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21일 주일낮설교 (인생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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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21 January 2018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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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주인
1. 21, 2018
本文:창세기22:1-13
說敎:崔 仁 根 牧師
영국인 엘리자베스 여왕의 삶은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인 부왕이 갑작스럽게 비극적으로 돌아가셨는데 그때 그녀는 아프리카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단지 가냘픈 소녀로만 보였습니다. 그녀는 돌아와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내려놓은 왕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녀의 할머니인 메어리 여왕이 아직 살아계셨는데 그녀는 아주 엄격하고 철저한 분으로서, 왕가의 품위를 유지시키고 있었습니다. 메어리 여왕은 너무 젊은 나이에 무거운 왕관을 쓰게 된 새 여왕, 엘리자베스에게 동정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는 사랑과 동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그 편지의 내용이 아니라, 그 편지의 끝부분에 어떻게 쓰여졌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알고 있었던 엄격하고 근엄한 여왕, 메어리 여왕이(할머니이신), 가냘픈 소녀티를 아직 벗지 못한 소녀인 여왕에게 편지를 했는데 그 편지의 끝에 이러한 사인이 있었습니다. “페하의 사랑하는 할머니 그리고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로 부터!” 이 가냘픈 소녀에게 메어리 여왕은 충성스러운 신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가냘픈 소녀, 이 땅의 여왕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색을 입으셨던 분, 가시면류관을 쓰셨던 분, 자기 백성들에게 '너희 왕이로다' 라고 표현되었던 분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분을 왕으로 섬기겠습니까? 여러분은 왕관을 가져다가 만유의 주께 그것을 바치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을 찬양 드립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은 영어로 LORD입니다. 이는 원래 영국에서 귀족이나 고위 공무원을 칭하였고, 한국에서 ‘각하’라는 경칭처럼 영국에서는 ‘경’이라고 할 때 사용 되었던 말이었습니다. 이 말이 'The'라는 관사를 앞에 붙이고 대문자를 써서 예수님을 칭할 때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The Lord Jesus Christ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을 한문으로는 주인 주(主)자로 사용하여 우리 인생의 주인이심을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그 잘났던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뜻밖의 예수님을 만나고 두 눈이 어두워진 채 꺼꾸러져서 부른 첫 마디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주님, 누구시옵니까?” 라고 말입니다.
(행9:3-5)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주님을 핍박하던 사울의 주님만은 아닙니다. 오늘 영적으로 거듭난 우리 모두의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사람은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주인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아브라함은 나이 75세에 비로소 인생의 주인을 바로 만난 아주 특별한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도록 징검다리를 놓는 일에 값지게 쓰임 받은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마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은 이와 같이 위대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그 멋들어진 삶과 믿음의 가치를 찾아 우리들의 것으로 만들고 우리들 또한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는 바른 길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과연 어떻게 이렇게 나이 늙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더 값지게 쓰임 받고 인류 역사에 길이 남는 그런 멋들어진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성경에서 그의 삶과 믿음을 들여다보면 역시 우연한 일이 아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땅의 그 누구도 감히 쉽게 할 수 없었던 놀라운 결단과 순종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만의 놀라운 노하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기왕에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새해를 결단하고 특별새벽기도로 하나님을 만나고 전교인 수련회를 통하여서 3일 동안 말씀으로 훈련 받고 이제 본격적으로 새해를 출발하는 복된 이 이즘에 아브라함을 영적인 사람의 롤 모델로 삼고 배우고 익히며 영적인 기본부터 쌓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순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그의 부친이 경영하는 우상장사를 도우며 우르라는 땅에서 거의 인생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이제 그의 나이 75세, 황혼의 때로 들어서는 바로 그 나이에 뜻밖에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창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을 이렇게 단 한 문장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삶의 현실이라고 가정해 본다면 아브라함의 그 결단이 그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훌륭한 믿음의 조상들이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결단을 높이 평가하고 수천 년이 지난 후에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행7:1-4)
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사람은 그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종은 변명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무조건 주인의 목소리를 순종하여 그것이 자신에게 유익하든지 아니든지를 떠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영적인 사람이 되자고 부르짖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주인이 원하실 때, 그리고 주인이 말씀하실 때 무조건 순종하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 우리는 그 기본적인 훈련과 변화를 만들어 놓아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영적인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카톨릭 복음주의자 가운데 헨리 나우엔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교수로 지낸 사람입니다. 그의 저서는 아주 유명해서 개신교인들도 핸리 나우엔의 책을 많이 읽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일생에서 1985년은 아주 중요한 해였습니다. 1985년 초에 불란서에 있었던 정신지체아들을 모아서 수용하면서 그들을 섬기고 양육하는 라르쉬라는 공동체에 한 지도자가 예일대학으로 헨리 나우엔 교수를 방문합니다. 헨리 나우엔은 그 공동체의 지도자로부터 처음으로 정신지체아들의 세계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구나. 또 정신지체아들을 섬기면서 이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 날은 그들이 사는 얘길 감동으로 받고 그냥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서 그 다음에 이 공동체의 지도자로 있었던 장 바니에라는 지도자로부터 편지 한 장이 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자기의 공동체에서 정신지체아들의 수양회가 열리는데 거기에 와 주었으면 좋겠다.”는 글이었습니다. 헨리 나우엔 교수는 처음에 자신을 강사로 초청한 줄 알고 있었는데 막상 수련회에 가보았더니, “우리 수양회는 침묵 수양회(Silent Retreat)입니다. 이 수양회는 사흘 동안 열리는데 기도만 하고 행동으로만 사람들을 돌봐주고 섬기는 수양회입니다.”라는 것입니다. 특이한 수양회를 참석하면서 헨리 나우엔 교수는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헨리 나우엔 교수는 사흘 동안 아무 소리 안 하고 정신지체아들을 돌봐주고 발도 씻어주고 밥도 해주고 같이 식사하고, 그들을 쳐다보면서 마음으로 기도만 하면서 돌봐주는 침묵 수양회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그는 처음으로 정신지체아들의 세계 속에 자기 몸으로 부딪히면서 자기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던 그들을 경험했습니다. 침묵수양회를 마치고 돌아온 후 또 한 장의 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교수님이 함께 있어서 축복이었습니다. 교수님이 이런 우리 같은 정신지체아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어 주신다면 얼마나 커다란 하나님의 선물일까요.” 그 당시 헨리 나우엔 교수는 예일대학에서 하버드대학 교수로 이제 막 옮겨 한참 할 일이 많았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버드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면서 얼마든지 불쌍한 사람들을 도울 수가 있는데, 그 편지 한 장이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에 도전을 주었습니다. ‘주님이 하버드대학을 떠나 정신지체아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라고 나를 지금 부르시는구나!’ 그의 마음에 자꾸 그런 부르심이 느껴져 갈등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그는 매우 갈등했지만 주님의 강렬한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결국 승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버드대학 교수직을 포기하고 1985년 가을에 캐나다의 토론토 근처에 ‘데이브레이크 커뮤니티’(Day Break Community)라는 정신지체아를 위해서 새로 생긴 공동체의 지도자로 떠나갑니다. 그 곳에는 단 6명의 정신지체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단 6명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하버드대학의 교수직을 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상하다. 이것은 희생이고 이것은 지금까지의 삶을 뒤엎는 나의 새로운 삶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웬일인가! 이상한 마음의 평안이… 이 놀라운 평안이여, 자유여, 자유여.’ 그는 자기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이런 놀랍고도 충격적인 고백을 합니다. “나는 이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여기에 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이 공동체에 와서 처음으로 고향을 찾은 것 같은 감정을 느낀다. 탕자였던 내가 오히려 집으로 돌아온 것을 느낀다. 그리고 나는 이 사람들을 돕고 이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온 것만은 아니다. 우리 공동체 6명 중 아담이라는 청년이 있는데 그는 정신지체아였지만 깨끗하고 투명한 영혼을 가졌다. 나는 그의 영혼과 부딪치면서 그가 나를 치료하고 있다. 그가 나를 치료하고 있다. 나에게 붙어있던 찌꺼기, 그런 거짓된 위선, 가면, 이런 것들이 찢겨 나가도록 내가 섬기고 있는 아담이 내 영혼을 치료해주고 있다.” 이것은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나중에 그는 정신지체아들도 시간은 걸리지만 그들도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고 그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기 시작합니다. 1996년 9월 21일에 헨리 나우엔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떠나기 직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우리의 이웃들을 통해서 우리 주님 그리스도를 새롭게 경험했다. 나는 참 행복했다. 나는 참 행복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진실로 그는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가장 아름다운 평안과 행복을 누렸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치라 할 때 순종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출발한 아브라함의 생애는 참으로 놀라운 기적으로 넘쳐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나이 백 살에 아들을 낳은 것이 최고의 기적이요 축복이었습니다. 그는 사실 자식 하나가 없어 늘 조카 롯을 자식처럼 데리고 다녔던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습니다. 나이 백 살에 얻은 바로 그 금쪽같은 아들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장작더미 위에 아들을 각을 떠서 얹어 놓고 불로 태워바치는 제사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반응하였는가를 살펴보면 진정한 종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고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삼은 성도의 삶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창22:1-3)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이 말씀에서 우리는 그의 절대적인 순종을 보게 됩니다. 단 한 마디의 말도 없이 묵묵히 시장 가서 두부 한 모 사 오너라고 시키시는 엄마의 말씀을 따라 심부름 가는 천진한 어린 아들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순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미련 없이 칼을 들어 아들 이삭을 내려치려는 순간까지 하나님은 그를 묵묵히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창22:9-10)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서 더 이상은 보고만 계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 감탄하셨습니다.
(창22:11-12)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고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하나님을 감동시켜 드린 인물이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사람이 나이 백 살에 기적처럼 얻은 그 아들을 이처럼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칼로 각을 떠서 불에 태워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련 없이 그 아들을 바쳐드렸으니 하늘의 하나님이시라도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전무후무한 놀라운 축복으로 보상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주시는 축복이 “큰 복”이라고 하실 만큼 그가 받은 복은 참으로 크고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단순하게 다음과 같은 큰 복을 보더라도 실로 우리 소시민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창22:15-18)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그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할렐루야!
미국 서부 지역에서 지난 20세기에 일어났던 한 가지 이야기가 인생의 주인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어느 날 10살 정도의 남자 아이가 작은 손에 1달러 지폐를 꼭 쥐고는 상점마다 찾아 다녔습니다. 그리고는 간절하게 물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혹시 하나님을 파시나요?” 하고 말입니다. 가게 주인들은 한결 같이 아이를 한 번 쳐다보고는 기가 찬다는 듯 “안 팔아요.” 하거나 바쁜 일손을 방해하지 말라는 듯 매몰차게 쫓아내버렸습니다. 서산에 해는 기울어지고 날은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었지만 작은 소년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가게를 찾아다녔습니다. 69번 째 가게에 들렀을 때 그 소년은 제법 많이 지쳐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혹시 하나님을 좀 파시나요?” 하며 간절하게 주인 되신 할아버지께 애걸하였습니다. 그 가게 주인은 60이 넘어 보이는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였습니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할아버지는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하나님은 사서 무엇 하려고 그러니?” 처음으로 자신에게 제대로 말을 걸어주는 할아버지를 쳐다보던 아이는 그만 눈물을 흘렸고, 자신의 사연을 노인에게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어렸을 때 다 돌아가시고 지금은 삼촌이 돌봐주고 있는데 얼마 전 삼촌마저도 건축 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떨어져 지금은 혼수상태에 놓여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삼촌을 치료하던 의사 선생님이 이 아이에게, “삼촌을 살려낼 길은 하나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이는 하나님이라는 것이 참으로 신기한 물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천진한 아이는 그 의사 선생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꼭 하나님을 사와서 우리 삼촌에게 먹일께요. 그리고 꼭 삼촌을 살려낼께요.” 하고는 자신의 전 재산인 1불을 잃어버릴세라 손에 꼭 쥐고 가게마다 하나님을 찾아 나셨던 것입니다. 아이의 말을 들은 노인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돈은 얼마나 가지고 있니?”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1달러요.” “마침 잘 됐구나. 하나님은 딱 1불이거든...” 할아버지는 아이의 손에서 1불을 받고 선반에서 “하나님의 키스”라는 음료수를 건네주면서, “아이야, 여기 있단다. 이 하나님을 마시면 네 삼촌이 금방 나을 거야.”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아이는 기뻐하며 음료수를 품에 안고 쏜살같이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병실에 들어서자 말자 아이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삼촌, 내가 하나님을 사왔어요. 삼촌은 이제 곧 나을 거예요.” 다음 날 세계 최고의 의료진이 전용기를 타고 그 작은 시골병원으로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삼촌을 진료하였습니다. 아이의 삼촌은 정말 기적 같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병원에서 나온 병원비 고지서를 보고는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거기에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병원에서 친절하게 말해주었습니다. 어떤 억만장자 할아버지가 병원비를 몽땅 다 내 주었다고 말입니다. 삼촌을 진료한 최고급 의료진도 바로 이 노인이 보내준 분들이었습니다. 삼촌은 나중에서야 조카가 마지막으로 들론 그 가게 주인이 억만장자 할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노인은 심심하고 무료할 때 그 가게에 가서 소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감격한 삼촌은 조카와 함께 그 가게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여행을 떠나고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일하고 있던 점원은 크게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는 말과 함께 노인이 남기고 간 편지 한 통을 전해 주었습니다. “젊은이, 내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네. 사실 모든 비용은 자네의 조카가 다 지불했다네. 자네에게 이런 기특한 조카가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행운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네. 자네를 위해서 1달러를 쥐고 모든 가게를 다 뒤지며 하나님을 찾아다녔으니 말이야...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바로 그 하나님이 자네를 살렸으니 말이야!”
아브라함은 좋은 것을 먼저 조카에게 양보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오랫동안 목회를 하다 보면 하나님께는 기가 막히게 잘 하는데 이웃들에게는 엄청 못되게 하는 그런 이율배반적인 교인들을 종종 만나보게 됩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비현실적인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을 사람 중심으로 할 때도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으로 거듭나야 하고 또한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실로 놀라운 이웃 사랑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많이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단순하게 하나님께만 잘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웃들에게도 하나님께 하듯 똑 같이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명령하시는 진정한 성도의 삶의 원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레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아브라함은 멀리 길 가다가 나무 밑에서 쉬고 있는 나그네까지도 집안으로 모시고 와서 극진히 대접한 그런 멋들어진 사람이었습니다.
(창18:1-5)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게 대접한 나그네는 하나님의 사자들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는 나이 백 살에 아들을 낳게 되는 기적 같은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가 자식처럼 데리고 다녔던 조카 롯을 분가할 때에도 보통 사람들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13:7-12)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여기에서 우리는 롯의 처신을 보게 됩니다. 삼촌이 친히 데리고 다니며 거부가 되게 해 주셨는데도 이 마지막 이별의 순간에 그는 삼촌에게 선택권을 양보조차 하지 않은 채 물이 풍부하고 평지인 좋은 땅을 먼저 선택하고 떠나가 버리는 모습에서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육신의 한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늙고 연로하고 자식도 없는 삼촌에게 좋은 땅을 먼저 양보해 드릴만도 하겠건만 욕심으로 가득 찬 인간은 바로 이처럼 처신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브라함을 보면 너무나도 감동적입니다. 너는 아직도 젊고 빈손으로 나왔다가 거부가 되었으나 끝까지 겸손하게 선택권을 조카에게 주고 자신은 뒤로 쳐지는 모습이 실로 감동적입니다. 그도 사람인데 왜 섭섭하지 않았겠습니까? 마는 그는 결코 인간적이고 육신적인 처신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나타나시고 더 좋은 땅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셨던 것입니다.
(창13:14-17)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만 잘 하는 종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이웃들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사랑하고 양보하고 참아줄 때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상으로 살아가며 덕을 행하고 사랑을 베풀 때 비로소 우리는 영적인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라!”는 신년 표어를 내걸고 두 주간 동안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하여서 하나님을 만나고 지난 주말 3일 동안 전교인 수련회를 통하여서 말씀으로 무장하며 명실공히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한 새 출발을 당당하게 시작하였습니다. 이제는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한 기본적인 훈련으로 영적으로 가장 크게 승리한 아브라함을 통해 그의 내면적인 놀라운 믿음의 덕목을 공부해 보았습니다. 과연 아브라함의, 범인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결단이 오늘 우리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나이 75세면 예나 지금이나 상당히 인생의 마지막 때인데 그는 그 나이에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자 담대하게 꿈을 안고 일어나 순종하고 따르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나이 백세에 기적 같이 얻은 이삭을 하나님께서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셔도 단 한 마디의 변명도 없이 사흘 길을 걸어가 바쳤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무서운 순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와 같은 아브라함에게 더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또한 평생에 조카를 데리고 다니며 많은 가르침과 재물로 거부가 되게 만들어 주었으나 끝끝내 삼촌에게 양보하지 않고 물이 많고 기름진 소돔 땅을 선택하고 돌아서도 일언반구 서운한 말 한 마디 하지 아니하고 묵묵히 양보하는 미덕으로 오늘 우리들을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그는 이렇게 온 몸으로 친히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아브라함을 인류를 구원하실 예수님의 조상으로 선택하시고 역사를 통하여 영원히 빛나는 하나님의 종으로 기꺼이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시작은 곧 그의 이름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렇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렇게 사는 삶이 영적인 사람으로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날에 하나님의 전으로 올라와 예배로 영적인 성도로서의 사명을 다하며 예배로 영광을 돌려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이 정녕 아브라함과 같은 은총을 누리시게 되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8년 1월 21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