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20일 주일낮설교 (예수님을 배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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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20 May 2018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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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배우라!
스승의주일
5. 20, 2018
本文:마태복음11:25-30
說敎:崔 仁 根 牧師
이 땅에서 부모님 다음으로 소중한 분은 누가 뭐래도 스승이십니다. 그래서 “수레의 두 바퀴를 부모라 치면 이끌어 주시는 분은 우리 선생님”이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스승은 우리들의 인생 여정을 이끌어 주시는 소중한 분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은 이와 같은 좋은 스승을 모시고 살아가는 제자들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구약의 사사시대와도 같이 저마다 자기의 소견에 유익하도록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회개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떠나 진정한 스승이신 예수님께로 다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인류 역사상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승리하지 못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들도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예수님의 제자라 일컬음을 받는 그런 멋진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선생님이라도 선포해 주셨습니다.
(요13:13-14)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우리 예수님은 죄인 된 우리들을 위해 기꺼이 스승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스승님으로서의 발자취를 순종하며 따르기를 명령하고 계십니다. 스승을 따라 순종하고 배우는 제자들이 잘못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귀한 스승이신 예수님을 배우고 그 스승에 제자다운 멋들어진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우리 예수님의 무엇을 배우고 따라야 하겠는지 함께 공부하면서 그 길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배우라!
오늘 본문은 우리들의 영원한 스승이 되시는 예수님은 어떤 성품과 어떤 모습으로 우리들을 인도하시는지에 대한 자세한 해답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함께 배우면서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회복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복음서에서 우리들이 가장 기묘하게 느껴지는 하나의 모습은 바로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잘 믿지 못하는 빌립에게 하신 한 말씀을 곱씹어 보면 예수님이 과연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요14:9-11)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여기에서 우리 예수님은 자신이 하는 일을 보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서에서 성경에 기록된 이적과 기적만도 무려 37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심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신성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이러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빈번하게 하시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조용한 밤에 혼자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마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막6: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눅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언제나 기도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그 모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친히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마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요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살전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이제는 거룩하신 스승의 기도를 본 받아 기도하는 제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서울대학교 자연대 생명과학부 정학성 교수(경기고 61회)의 간증입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손을 잡고 교회에 다녔던 나는 이렇다 할 체험과 간증도 없이 평범하고 순탄한 신앙생활을 해왔다. 하나님은 항상 나의 편이며 나의 보호자로 믿으며 바리새인들처럼 잘 훈련된 그러나 타성에 젖은 안이한 신앙 속에 안주해 왔다. 나는 습관적인 일과로서 곧잘 기도를 해 왔으나 기도의 능력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기도의 능력을 긍정하지도 않았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기도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명하신 것이므로 단순한 의무 정도로 알고 있었다. 특히 “겨자씨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산이라도 옮길 수 있다”는 마태복음 17장의 말씀은 과학적인 지식과 합리적인 사고방식에 젖어온 나에게는 항상 큰 도전이 되어왔다. 이와 같은 도전은 아마도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마호메트는 자신이 산을 명하여 움직이겠노라고 제자들에게 공언하였다. 마호메트는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산을 명하여 오라고 하였으나 산이 오지를 않자 “내 스스로 산에 가리라”하면서 산을 향하여 나아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Mohammad and the mountain(사기꾼)이라는 숙어까지 낳게 한 유명한 고사이다. 아마도 마호메트는 성경의 문구를 문자 그대로 믿은 것 같다. 물론 성경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다. 변한 것은 다만 시대에 따른 기도의 응답 형태인 것이다. 미국 교회의 어느 목사님도 이 말씀으로 큰 도전을 받던 중 교회 앞을 가로막는 언덕을 옮겨달라고 회중들 앞에서 기도를 드렸다. 성도들도 목사님의 기도가 과연 올바른 것인지에 대하여 시험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토목 건축기사가 목사님을 찾아왔다. 대형 공사를 하는데 교회 앞의 언덕에 있는 흙을 쓰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그것도 무상이 아니라 돈을 주고 흙을 사가겠다고 하였다. 교회 앞의 언덕은 목사님의 기도 그대로 옮겨지고 교회 마당은 주차장과 잔디로 쓰이게 되었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목사님의 기도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응답되었다.
나에게도 기도의 능력이 얼마만큼 큰 것인가를 몸소 체험하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는 천국 문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도뿐이라는 것을 나에게 명백히 가르쳐 주었다. 하나님은 참으로 관대하시고 넉넉한 분이시며 현재 나에게 아들 셋을 주셨다. 그러나 원래 나에게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있었다. 이 딸은 여성적인 취향이 적지 않은 나에게 보배 같은 존재였고 내가 필요이상으로 아끼는 아이였다. 이 아이는 내가 미국 테네시 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기간인 1983년 어느 봄날 동네 아이들과 철로변의 개나리를 꺾으러 나갔다가 그만 기차에 부딪혔다.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고 아이는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20미터 전방으로 날아가 철로변의 자갈밭에 떨어졌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아마 박살이 났을지도 모르는 이 아이의 몸은 상처하나 없이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아이는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심한 내부 출혈과 복합 골절로 의사들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두 시간 만에 숨을 거두었다. 아이의 얼굴은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방금 잠이 든 것처럼 평온한 모습이었다. 이 사건은 나의 가정을 돌풍처럼 휩쓸었고 그간 고이 간직하여온 나의 신앙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오랫동안 신음과 탄식 속에 누워 있었고, 하나님의 섭리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 방황과 좌절 속에서 지냈다. Choo-choo를 유난히 좋아하던 아이에게 장난감 기차 하나 제대로 사주지 못했던 사실이 한없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낮에는 망상으로, 밤에는 악몽으로 시달렸으나 다만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일로 위안을 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속에 보니 사내 아이 셋이서 해변을 뛰어 다니며 놀고 있었다. 하늘은 더없이 맑고 바다는 더없이 푸르러 마치 생시에 보는 것 같았고, 아이들은 벗은 몸으로 천진난만하게 뛰어 노는데 자세히 보니 그 중에는 우리 집 사내아이도 함께 있었다. “같이 있는 저 아이들은 대체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미치는 순간 꿈에서 깨어났고 깜짝 놀라 한참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아이들의 모습은 간데없었다. 이 꿈은 나의 마음에 이상한 감동을 주었다. 이 일이 있은 뒤 나에게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나의 마음속에 억제할 수 없는 위로와 기쁨의 파도가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 주지도 않았고 내가 청하지도 않았건만 이 마음속의 평안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세월이 지나고 해가 바뀌어 하나님께서 이 꿈을 우리 가정에 친히 이루어 주셨다. 데려간 아이 하나를 갚기 위하여 “아들 쌍둥이”를 우리 가정에 허락하여 주신 것이다. 자상하신 하나님은 나의 조급한 마음을 아시고 주실 아이들을 꿈속에서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나의 가문에도 없던 일을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리고 값없이 주신 것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두 아이를 주신 것이다. 돌이켜보니 세상 학문으로 마음이 둔해지고 영의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뜻을 분간하지 못했던 내가 오히려 부끄러워졌다. 하나님의 뜻은 나의 마음으로는 짐작할 수도 없는 높은 곳에 있었고 내가 자포자기에 빠져 자리에 누워 있을 때 꿈을 통하여 나의 귓가에서 친히 응답하시며 가까이서 속삭이고 계셨던 것이다. 바울도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전1:21)고 하였고 인간의 제한된 지식과 지혜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세계를 도저히 추구할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지금까지 항상 더디 믿으며 의심 많은 도마처럼 손으로 만져야만 믿을 수 있었던 나 자신을 반성해 본다.]
예수님의 온유를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명령하십니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와서 나를 배우라!”(마11:29)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실로 온유하신 분이십니다. 온유는 바로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인도하시고 오늘 우리들을 천국으로 이끄시는 가장 큰 성품이 바로 이 온유이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에게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배신자 베드로를 대하시는 모습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모습을 너무나도 극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26:48-50)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여기에서 우리는 배신자 유다를 대하시는 우리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고연 이 세상에서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또한 자신을 세 번 씩이나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고 떠나버린 베드로를 부활하시자 말자 바로 찾아가시고 밤새 물고기 잡으며 허기진 그들의 배를 손수 마련하신 조반으로 먹이시던 사랑은 바로 온유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그러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도 나의 이 온유를 배우라!”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수님을 닮은 자들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시76:9)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셀라)
그리고 그렇게 온유한 자들을 찾아 하나님의 일꾼과 지도자로 세우고 한없는 축복으로 보상해 주시는 것입니다.
(민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시37:11)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마하트마 간디(M. Gandhi)는 키가 5척 밖에 되지 않는 볼품없는 모습에 무명옷을 입고 생활했지만, 그는 그의 유명한 '무저항주의'를 통하여 인도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했습니다. 1930년 3월 12일, 그를 따르는 온유한 무리들은 이른바 '소금의 행진'이라고 하는 시위를 했습니다. 소금 전매 법을 반대하며, 소금을 만드는 곳을 향하여 인도의 독립을 외치며 나아갔습니다. 그는 수차 투옥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암살까지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늘 하나 들어보지 않고, 돌 하나 던지지 않고, 3백 년 동안 지배하고 있던 영국으로부터 인도를 독립시키고야 말았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온유한 자의 마음에 평화가 깃듭니다. 새로운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주시는 축복인 것입니다.
이이솝 우화집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바람과 해가 어느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시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바람이 나섰습니다. 그가 아무리 센 바람을 불게 했어도 바람은 그 사람의 외투를 벗길 수가 없었습니다. 바람이 세차면 세찰수록 그 사람은 더욱 외투를 여몄습니다. 그 다음에는 해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해는 구름을 벗기고 따뜻한 햇볕을 내리쬐었습니다. 외투를 입고 가던 사람은 '웬 날씨가 이렇게 더워."하면서 외투를 벗고 벗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온유의 놀라운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점령합니다. 온유한 사람이 땅을 정복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기업을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들의 영원한 스승이 되시는 예수님의 또 다른 성품은 겸손입니다. 이는 성경이 증거하는 바로 예수님께서 자신을 고백하신 예수님의 너무나도 아름다운 성품입니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겸손은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성품입니다. 그것은 그것이 예수님을 닮은 타락한 인생들의 변화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가장 미워하십니다. 이는 마귀를 닮은 악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잠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겸손에는 반드시 보상하시고 교만은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친히 자신의 겸손을 배우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 길이 바로 축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시10:17)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시22: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 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시147:6)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는 붙드시고 악인은 땅에 엎드러 뜨리시는도다
(잠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는 말씀들은 한결 같이 하나님께서 겸손을 얼마나 좋아하시고 축복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폴란드의 세계적 천문학자, 지동설 주장자였던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 때문에 사형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비문에, "주 하나님, 저는 베드로에게 베푸셨던 은혜를 원치 않고, 바울에게 베푸셨던 자비를 원치도 않습니다. 다만 주님 십자가상에 함께 못 박힌 오른쪽 강도에게 베푸셨던 긍휼을 원하나이다."라고 쓰도록 부탁하였다고 합니다. 억울한 죽음에 원망도 있을 법 한데 그는 이렇게도 감격하며 주님께 기도를 드렸으니 겸손의 극치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겸손하니 죽으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들려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프랑스의 종교 개혁자 칼빈과, 도이취의 종교 개혁자 루터는 평생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학적 이론으로나, 정신적 태도로나 서로 가까운 처지였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접촉은 그들의 공통된 친구를 통해서 성립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둘 사이를 악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칼빈의 성만찬 논문에 루터의 견해를 비판한 것이 있었습니다.”고, 루터에게 지적해 말했습니다. 그러자 루터는 비상한 관대성을 가지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금후에 칼빈이 우리에 대하여 더 잘 생각해 줄 날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든 간에, 지금도 그는 우리들이 그에 대하여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칼빈은 너무나 감격하여 그 친구 파렐(Farel. G.)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런(루터의) 겸손에도 감동할 줄 모른다면, 우리는 확실히 돌로 만든 사람일 것 입니다. 나 자신은 이 말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칼빈은 뒤에 루터에게 편지를 보낸 일이 있는데, 그때 루터에 대하여 “나의 지극히 존경하는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렇듯 겸손과 그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었기에 금세에 보기 드는 놀라운 종교개혁을 이루었고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바로 설 수 있도록 놀라운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에게로 와서 나의 겸손을 배우라!”고 말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2018년도 스승의 주일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은 존경할 스승도 없고 사랑할 제자도 없습니다. 저마다 제 소견에 좋을 대로 살고 유익을 따라 살아가는 안타까운 세태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우리들의 영원한 스승이시며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이 시대에 이와 같은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은 진정 복 받은 분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차제에 走馬加鞭(주마가편)으로 스승의 주일을 맞아 다시 한 번 더 강조해 드립니다. 평생을 두고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는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 길은 그 스승께서 친히 보여 주신 온유와 겸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서 온유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조금은 더 따뜻하고 조금은 더 순종적인 그런 삶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진짜로 이 시대에 겸손한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습니다. 모두가 다 자기가 잘났습니다. 조금은 더 겸손했으면 좋겠습니다. 일단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교만한 자들을 매우 싫어하시고 우리 이웃들도 교만한 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온유와 겸손으로 옷 입고 예수님을 쫓아갈 때 가장 먼저 하늘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이웃들이 칭찬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으로 스승 되시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귀한 날 스승의 주일로 거룩한 성전에 올라와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이처럼 좋은 스승을 모시고 온유와 겸손으로 변화를 받아 하늘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축복으로 행복을 누리시게 되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주후 2018년 5월 20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