓰임 받은 사람)

2017년 10월 1일 주일낮설교 (쓰임 받은 사람)

쓰임 받은 사람

10. 1, 2017

本文:사도행전3:1-10

:

교회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런 만큼 그들의 신앙생활의 모습이나 하나님께 헌신하고 충성하는 양태 또한 다양합니다. 오랜 세월 교회에서 성도들을 인도하고 양육하다 보면 그 중에서도 값지게 쓰임 받는 사람들이 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값지게 쓰임 받는 사람처럼 귀한 사람도 없다는 것 또한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고 쓰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사도 베드로입니다. 그는 우리들이 객관적으로 볼 때 그렇게 빼어난 인물이나 훌륭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평범하게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나 잡으며 살아갔던 어부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도 그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일으키며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 주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보시는 면전에서 그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고 돌아선 인물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과연 저런 사람도 예수님의 제자요 사도가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까지 갖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늘 본문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불쌍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앞서 2장에서는 단숨에 3천명의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엄청난 기적의 역사를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2:40-41)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께 붙잡혀 쓰임 받는 사람은 그 얼마나 멋들어진 존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있으나 마나 한 그런 인물이 되지 말고 베드로와 같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쓰임 받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생각할 때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한 채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나 잡으며 일생을 보냈다면 지급보다 훨씬 더 초라한 인생을 마쳤을 것임을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 값진 헌신과 쓰임을 받았기에 그가 떠난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이 땅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믿음의 대상으로 우뚝 서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짧은 인생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 분명한 해답을 오늘 말씀 속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쓰임 받은 사람

그 누가 뭐래도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쓰임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8장 가운데 12장이 베드로의 행적에 관해 기록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사도 베드로가 얼마나 어떻게 쓰임을 받았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처럼 하나님의 쓰임 받은 베드로에 관해서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사도 베드로는 오늘 우리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어부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는 그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그릇이 되어 평생을 그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쓰임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서 그의 쓰임 받은 삶이 그의 인생에 그 얼마나 복되고 귀한 일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잘 배우고 익혀서 쓰임 받는 남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풍성한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베드로는 소중한 것을 버렸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베드로는 일개 어부에 불과하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어부라면 그렇게 뛰어난 지식층도 부유층도 아닙니다. 그저 바다에서 물고기나 잡아 생계를 유지해 가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으며 그 위대한 사도 베드로가 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베드로를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는 해답이 됩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 해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실 때에 그가 온전히 그 부르심에 순종하였고 자신의 평범하던 삶을 포기하였기 때문입니다.

(5:10-11)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이 단순한 한 말씀을 거룩한 부담을 가지고 받아야만 합니다. 이는 그 누구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결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평생을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해 오던 사람이 한 순간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아가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렇게 했습니다. 가족들의 생계를 엄려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미래를 계산해 보지 아니하고 그는 무조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고 그렇게도 소중하던 배와 그물을 버려둔 채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과연 오늘 우리들이라면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여기에서부터 성경 속에 기록된 그 유명한 베드로와 오늘 우리들이 비교가 되는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더 그 때의 상황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5: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분명한 한 단어를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버려두고...”라는 말씀입니다.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렸습니다. 평생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살아가던 사람에게 배와 그물은 생명과도 같이 소중한 것들인데 베드로는 바로 그것들을 다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에게 그보다 훨씬 더 귀한 것으로 보상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만나고 있는 베드로인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뿐만 아니라 베드로처럼 소중하게 쓰임을 받았던 귀한 종들에게 동일하게 나타나는 공통분모입니다. 사도 바울도 베드로와 똑 같이 그에게 가장 소중하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과연 사도 바울은 주 예수님을 얻기 위해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쓰임을 받기 위해 그는 엄청난 것들을 다 버렸습니다.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정통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쫓아 완벽하게 살와 왔던 지난 과거, 가말리엘 문하에서 최고의 학부로 공부하였던 모든 지식들, 엄청난 돈을 주고도 살 수 없었던 당대 로마의 시민권 등 그는 스스로도 자랑할 만 하였고 소중하였던 그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쫓아갔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진정으로 예수님의 쓰임을 받고 우리들의 삶의 흔적들이 하나님과 후대에 값지게 남아 있기를 원한다면 베드로와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님을 위해 우리들의 소중한 그 무엇을 버리고 포기할 줄 아는 결단과 순종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도 우리는 때때로 자존심도 버리고 사사로운 욕심도 버리고 심지어는 건강까지도 버리면서 거기에 올인 하며 수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의 상급과 후손들의 축복을 위해 이 땅에서 조금은 손해를 보고 포기를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값진 희생과 헌신이 없는 축복과 미래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베드로와 사도 바울을 통해 이와 같은 쓰임 받음의 기본부터 배울 수 있는 풍성한 은혜가 우리 가운데 넘쳐나기를 소망합니다.

 

한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미담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가난한 어느 목사님이 지하에다 스페이스를 얻어 개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엄청난 담배꽁초와 침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습니다. 도대체 누가 남의 교회 입구를 이렇게도 더럽혀 놓을 수가 있을까? 하고 숨어서 지켜보았더니 그 근처에 있는 학교의 학생들이 몰려와 그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달려 나가 호통을 칠까 하다가 순간 성령님이 주시는 지혜를 얻어 오히려 그 반대로 하였습니다. 깨끗이 계단을 청소하고 더러운 침을 닦아낸 다음 그곳에다 깨끗한 쓰레기통과 휴지를 남겨 두고 귤 한 박스와 쪽지까지 두었습니다. “환영합니다. 여기도 우리교회이니 우리 교회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담 없이 편히 쉬고 가시기 바랍니다. 이 귤도 여러분의 것이니 나누어 드시고 남으면 가지고 가서 친구들에게도 나누어 주십시오.” 그렇게 목사님은 매일 같이 과일과 사탕 등을 갖다 두고 쪽지도 바꾸어 가며 정성스럽게 남겨 두었습니다.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지요? 시험 잘 보세요! 고생 끝에 낙!... 오늘 무척 춥죠? 교회 문 열어 두었으니 커피나 컵라면도 개스레인지를 사용해서 마음껏 드세요...” 그런데 그와 같은 불량 학생들로부터 놀라운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목사님 너무 감사, 목사님 짱, 열심히 공부할게요...” 등 그들은 조금씩 변화 되어 갔습니다. 그렇게 더럽고 지저분하던 계단은 깨끗하게 변해갔고 점차 그들과 목사님은 친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에 그들은 교회에도 출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헌금을 무려 18억 원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가난하고 사람도 없는 개척교회를 어떻게든 돕자고 의기투합한 그들은 가진 것이 없으므로 십시일반 돈을 모아 복권을 쌌는데 그것이 당첨이 된 것입니다. 그것을 그들은 그대로 목사님께 헌금하며 갖다 드렸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지난해인 2016107일자 한국 기독일보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주면 받고 포기하면 다시 얻게 되는 하나님의 진리가 바로 그곳에서 이루어 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만들어 놓았던 기적과 같은 놀라운 인생 역사였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베드로는 특별한 능력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은 베드로행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베드로의 놀라운 행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과연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나 잡으며 살았던 어부가 맞는가, 할 정도로 베드로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기적을 만들어 놓은 위대한 사도로 거듭나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두려워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갔던 그런 초라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 앞에 나서서 외쳤습니다.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은 다시 살아 나셨다.”고 말입니다. 이는 바로 너희들은 살인마야!” 라고 외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도 달라질 수가 있을까요? 그들이 무서워 예수님께서 친히 두 눈으로 보고 계시는 면전에서 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고 도망갔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도 당당하게 살인마들을 앞에 두고 너희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인 살인마야!” 라고 외칠 수가 있단 말입니까?

(2:22-24)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과연 그 어디에서 베드로에게 이렇게도 놀라운 능력이 나타날 수 있었을까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들을 더욱 놀라게 만들고 있습니다.

(3:6-10)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는 말씀처럼 베드로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자를 단숨에 고쳐 뛰고 달리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적이 어떻게 하다가 우연히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죽은 자도 거뜬히 다시 살려 냈기 때문입니다.

(9:36-42)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 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정도면 베드로가 만들어 가는 기적이 결코 우연한 일회성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 능력의 주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성령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주신 권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단 한 번의 설교로 3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기적을 만들어 내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무엇이 베드로로 하여금 이토록 넘치는 능력을 나타나게 하였을까요?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생명과도 같은 배와 그물을 과감하게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에게 그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권능을 주시고 주님의 사명을 힘 있게 감당해 갈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공짜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더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처럼 능력 있는 제자가 되어 끝까지 예수님을 섬기기를 원한다면 베드로와 같이 과감하게 버리고 엄청난 능력을 되돌려 받는 결단 있는 신앙생활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오늘 우리들도 베드로와 같이 쓰임 받는 일꾼들로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베드로를 위해 하나님은 대적들을 제거해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2절에 가면 헤롯이라는 인물이 등장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인간은 헤롯 아그립바 I세로서 잔인하기 이를 데 없어 예수님의 제자들을 해치고 죽이는 것을 당연할 일로 여겼습니다. 그는 예수님 때부터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 하여 예수님께서 태어나자 말자 애굽으로 피신하여 가 있어야 할 만큼 잔인했던 헤롯의 손자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그는 이미도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의 하나인 야고보를 칼로 잔인하게 죽였던 그런 악한 인물이었습니다.

(12:1-2)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를 맹종하던 유대인들이 헤롯이 이처럼 야고보를 처형하자 그것을 기뻐하며 헤롯을 부추겼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헤롯은 이번에는 베드로를 잡아 죽이려고 시도하였습니다.

(12: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 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베드로도 잡혀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야고보와 똑 같이 처형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베드로를 보호하시고 살려내셨습니다.

(12:3-12)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 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대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 새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렇게도 불가사의한 기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천사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 베드로 자신도 미쳐 그것이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자신을 감옥에서 이끌어내심인 줄 알지 못했을 정도로 이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도 베드로를 위하여 특별하게 역사하시니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기적을 사실 베드로를 통하여서만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통하여서 보았었고 사자 굴에서 살아 나온 다니엘을 통하여서도 경험하였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언제라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성경은 이와 같은 실제적인 사건을 통하여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16장에서도 우리는 거의 유사한 사건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사도 바울의 체험이었습니다. 그 때도 사도 바울은 점하는 여자에게 씌워져 있던 귀신을 쫓아내주고 감옥에까지 가는 봉변을 당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이 갇힌 감옥의 문을 다 열어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감옥에서 나올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나오지 않고 오히려 죄수들이 다 도망한 줄 알고 자살하려던 간수를 구원하여 주는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내어 오늘 우리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원하기만 하시면 언제든지 쓰시는 종들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들은 담대하게 그와 같은 하나님을 믿고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지난 주일에 성군 다윗을 통해 배운바와 같이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자들을 친히 보호하시고 지키신다는 사실을 믿고 기쁨으로 주님의 일에 쓰임 받는 일꾼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결실의 달 10월 초하루, 우리들의 인생에도 이처럼 풍성한 자연과 같은 결실하는 계절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사로운 자신의 모든 삶을 다 내려놓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쓰임 받는 일꾼으로 거듭난 때부터 자신의 능력을 초월하는 기적 같은 인생을 살아갔습니다. 실로 훗날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을 때보다 비교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은총을 받아 분에 넘치는 기적을 만들어 냈고 그의 삶 또한 기적으로 보호를 받는 놀라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쓰임 받는 일꾼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요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주어진 한 평생을 살고 이 세상을 떠납니다. 우리들이 오늘 객관적으로 베드로를 보아도 그는 갈릴리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갔던 그 삶보다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예수님을 위해 쓰임 받으며 살아갔던 뒷날의 삶이 훨씬 더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삶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오늘날 베드로와 같이 그물과 배만 있으면 먹고 살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오로지 그 배만 붙들고 그물만 기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놓아버리고 포기해버릴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축복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베드로와 같이 과감하게 배와 그물을 버릴 수 있는 용기를 만들어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선택하는 새로운 인생을 출발해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망하는 것 같아도 베드로와 같이 세월이 지난 후에는 그 길을 선택하기를 너무나도 잘 했다고 자찬하며 노래할 수 있는 그 날이 반드시 찾아 올 것입니다. 모쪼록 오늘 10월 첫 주일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이와 같은 놀라운 축복으로 거듭나게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주후 2017101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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