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4일 주일낮설교 (여호와를 기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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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04 March 2018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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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기대하라!
3. 4, 2018
本文:시편37:1-9
說敎:崔 仁 根 牧師
우리들이 누군가를 기대한다는 것은 그만큼 믿고 사랑한다는 방증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대는 곧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말하는 것은 그마 만큼 관계가 좋지 않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제대로 된 인관 관계를 맺어 놓지 않은 채 기대만 하고 있었다면 당연히 그 결과가 실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군 다윗은 우리들에게 인생과 신앙생활의 승리를 위한 한 가지 Tip(팁)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9절 말씀입니다.
(시37:9)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고 말입니다. 악을 행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 망하게 될 것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기대하게 되면 땅을 차지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사는 날 동안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할 소중한 말씀입니다. 다윗은 그가 남긴 이와 같은 말씀대로 살았다가 놀라운 축복을 누리고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동에서 한 나라의 위대한 왕으로 등극하여 손색없는 한 평생을 풍미한 축복의 대명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신앙인들의 삶을 쫓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진정 복되고 승리하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따라가며 승리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신자들이고 영적으로 거듭난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육신을 넘어 영적으로 가는 길이 과연 어떠한 것인지, 부정적으로 우리들을 사라잡고 있던 염려와 근심, 비판과 두려움, 원망과 실망을 넘어 눈을 들어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대하는 신선한 변화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를 기대하라!”는 말씀이 바로 그 해답이 될 것입니다. 함께 듣고 은혜와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를 기대하라!
솔직히 우리는 늘 사람을 기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바라보고 오로지 이 땅의 것으로 행복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세상적인 것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300조의 재산을 가진 한 사람의 고백이 최근 SNS를 통해서 화재를 낳고 있습니다. “돈이 불어난다고 결코 행복한 것은 아니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것은 가진 자들의 만용이다. 불행하더라도 난 한 번 그렇게 많은 재산을 가져보았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돈을 기대하고 있고 사모하고 있고 갈망하고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생생하게 경험하고 하는 말일지라도 그러한 것들을 기대하고 소망함이 너무나 크면 그러한 경험의 고백조차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들은 망할 때 망할지라도 그렇게 많은 돈을 가져보았으면 하는 기대를 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와 같은 육신적인 가치관을 바꾸고 신령한 영으로 거듭나 진정으로 복되고 행복한 내일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을 향해 무엇을 기대하고 바라고 의지해야 하겠습니까?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분명한 해답을 성경 말씀 속에서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지금은 바야흐로 백세 시대입니다. 대한민국에서 100세를 넘기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 3천 명을 넘고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백세를 넘기며 장수하는 사람들의 공통분모가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고함치며 싸울 수 있는 멋진 친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역으로 말하면 함께 할 친구가 없는 사람은 빨리 죽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실은 실제로 입증된 일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배우자가 없고 희로애락을 나눌 친구가 없이 백세를 넘기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역시 인생은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것임을 이와 같은 통계로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도 아닌 하늘의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동행해 주신다면 우리들의 삶이 그 얼마나 윤택하고 행복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기대하되 하늘의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동행하시고 함께 해 주시기를 소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지구촌에서 이렇듯 하나님을 등지고 홀로 흥하거나 잘 되거나 승리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돈이 너무 좋아 그 돈을 얻기 위해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마 먹은 천하에 못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그 돈으로 행복하게 살지 못했을까요? 그는 돈을 갖기 위해 제자회에서 회계를 맡고 있을 때 아무도 몰래 그 돈을 훔쳐가기도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으고 가지게 된 돈으로 그는 그 누구보다 행복하고 넉넉하게 잘 살아야 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왜 그 돈으로 행복하기는커녕 스스로 자신의 목을 매고 죽는 비참한 인물이 되고 말았을까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예수님을 팔고 예수님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예수님 없는 돈은 무용지물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와 반대로 살아야 합니다. 돈을 버리고 예수님을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만 바로 만나면 돈은 그 예수님께서 주십니다. 돈보다 더 귀한 건강도 주십니다. 건강보다 더 귀한 생명도 주십니다. 그것을 평생토록 생생하게 체험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지금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이 최목사입니다. 저는 돈을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친구를 버리고 오직 단 한 사람 예수님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내가 버렸던 돈을 분에 넘치도록 채워주셨고 부보님과 같은 좋은 분들을 만나게 해 주셨으며 평생을 서로 돕고 의지하는 더 좋은 친구들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발 한 사람의 고백만으로 치부하지 마시고 다윗과 같이 여러분들의 목사와 같이 이제는 좀 세상을 버리고 돈을 포기하고 오직 예수님을 연인보다 더 사모하고 가깝게 한 번 만나보십시오! 그리고 그 주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축복이 과연 무엇인지 스스로 한 번 체험해 보십시오! 그 길이 바로 예수님께서 사는 날 동안 함께 해 주시기를 기대하고 바라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와 같이 돈을 취하기 위해 예수님을 버린 사람들은 다 망했지만 거꾸로 돈을 버리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망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은 노래해야 합니다. 찬송가 500장을 말입니다.
1절.
주 음성 외에는 더 기쁨 없도다 날 사랑 하신 주 늘 계시옵소서
기쁘고 기쁘도다 항상 기쁘도다 나 주께 왔사오니 복 주시옵소서
3절.
주 떠나가시면 내 생명 헛되네 즐겁고 슬플 때 늘 계시옵소서
기쁘고 기쁘도다 항상 기쁘도다 나 주께 왔사오니 복 주시옵소서
특별히 3절의 가사가 오늘 우리들의 눈을 붙들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떠나가신다면 내 생명이라고 헛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즐거울 때나 슬플 때를 막론하고 하나님 늘 나와 함께 해 주십시오.”라는 이 가사가 바로 오늘 우리들이 소망하고 기대하며 하나님께 호소해야 할 기도 제목인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만 함께 해 주신다면 우리들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넉넉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는 바로 이것을 우리들에게 생생하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실 때 그곳에는 병든 자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모든 환자들을 다 고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실 때 그들 중에 그 누구도 굶주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의 도시락에 불과한 5병 2어로 5천명도 넉넉히 먹이시고 남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실 때 그곳에는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이미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도 다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넉넉히 그와 같은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어떤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수평선이 보이는 모래밭 위를 걸어온 꿈이었습니다. 긴 모래 길은 자신의 일생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모래 위에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보였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것, 또 하나는 [늘 동행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일생을 통해 극심한 고통을 당했을 때마다 모래 위에는 한 사람의 발자국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예수님, 늘 함께 하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제가 그렇게도 고통에 빠져 있을 때는 왜 주님께서 저와 함께 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저기를 보십시오. 그땐 제가 홀로 걸어왔잖아요?” 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이렇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자야, 그것은 네 발자국이 아니고 내 발자국이란다. 네가 고통 가운데 있었을 때는 내가 너를 업고 지나왔느니라.”
오늘 우리들도 이와 같이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의 사는 날 동안 우리들과 함께 하시고 동행해 주시기를 기대하고 소망해야 하겠습니다.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삶이 바로 영적인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해야 합니다
지난 걸프전쟁 때 찍힌 관련 사진 중에서 한 전투병사의 철모에 쓰인 글귀가 많은 사람들의 화재거리가 되었습니다. 거기엔, [주여 나를 도우소서]라는 글귀가 쓰여져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죽음의 분위기를 느끼게 되면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臨死呼天(임사호천)이란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찬송가 405장의 작사자인 쟌 뉴턴도 임사호천의 대상자였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노예상이었는데 바다 한가운데서 큰 풍랑을 만나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끼게 되자 울부짖으며 하나님을 찾았고 회개하는 가운데서 간신히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이후 그는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고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고 그는 2절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성군 다윗도 그와 같은 죽음의 고비에서 건지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시23:4-5)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103:4-5)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하시고 동행하시기를 기대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능력 많으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시시때때로 우리들을 도와주시기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를 키워보면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단 하나도 없음을 압니다. 먹이고 입히고 제우고, 심지어는 대소변까지도 해결하지 못해 부모가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 아이입니다. 이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영적으로 어린 Baby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만 가지를 도움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우리들을 그렇게 도와주겠습니까? 돈입니까? 사람입니까? 권세입니까? 결코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누가 우리들이 죽을병에 걸렸을 때 도와줄 수 있습니까? 돈이 죽을병을 해결해 줍니까? 대통령이라는 권세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애플의 창시자요 세계 초 일류 갑부였던 스티브 잡스는 56살에 이미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까? 쟌 에프 케네디는 그 강력한 소련의 무력도 막아 냈었는데 왜 자기 생명 하나도 지키지 못한 채 암상당하고 말았습니까? 남의 병은 고친다고 명의니 뭐니 하는 칭송을 들으면서도 의사는 왜 자신의 병 하나도 고치지 못한 채 죽어가야만 합니까? 단순 논리로 보아도 사람이나 돈이나 권세가 우리들의 진정한 도움이 되지 못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천지를 만드시고 우리들을 만드신 하늘의 하나님만이 우리들의 진정한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믿고 이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해야 하니 우리들이 육신을 넘어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육신을 넘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던 다윗은 오늘 우리들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시37:5-7)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라고 말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여호와의 도우심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이 과연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 날 좀 도와주십시오.”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세상 사람 천 명을 붙들고 물어보십시오.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하고 한 번 말을 전해 보십시오. 힘든 사람에게 약 올리느냐고 노발대발하고 달려 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라고 기대 합니다. 왜입니까? 이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친히 그렇게 도와주겠다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고 말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몸소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 사자가 나타나 양을 물고 가면 따라가서 그 사자의 입을 찢고 양을 도로 찾아왔습니다. 블레셋의 엄청난 장수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괴롭힐 때 물맷돌 다섯 개로 그 어린 다윗이 물리치고 승리하였습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이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던 것을 그는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우리들에게 당당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도우심을 기대라라!”고 말입니다. 이것을 믿고 삶의 매 순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기다리며 기대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렇게 되려면 우리들이 육신의 지식과 경험과 가치를 던져버리고 오로지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해 본 사람만이 그와 같은 하나님을 기대하고 의지하고 기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크리스마스이브에 아이라 D. 생키라는 사람이 델라웨어 강을 거슬러 오르는 증기선을 타고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노래를 청했고 생키는 ‘선한 목자’(우리 찬송가 442장)라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찬송이 끝난 후 어떤 거칠고 햇볕에 탄 얼굴의 사나이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혹시 남북전쟁 때 북군의 용사로 참전하지 않으셨습니까?” “네. 그랬지요.”라고 생키가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1862년 달이 밝았던 날 밤 보초병으로 서셨던 것을 기억 하시겠습니까?” “네.” 생키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대답했습니다. “저도 보초병이었지요. 같은 날 밤에. 하지만 저는 남군이었습니다. 전 당신이 보초를 서고 있는 걸 보고 결심했지요. 오늘밤 이자는 내 손에서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저는 당신을 향해 총을 겨냥했지요. 환한 달빛 아래 서 있는 당신을 컴컴한 가운데 숨어 있는 제가 해치운다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였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아까처럼 당신은 눈을 하늘을 향해 돌리고 노래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자연스럽게 방아쇠를 당기려던 손가락을 빼고는 당신의 노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지요. ‘이 놈은 언제든 죽일 수 있어. 내 총알이 빗나갈 리는 없지.’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때 당신은 당신이 바로 조금 전에 부르신 그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선한 목자 구세주여 항상 돌봐주시고 선한 목자 구세주여 항상 인도합소서.” 그 찬송의 가사는 저의 지난날의 추억들을 되살려 주었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이며 하나님을 경외하셨던 어머니를 생각하게 만들었지요. 어머니께서는 종종 그 찬송을 나에게 불러주시곤 하셨는데 하지만 너무 빨리 돌아가셨습니다. 아직도 살아계셨다면 내 인생에 있어서 정말로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당신의 찬송이 끝났을 때 저는 당신을 향해 총을 겨눌 수가 없었습니다. 이 남자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라면 위대하시고 강하시다고 저는 그때 생각했지요. 그리곤 저의 팔은 저절로 옆으로 힘없이 떨구어졌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기대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복된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을 또한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며 승리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도우시는 그 도우심은 단순하게 육신적으로 위험에서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의 최종적인 목표는 영육이 구원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또한 사모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구원 받아 천국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벧전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구원이 우리들 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하나님을 기대하고 바라고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엡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고 바라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에 나가 직분도 받고 봉사도 하고 열심히 예배는 드리지만 이와 같은 궁극적인 하나님의 목표인 구원에는 관심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생활을 하며 인본주의와 육신적인 유익만 추구하는 그릇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듭나야 하고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구원 받고 천국으로 가는 것은 인간의 그 어떤 노력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독생자 예수님의 피로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으로만 가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오늘 하나님의 이와 같은 구원을 기대하고 기다리고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거나 하나님을 찾아서는 결코 하나님의 진정한 은총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들이 그릇된 종교생활로 만족하라고 예수님께서 그 무서운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쏟아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무서운 죄를 해결하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을 담보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들을 능히 천국으로 인도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이름은 엄청난 능력을 의미하는 엘로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늘의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복된 구원을 사모하고 기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롱펠로우가 보잘 것 없는 종이 한 장을 들어 그 위에 시 한편을 쓰면 최소한 6천 달러의 값어치를 가지게 되는데 이것은 그가 지닌 천재적인 재능 때문입니다. 빌 게이츠가 한 장의 종이 위에 그의 사인을 하면 백만 달러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데 이것은 그가 억만 장자이기기 때문입니다. 화폐제조공이 금 위에 프렌클린의 얼굴을 새겨 넣고 찍어내면 100달러의 값어치를 가지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돈이기 때문입니다. 기계공이 5달러의 재료를 가지고 50달러의 가치를 지닌 상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은 그의 기술 때문인 것입니다. 미술가가 불과 50센티의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면 수 만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예술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찮고 죄 많은 우리 인간을 들어 그리스도 예수님의 피 안에서 깨끗케 하시고 그의 영을 불어 넣어주시면 이것은 인류에 대한 축복이요 만고불변의 구원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이 구원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구원을 구하고 또한 기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이처럼 엎드려 눈물로 구원을 호소하고 하나님은 반드시 나와 우리 자녀들을 구원해 주실 거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기대하는 성도들을 만나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는 오로지 거듭난 영혼만이 사모하는 아름다운 부산물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기대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그 누가 하나님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1불짜리 복권이 수천만 불의 황금이 될 것은 기대하고 꽝이 되는 순간까지 일장춘몽에 젖지만 하나님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축복의 대명사가 되었던 성군 다윗은 이와 같은 오늘 우리들의 현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우리들에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기대하면 땅을 차지하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시37:9)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가슴에 품고 새로운 축복의 3월을 기대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땅을 차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이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기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 자신과 우리들의 자손들의 내일을 위해서 말입니다. 미리 인생을 살아보고 복되고 후회 하지 않는 멋있는 길이 있다고 소개해도 우리는 귀를 기울이고 인생의 행복을 위해 그 길을 추구해 볼 것입니다. 하물며 하늘의 하나님께서 옳고 복된 길이라고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시는 데야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귀가 열려야 하겠고 어린 아이와 같이 단순하게 순종하고 따르는 영혼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길이 바로 영적인 사람을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귀한 날 3월 첫 번째 주일에 예배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거룩한 성전으로 올라오신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바로 이와 같은 말씀으로 복을 받고 땅을 차지하는 그런 소중한 은총을 누리시게 되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8년 3월 4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