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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7년 11월 12일 주일낮설교 (하나님의 침묵)

2017년 11월 12일 주일낮설교 (하나님의 침묵)

하나님의 침묵

11. 12, 2017

本文:마태복음27:45-50

: 牧師

타우라스라는 산이 있습니다. 이 산은 독수리 서식지로 유명한 곳이라고 합니다. 독수리의 가장 좋은 먹이는 두루미입니다. 두루미들이 타우라스 산을 넘을 때면 독수리들은 포식을 하는 날이라고 합니다. 산을 오르는 두루미들을 독수리가 여지없이 공격하여 잡기 때문입니다. 독수리의 먹이가 되는 두루미는 소음을 내는 두루미들입니다. 타우라스 산을 수없이 넘지만 노련한 두루미는 거의 희생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행을 떠나기 전 입에 돌을 물고 가기 때문입니다. 돌을 문 두루미는 돌 때문에 소리를 내지 못하기 때문에 독수리를 피해 무사히 산을 넘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침묵은 사탄의 먹이가 되지 않게 막아줍니다. 침묵은 하나님을 만나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어는 침묵이며 그리스도인의 침묵은 성화의 본질에 속합니다. 말을 잘 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침묵은 더 좋은 일입니다. 물고기는 항상 입으로 낚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 사도들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경건은 혀를 재갈 먹이는데 있으며 혀를 금하여야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벧전3: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역사는 말의 풍성한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란스럽고 시끄러운 곳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왕상19:11-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 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는 말씀과 같이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조용하시고 침묵하시며 세미한 소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합니다. 하지만 때때로는 답답하고 원통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아무런 응답도 역사도 보여주지 않으시는 것 같은 적막함을 느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독생자를 주실 만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침묵하시는 것일까요? 오늘은 이에 대한 성경의 해답을 찾아보면서 조금 더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회로 삼도록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침묵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과 같이 일일이 대꾸하시거나 말씀하지 않으시는 하늘의 전능자이심을 성경 전체를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은 참으로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깨달을 수 있고 또 어떤 것은 영원히 알 수조차 없는 체 그렇게 지나가기도 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무거우시고 한 마디의 말씀이 천지를 바꾸어 놓을 만큼 무게가 있고 또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도 그만큼 입이 무겁고 또한 말을 했으면 끝까지 지킬 줄 아는 그런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불행하게도 입 때문에 망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백성들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빌라도 앞에서 무서운 말을 서슴없이 쏟아냈다가 자손 대대로 그들이 한 말 그대로 저주와 고통을 받고야 말았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민족들 중에 유대인들처럼 나라를 잃고 전 세례로 흩어져 유리방황한 민족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경솔한 저주도 자처한 말 때문이었습니다.

(27:24-25)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이라는 말씀과 같이 그들은 스스로 저주를 자초하고 그 저주대로 대를 물려가며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것입니다. 오죽하면 행위실천의 사도 야고보는 이처럼 말과 혀에 실수가 없으면 그는 곧 완전한 자라고 까지 표현해 두었겠습니까?

(3: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 인생은 말을 하는 유일한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 때문에 망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지구촌에 이처럼 수백 수천가지 말이 많은 것은 그 말 때문에 받은 저주의 현상임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굴에 들어가면 절대적인 침묵을 요구하는데 만약 말을 하면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루는 바보 삼형제가 그 굴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들어가면서 그 중 제일 큰 형이 말했습니다. "너희들 이곳에서 말하면 죽는다." 그러면서 그는 죽어버렸습니다. 그러자 둘째 형이 "그것 봐, 말하면 죽는다 그랬지," 그러면서 그도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 셋째가 자신 있게 말합니다. "나는 절대로 말 안할 거야." 결국 셋째도 죽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완전히 침묵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셈입니다. 비록 우화이기는 하지만 오늘 우리들이 새겨들을 만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침묵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성경을 조용히 묵상하며 연구해 보면 하나님의 침묵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것을 함께 찾아보면서 하나님을 다시 한 번 새롭게 바로 아는 기회로 삼아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일을 우리 인생들이 어찌 다 깨달아 알겠습니까만 성경이 증거하는 법위 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내용 두 가지만 선택해서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참으로 처참하고 안타까운 우리 예수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바라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절규하시는 예수님의 인성이 너무나도 간절하게 묘사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본문부터 다시 한 번 더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7: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는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이토록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하게 부르짖으셨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 그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이에 대한 주님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신 흔적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 때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피가 되어 떨어지도록 애절하게 기도하며 부르짖었지만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라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르짖는 기도나 예수님의 고통의 절규에 철저하게 침묵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래지 않아 예수님의 그와 같은 모든 아픔과 고통에 넘치도록 보상하시며 침묵을 깨시고 일어나셨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상세하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2:22-24)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르짖음에 침묵하시던 그 무거운 침묵을 깨시고 예수님을 그 무서운 고통에서 해방시키시고 더 당당하고 더 권세 있는 역사를 감당하시도록 다시 사망에서 살려내셨던 것입니다. 이로 보건데 하나님의 침묵은 결코 무관심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계산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잠시 동안만 계속 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각에 뛰어나신 전지하신 분이시라 우리들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의 침묵은 결국 더 나은 것으로 보상하시기 위한 일시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좁은 가슴으로 답답해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묵묵히 기다릴 줄 아는 믿음으로 준비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욥을 보아도 그렇고 25년이나 기다리게 만드셨던 아브라함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묵묵히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한 자들을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29:20)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엔도우 슈사꾸의 소설 [침묵]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명작입니다. 소설은 일본에서 선교하고 있던 크리스토퍼 페레라 신부가 일본 도쿠가와 정권의 고문에 굴복, 배교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를 가장 존경했던 제자인 세 명의 신부가 생명을 걸고 일본으로 잠적해 들어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중의 한 명인 로드리고 신부가 소설의 주인공으로 결국 그는 잡혀서 취조를 받게 되며 교활한 일본인들은 '후미에' 라는 예수님 상이 새겨진 동판을 나무판에 붙여 그것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만 살려주고 그렇지 않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예수님을 부인하도록 고문하였습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차마 그 후미에를 밟고 지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고문의 고통과 예수님 상을 앞에 두고 갈등하는 그에게 예수님이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밟아라. 나는 본래 밟히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냐? 나를 밟을 때 네 마음이 아플 것이다. 마음으로 아파해 주는 그 사랑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단다.” 그러자 로드리고 신부는 통분하였습니다. "주님, 주님이 언제나 침묵하고 있는 것을 나는 원망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침묵한 것이 아니다.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란다.” 주님의 일을 하는 우리들은 그때와는 또 다른 고난과 환난과 시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밟히기 위해서 오셨다는 주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확신할 때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은 오래지 않아 우리들에게 임재하시고 더 풍성한 은혜로 보상해 주실 것을 믿으면서 말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침묵은 그 자체로 심판입니다

우리들이 위기에 처하고 극심함 고통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고 침묵하신다면 그것은 정녕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침묵에 절망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와 같은 침묵은 의외로 무섭고 두려운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음의 성경 기사를 통하여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함께 그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삼상28:4-7)

블레셋 사람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 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 쳤더니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울이 위기에 처했고 그래서 하나님을 찾았으나 그 어떤 형태로든 응답하지 않으시고 침묵하고 계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은 간절히 찾는 자들에게 만나주시고 간절히 구하는 자들에게 응답하겠다고 스스로 약속하신 분이신데 한 나라의 위기가 달린 이 급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왜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으셨을까요?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미 죽이기로 결심하셨기 때문입니다. 원래 사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귀하게 여기시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우시고 그에게 성령님을 충만하게 보내 주셨던 인물이었습니다.

(삼상10:10)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그가 왕이 되고 나서 그 마음이 교만하여짐으로 하나님의 말씀도 거역하는 어리석은 죄를 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인생들의 자화상입니다. 뭔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잘 되게 하시면 눈물 나게 그것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들려드려야 하는데 사울처럼 교만하여 스스로를 높이며 하나님을 무시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오늘 사울을 깊이 가슴에 새기고 사는 날 동안 교훈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어쨌던 사울은 그렇게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도 거역하다가 결국은 자신을 왕으로 세워 주셨던 그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그를 떠났고 오히려 악신이 들려 고통과 번뇌 속에서 최후를 맞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삼상16:14)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삼상31:6)

사울과 그 세 아들과 병기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의 침묵보다 더 무서운 형벌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사실을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더 목도하고 경험하고 잘 알고 있었던 다윗은 하나님의 침묵을 가장 두려워하고 무서워 하였던 것입니다.

(28:1)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무덤에 내려가는 것과 같이 즉 죽는 것과 같이 두렵고 무서운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하나님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차 알지 못한 채 경거망덕 하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잉거솔(Ingersoll)이라는 독일의 유명한 무신론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강연에서든지 하나님이 없다고 외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날도 여느 때와 같이 무신론 강연에 열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연이 절정에 이르자 갑자기 자기가 차고 있던 시계를 풀더니 하나님에 대한 도전장을 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당신에게 5분이라는 시간을 주겠소. 나는 5분 동안 당신을 저주할 것이오. 만약 당신이 살아있다면 나를 저주하고 형벌을 내리시오.” 그리고 그는 5분 동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로 하나님을 저주하고 모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5분이 지났는데도 자신에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자 그는 더욱 의기양양해져서 외쳤습니다. “여러분, 저를 보십시오. 이만하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때 그의 강연장 뒤편에 있던 한 노인이 서서히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러우면서도 감히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한 그리스도인이오. 내가 감히 당신의 연설에 대해서 평가를 한다면, 오늘 당신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오. 단지 당신이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증명했을 뿐이지요. 내가 믿고 경험한 하나님은 내가 그분을 떠나서 거스를 때 책망하시고 때로는 징계까지 하셨던 분이시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당신에 대해서 침묵하셨소. 그분의 침묵은 곧 당신이 그의 자녀가 아니라 버림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오. 그 증거로 내가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을 소개해 드리리이다.”

(1:28-31)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참으로 이름 없는 그 노인의 말은 맞았습니다. 세상에서 학문께나 한다고, 돈께나 가졌다고, 권세를 잡았다고 경거망덕 하는 인생들이 참으로 오늘날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해 침묵하시는 것은 잠시 잠깐만 기다리시면 한 순간에 그들은 죽어 그 도모가 다 끝날 것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결코 내가 침묵하지 않고 부를 때 응답하겠고 부르짖을 때 내가 여기에 있다 하며 함께 할 것인즉 제발 내 말을 듣고 순종하며 따르라고 말입니다.

(58:9-11)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하신 약속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이와 같은 관계 회복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사울과 같이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는 그래서 비참하게 생을 마치고 죽는 그런 삶이 아니라 우리들의 작은 신음에도 달려오시는 그런 아름다운 관계를 회복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길이 있으면 가야하고 길이 없으면 찾아야 함이 마땅한 성도들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감사의 달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다음 주일이면 일 년 중에서도 가장 감사드리는 2017년도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우리들은 과연 무엇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우리들을 향하여 길이 참고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 드려야 하겠습니다. 부를 때 응답하시고 부르짖을 때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신실한 성도들은 그 얼마나 축복 받은 성도들입니까? 오늘 우리는 불행하게도 하나님은커녕 사람 하나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채 그렇게 스스로만 잘난 사울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깊은 깨달음으로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면 죽는 것보다 더 두렵다는 자세로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은총을 덧입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잠시 동안만 침묵하셔도 우리들의 짧은 생은 순식간에 다 지나가고 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침묵하지 않으시고 만나주시고 회복시켜 주겠다고 약속해 주셨사오니 그 말씀과 그 길을 따라 진정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귀한 날 하나님 전에 올라와서 감사와 기쁨으로 예배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하나님과 함께 모든 것을 나누며 부족함이 없는 행복으로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그런 진정한 멋쟁이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71112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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