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7일 주일낮설교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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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Monday, 18 December 2017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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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12. 17, 2017
本文:창세기3:8-19
說敎:崔 仁 根 牧師
가브리엘 마르세즈의 희곡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매혹적인 젊은 여성이 누구의 눈에도 신통치 않은 못난 남자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모두가 자기를 멸시하는데 뭇 남자들의 우상 같은 존재인 그 여자가 자신과 결혼해 준 사실을 고맙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열등의식으로 인해 그 여자의 결혼의 동기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그 여자에게 고통을 주고 싶다든지 꼬집어 주고 싶다든지 하는 야릇하고 못된 심정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를 안 아내는 그 열등의식을 고쳐 주려고 했습니다. 남편의 열등감을 고쳐 보려는 선의를 지닌 것입니다. 그녀는 자기 자신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열등감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순수한 사랑이 거부당하는 수모와 열등감과 불만을 남편에게 보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남편의 열등감을 고쳐 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가 열등감이 있는 척하여 자신을 고치려고 하는 것을 보고 그 아내를 천사처럼 생각하기보다는 그 순수한 사랑을 학대하고 짓밟고 모욕했습니다. 결국 거듭되는 악순환 속에서 아내는 나갈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남자에게 도망을 가버립니다. 이 한 편의 희곡 속에서 우리는 타락한 인간의 선의에는 한계가 있으며 너무나도 이기적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이와 꼭 같은 한 편의 이야기를 만나보게 됩니다. 바로 아담과 하와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혼자 독처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그의 갈비뼈를 취하여 예쁜 여자를 만드시고 아담에게 이끌어 왔을 때 아담은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찬사로 심중의 사랑을 고백하였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일지라도 그 사랑하는 여인이 줌으로 두 말 않고 받아먹었습니다.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물으시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모든 책임을 그 여자에게 돌리며 또한 하나님께 까지 돌려버렸습니다.
(창3:11-12)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자기가 잘못하여 하나님의 심문을 받으면서도 그 책임을 그 여자를 자신에게 보내 주신 하나님과 그 여자에게 돌리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참으로 좋았던 톨스토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사람은 자신은 선하고 남은 악하다고 보는 인간이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오늘 우리들의 본성이 무엇인지,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이 왜 이렇게도 힘들고 고통스럽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 어떤 고통도 우연한 것이 없고 다 하나님께서 범죄하고 배신하고 타락한 우리 인생들에게 주시는 형벌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와 같은 우리 죄인들에게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시려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성탄 주일을 한 주 앞두고 하나님께서 왜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셨는지, 그리고 타락한 우리 인생여정을 어떻게 극복하며 평안과 영생을 누릴 수 있겠는지 그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도들 중에서 왜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이라고 하는지 가슴이 저미도록 경험하고 체험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식이 아무리 잘못 해도 부모님은 먹이고 입히며 억지로라도 공부를 시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그 자식의 장래를 위해서입니다. 결국 그것이 자식을 향한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그 부모님의 속 깊은 사랑을 온 몸으로 감지하고 감격하고 감사하는 자식들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부모님의 사랑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눈에도 보이지 않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어떻게 온 몸으로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여기에 타락한 인간의 한계와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함께 믿음의 눈으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한 번 깊이 묵상해 보십시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음이 있을 것입니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에서 “너”는 사탄 마귀입니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직후 인간은 불행하게도 그 하나님을 배신하고 사탄 마귀와 짝하고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엄격하게 금하셨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형벌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은 때에 하나님은 이미 예수님을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보내 주실 것을 예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어찌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표현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이와 같은 사랑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표현해 두었습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고 말입니다. 그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그 큰사랑에 감동하여 일생을 온전히 그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갔던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계절인 것입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큰 전제를 앞에 두고 성탄의 말씀을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과 사탄 마귀는 우리 곁에 항상 공존합니다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곧 성탄의 예고요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그래서 오늘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을 원시복음이라고 합니다. 다시 한 번 더 원시복음인 창세기 3장 15절 말씀을 큰 소리로 읽으며 가슴에 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곁에 두 놀라운 세력이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 사탄 마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눈에도 안 보이는 이 두 영적인 세력은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물고 있습니다. 결국 신앙생활이란 이 세력 가운데서 예수님과 함께 사탄 마귀를 대적하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와 같은 사탄 마귀를 대적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약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벧전5:8-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는 말씀들과 같이 말입니다. 겨울이면 눈에도 보이지 않는 감기 바이러스가 우리들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들을 괴롭히는 원리와 같습니다. 이렇듯 사탄 마귀도 항상 우리 곁에 맴돌다가 우리들의 믿음이 약하여지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리 속에 들어와 영적인 삶을 파괴하고 예수님과 관계를 멀어지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불행한 것은 우리 스스로 그와 같은 사탄 마귀의 장난질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복하라! 근신하라! 깨어 있으라!”고 말입니다. 인류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가 이와 같은 사탄 마귀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을 배신하고 사탄과 함께 짝하게 되었던 사실을 돌이켜 본다면 오늘 우리들도 우리 스스로 그와 같은 사탄 마귀를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사탄 마귀를 대적하여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사탄 마귀가 우리들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우리 곁에 머무시면서 보호해 주시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임마누엘”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중 약 37번의 기적을 베풀어 주셨는데 그 중에서 12%가 사탄 마귀의 종들인 귀신을 내어 쫓으신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성탄 하시고 우리들과 항상 함께 하시는 것은 사탄 마귀가 아담과 하와를 넘어지게 하듯이 더 이상 우리들을 넘어지지 못하도록 지켜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탄이 헛되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길은 사탄 마귀의 미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항상 깨어서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가룟 유다는 왜 예수님을 배신하고 사탄 마귀와 동류가 되어 비참하게 망하고 말았을까요? 성경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가 마귀와 짝하고 예수님을 팔아 돈을 챙긴 그 속 사람의 악성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돈을 좋아하였다는 것입니다.
(요12:3-6)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그의 돈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사도 요한은 그를 도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자회에서 재정을 맡고 있었던 그는 그 속에서 돈을 훔쳐 갈 정도로 돈을 사랑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늘의 하나님이시오 스승이셨던 예수님도 흥정하며 팔아먹었던 것입니다.
(마26:15-16)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저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이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탄 마귀는 이와 같이 돈을 사랑하는 가룟 유다를 미혹하여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요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과 함께 하시려고 이 땅에까지 강림하신 예수님께 꼭 붙어 있어서 사탄 마귀의 미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치명적인 고통을 당하시면서 우리들을 지켜내십니다
오늘 본문의 원시복음을 들여다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당하실 고난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탄 마귀가 예수님의 발뒤꿈치를 상하게 하겠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발뒤꿈치는 바로 아킬레스입니다. 이와 같은 예언대로 예수님은 참으로 비참한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인간의 필설로는 결코 다 표현할 수 없는 놀랍고도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십자가의 형틀에 못을 박아 메달아 놓으면 서서히 물과 피가 다 쏟아져 나오며 극심한 갈증과 고통을 당하며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지속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온 몸으로 고통을 당하신 이유는 오직 하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신하며 만들어 놓은 죄 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사53:4-6)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여행 삼아 시찰이나 해 보시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비참하게 고통을 당하시고 물과 피를 쏟으시며 죽으시기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되 죽도록 충성하고 섬기며 따라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누가 감히 이와 같은 예수님 앞에서 사사로운 이유와 핑계를 대며 섬기기를 주저하며 물러설 수가 있겠습니까? 정상적으로 성령 충만히 받고 구원의 확신을 가진 신자라면 그 누구도 이와 같은 예수님을 섬기는데 주저하거나 뒤로 물러설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예수님 때문에 지금 우리들이 사탄 마귀의 밥이 되지 아니하고 천국을 보장 받으며 복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계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고 말입니다. 성탄은 우리들에게 이처럼 미온적인 믿음을 일깨우고 나태한 신앙에 불을 붙이며 죽도록 충성하도록 도전과 자극을 주는 계절인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만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의 현실이 그 얼마나 비참한지를 적나라하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고통 그 자체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렇게 실낙원하고 죽도록 고생하며 겨우 먹고 살다가 결국에는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가 바로 오늘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더 이상의 대안이란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이렇게도 비참한 우리들을 섬기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탄은 절망과 고통으로 지친 우리들에게 희망인 것입니다.
(막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절망과 고통으로 허덕이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평안을 주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어떻게 우리들이 이처럼 놀라운 은총을 누릴 수가 있습니까? 우리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사탄 마귀를 이기시고 사망에서 부활하시어 영원한 생명의 주인공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선포해 주시고 계십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우연히 우리들이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들이 평안치 못하는 모든 요인들을 온 몸으로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는 이와 같은 예수님 안에 머물고 있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억수 같이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누가 만들어 놓은지도 모르는 원두막에 들어가 비를 피하듯이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이라는 원두막으로 피신해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는 말씀처럼 오직 우리는 예수님 안에만 머물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예수님께 구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바로 이것이 성탄의 진정한 축복이요 신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놀라운 기적인 것입니다. 주님을 떠나지만 않으면, 그리고 그 주님과 함께 하기만 하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과 같이 기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은 1972년부터 1978년까지 한국 국가대표 축구선수 생활을 할 당시였다. 태릉 선수촌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그중 유일하게 예수님을 믿던 사람이 이영무 선수였다. 지금은 목회자가 됐다. 항상 복음을 전하는 그를 대부분의 선수들이 외면했지만 미션스쿨에 다녔던 나는 거부반응은 없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최고의 축구선수, 최연소 국가대표 선수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나는 굳이 종교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었고 그 누구의 도움도 조언도 필요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무릎이 갑자기 아팠다. 잠시 후 사라지더니 다시 주기적으로 통증이 찾아왔다. 1년 후 1976년에는 고통이 너무 심해져 왼쪽으로 중심을 맞출 수가 없었다. 운동선수에겐 중심이 중요한데 왼쪽으로 중심을 낮추지 못하기 때문에 자세가 높아 공이 자꾸 도망갔다. 축구선수로서 부와 명예를 짊어졌던 나는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두려워 정말 부끄러운 치료방법까지 다 동원해 고쳐보려했다. 그러나 고통은 더 가중될 뿐이었다. 76년도에도 월드컵 경기가 벌어졌고 중동 원정경기를 치루었다. 경기 내용은 엉망이었다. 축구선수로서의 나의 인생을 지탱하고자 뭔가 기댈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간절히 필요했다. 그러던 중 이영무 선수 생각이 났다. 그에게 성경과 하나님에 대해 말해달라고 하니 신이 나서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나 내게 그의 이야기는 단지 이야기로 들릴 뿐이었다. 서울로 돌
아와 보니 아내가 "친구가 우연히 우리 집을 방문했는데 당신 보고 예수 믿으래요"라고 말했다. 나의 상황과 그 사건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 친구를 다시 한 번 집에 초대했고 이영무 선수도 동행했다. 당시 예언의 은사를 받았었던 그 친구가 이상한 말로 기도하는 것을 들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달라고 했더니 "당신이 하나님을 외면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당신을 버리지 않았다. 이제 당신이 하나님의 팔에 매달릴 시간이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순간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나의 인생 역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가 신앙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76년도 당시 서울운동장이었다. 말레이시아와 대통령배 국제 축구대회에서 우리 팀이 말레이시아한테 4대 1로 지고 있었다. 후반 경기시간이 7분남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2분이 남을 때 까지 5분 동안 나 혼자서 세골을 넣어 4대4 동점이 됐다. 기적이었다. 수많은 관중들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고 어떤 이들은 넋을 잃었다. 이 경기는 내가 한 것이 아니었다. 태릉으로 돌아오는 버스창가에 기대어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없었던 이것, 분명 누군가의 힘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라는 강한 확신이 생겼다. 그리고 아내 친구의 기도가 생각났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날 밤 잠에서 깬 나는 소파위에 놓여진 성경책을 발견했다. 웬지 그것을 펴보고 싶은 생각에 책장을 넘겼다. 창세기 1장 1절 말씀이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렇다 내가 몰랐구나' 성경을 읽어 내렸다. 신약에 병든자가 치료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순간 나는 아픈 무릎을 만지며 '나도 치료 받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아내와 아내의 친구와 함께 어느 목사님을 찾아갔다. 그분은 나의 눈과 배에 손을 대고 기도를 해주셨는데 어찌나 아프던지 심한 훈련으로 단련된 내 몸이 그렇게 아팠던 적은 없었다. 15분이 흘렀을까? 기도는 계속됐다. 내 몸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목사님이 '할렐루야'를 말하며 따라하라고 했다. 나는 '할렐루야'를 말했다. 그런데 귀에 들리는 말은 이상한 말, 나도 알지 못하는 말이었다. 한 번 더 따라했다. 다섯 번이나 따라했는데 계속 혀가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 아내의 친구는 놀라며 내 아내에게 소리쳤다. "어머 너의 남편이 방언의 은사를 받았어." 그때 나는 하나님이 나한테 임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무릎 통증이 사라진 것이다.](차범근씨의 간증 중 일부분 발췌)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다음 주일이면 성탄주일입니다. 성탄의 가장 소중한 의미는 “임마누엘”입니다.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나버린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면서 찾아오신 계절이 바로 성탄절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탄은 단순하게 예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하시기만 하는 계절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들을 미혹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는 요인인 사탄 마귀를 친히 막아주시고 보호하시고 우리들이 당하여야 할 그 무서운 죄 값을 친히 담당해 주신 계절이 바로 성탄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저절로 존재하는 것이란 없습니다. 그 무엇이 되었던 지간에 존재하는 것은 존재케 한 원인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을 평안하게 만들어 주신 원인은 바로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순간도 예수님의 그 숭고한 희생적 사랑을 잊으면 안 됨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그 사랑에 감복하여 우리들도 삶의 소중한 것들을 그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바치는 거룩한 희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복된 성탄의 계절에 희생할 줄 아는 사랑으로 구유에까지 찾아오신 예수님으 맞아야 하겠습니다. 귀한 날 복된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이와 같은 풍성한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7년 12월 17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