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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5일 주일낮설교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긍휼

11. 5, 2017

本文:로마서9:14-18

: 牧師

49-19=49, 36-10=36... 이렇게 대답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가르쳐도 이와 같은 답을 고집하는 통에 학교에서 조차 가르치기를 포기하였습니다. 그러자 할 수 없이 그의 아버지가 나서서 왜 이렇게 대답하는지 그 이유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는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빼기라는 것은 없어진다는 뜻이잖아요. 49에서 19를 빼면 19는 없어지니까 답은 49잖아요.” 라고 말입니다. 이 아이는 숫자보다는 빼기라는 개념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참으로 오묘한 의미를 알고 있구나. 하지만 빼기는 계산을 위해 사람들이 만든 약속이란다. 네 생각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사람들의 약속을 너도 지키도록 하려무나.” 자신의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아이는 사람들의 약속을 믿고 습득하기를 시작하였고 아주 놀라운 속도로 수학의 원리들을 익혀나갔습니다. 그가 바로 12살 때부터 논리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는 천재학자 쟌 스튜어트 밀입니다.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과 인내와 설득으로 그는 인류에 몇 안 되는 위대한 대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원래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죄인들이었고 하나님을 배신하고 공중 권세를 잡은 자를 따르며 영원히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야만 마땅한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2:1-3)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가와 주시고 불러주시고 죄를 대신 해결하여 주시고 구원하시어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이라고 부릅니다. 죽을 수밖에 없어 감히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오지도 못하고 아예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던 우리들을 하나님은 괜찮다고 격려해 주시고 두려워 말라고 용기를 주시며 거역할 수 없는 따뜻한 사랑으로 오늘까지 우리 곁에 머물러 주시며 각양 소중한 축복으로 인도해 주셨던 것입니다. 원래 미국사람들이 쓰는 말 영어에서 격려라는 말 Encouragement는 라틴어의 심장을 뜻하는 Cor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격려라는 말은 심장을 준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하고 격려한다는 말인 Encouragement는 심장에 생명을 불어 넣듯 상대방의 마음을 따뜻하게 살려내고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까지 우리들을 인도하시는 방법이 바로 이러하였던 것입니다. 감사의 달 11월을 맞으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그 소중한 긍휼에 관해서 공부하면서 하나님께로 한 발자국 더 가깝게 나아가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긍휼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이와 같은 긍휼을 깊이 연구한 사도로 소중한 진리를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친히 하셨던 말씀이었습니다.

(33: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며 은혜를 내리시고 죽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사탄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셨는지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조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불쌍한 우리 죄인들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1:3-5)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신의 그 자랑스럽고 소중했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과감하게 내어버리고 평생을 하루 같이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거룩한 순교의 제물이 되어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최선을 다해 충성한 일꾼이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그는 숱하게도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고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다 겪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마디로 요약하여 오늘 우리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고 말입니다. 어떻게 그는 자신의 소중한 모든 것을 다 내버리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온 몸으로 겪으며 평생을 고생하였는데도 이렇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고백하고 또한 우리들에게 권면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는 오로지 그분만이 발견한 너무나도 소중한 은혜와 축복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였던 것입니다. 최소한 그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고귀한 긍휼과 은혜와 사랑을 온 몸으로 체험하고 확신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사도 바울과 같이 머리로가 아니라 온 가슴으로 하나님의 이와 같은 긍휼과 사랑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있고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 죄인들을 부르실 때 아무런 조건이 없었습니다. 그냥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부르시고 예수님의 피를 묻혀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하여 주셨습니다. 그 이유를 굳이 묻는다면 너무나도 불쌍해서입니다. 그냥 버려두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줄 아시기에 불쌍해서 죽을 형벌에서 구해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이렇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시고 그 예수님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죄인들을 구원해 주셨지만 반대로 그 예수님 때문에 죽은 자들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오늘 본문에서 이에 관한 진리를 정확하게 선언해 주고 있습니다.

(9:17-18)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다시 말해 애굽의 왕 바로는 긍휼의 대상이 아니라 그 반대인 강퍅의 대상으로 선택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하나님과 기독교를 입에 거품을 물고 저주하며 욕하는 사람들이 지구에 꽉 차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그 하나님을 위해 젊음과 일생을 다 바쳐 선교사로 헌신하고 훈련 받으며 죽음의 현장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서 기꺼이 나가는 젊은 선교사들을 너무나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긍휼이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드려야 할 감사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죄인들을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저 건져주시고 말할 수 없는 축복으로 채워주시며 하나님의 일꾼으로 구별하여 주셨으니 이 세상에서 이 보다 더 고귀한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 누구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긍휼을 덧입고 사도가 되었음을 알았기에 온 몸과 삶을 다 바쳐 그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종으로 헌신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111일 오후 4시경 여성 운전자가 운전하던 승용차가 의암호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자동차는 순식간에 물속으로 잠기었고 조수석으로 빠져 나온 50대 아주머니도 또한 금새 허우적거리다가 물속으로 잠겨들었습니다. 바로 그 때 누군가가 첨벙 물로 뛰어 들어 손살 같이 헤엄쳐갔습니다. 뒤이어 두 사람의 남성이 또다시 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들은 손살 같이 죽어가는 여성에게로 다가갔고 거뜬히 그 여성을 구조해 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소리만 치고 발만 동동 굴리고 있을 때 이들은 이렇게 행동으로 물에 뛰어 들었고 죽을 수밖에 없는 한 생명을 건져내었던 것입니다. 강원체육고등학교 수영선수들이었습니다. 죽마고우인 그들은 그날도 의암호에 체력단련을 위해 나와 있었고 사고를 보는 순간 행동으로 옮겨 그 여인의 생명을 구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에 관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죽어가던 여인은 오늘 우리들과 같은 허망한 존재들입니다. 그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스스로 목숨을 유지할 수조차 없는 연약한 존재가 바로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물로 뛰어 들어 그 여인을 건져 낸 수영선수들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들은 아무런 조건이 없었습니다. 다만 수영을 할 수 있었고 죽어가는 그 여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너무나도 딱하고 불쌍해서 뛰어 들어 건져 낸 것입니다. 주변에서 발만 동동 굴리며 아우성만 치던 사람들은 이 세상의 종교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유익을 준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사람들을 유인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아무런 유익도 줄 수 없는 무의미한 존재들이요 구경꾼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구원해 주신 것은 자비와 사랑 긍휼이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긍휼은 누가 받을 수 있나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누가 강요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거나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또한 우리 인생들의 입장에서 긍휼을 받을 준비와 조건이 있음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우선 사도 바울의 하나님의 주권적인 긍휼에 관한 말씀과 긍휼에도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성경의 증거부터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9:15-16)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긍휼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음을 단언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인생 편에서 맥을 놓고 마음대로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 많은 곳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덧입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음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55: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30:2-3)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라는 말씀들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냥 어떻게 하다가 얻어지는 축복은 없습니다. 일한 만큼 페이(Pay)를 받고 수고한 만큼 대접을 받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도 꼭 같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선언해 두셨겠습니까?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심은 그대로 거둘 것이라고 말입니다.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그 놀라운 긍휼하심을 덧입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요구 조건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올바른 신앙생활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다음에서 몇 가지로 요약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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