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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8년 4월 1일 주일낮설교 (다시 살 수 있다면!)

2018년 4월 1일 주일낮설교 (다시 살 수 있다면!)

다시 살 수 있다면!

부활주일

4. 1, 2018

本文:요한복음11:17-27

:

메뚜기와 하루살이가 하루 종일 논에서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날이 저물자 메뚜기는 하루살이에게 말했습니다. ", 이젠 저녁이 다 되었어.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또 놀자." 이 말을 들은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물었습니다. "메뚜기야, 내일이 뭐니? 어떻게 내일 또 놀자고 하니?" 메뚜기는 잠시 후면 하늘에 별들이 반짝이고, 모든 동물이 다 잠을 자게 되는데 잠자는 이 밤이 지나면 내일이 온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살이는 내일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메뚜기를 향하여 날씨가 무더워져서 메뚜기가 정신이 나갔나보다고 놀렸습니다. 그 후 메뚜기는 개구리와 온 여름을 함께 놀았습니다. 가을이 오고 날씨가 차가워지자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메뚝아, 내년에 만나 다시 놀자." 메뚜기는 내년이 뭐냐고 개구리에게 물었습니다. 개구리는 흰 눈이 천지를 뒤덮고 얼음이 얼고 몹시 추워서 모든 개구리가 땅 속에 들어가서 오래오래 겨울잠을 자고 나면 다시 따뜻한 봄이 오는데 그 때가 내년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러나 메뚜기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개구리를 보고 날씨가 서늘해지니 정신이 나간 모양이라고 놀렸습니다. 하루살이나 메뚜기는 내일 혹은 내년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일이나 내년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내일이나 내년이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일이나 내년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세나 하나님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그 세계를 경험하지 못했기에 그 세계를 쉽게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과 하나님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는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부활도 半信半疑(반신반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죽어도 반드시 다시 살아난다고 말입니다.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래서 믿음입니다.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다는 믿음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하루살이와 메뚜기와 같이 경험하지 못했으므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상대방이 이상하게 된 것으로 판단한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나 다시 살 수 있다는 부활신앙은 우리 믿음의 마지막 종착지입니다.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들의 모든 믿음도 결국은 헛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고전15:14-18)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부활신앙은 믿음의 마지막 선언이요 인간 삶의 마지막 소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다는 이 믿음으로 주어진 우리들의 삶을 신령하게 승리하는 진정한 멋쟁이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어도 다시 산다는 확신이 있다면 우리 인생은 참으로 놀랍게 변화 될 것입니다.

다시 살 수 있다면!

고난주간은 매년마다 우리들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고난을 그때마다 늘 전하고 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우리들에게는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부활주일은 사람이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진리를 듣고 배우는 계절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친히 그렇게 죽으시고 다시 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들의 믿음의 기본으로 삼고 우리들도 또한 그렇게 다시 살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자신의 일생을 두려움 없이 담대하고도 당당하게 살아갔던 것입니다.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는 이렇듯 죽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그에게는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이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진정으로 죽어도 다시 산다는 부활의 확신이 있어야 제대로 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살 수 있다는 부활신앙으로 무장된 성도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그 해답을 성경 속에서 함께 찾아보면서 진정한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두려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시시때때로 우리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그만큼 우리들이 생활 속에서 두려워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말씀부터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10:19)

가로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그가 이같이 내게 말하매 내가 곧 힘이 나서 가로되 내 주께서 나로 힘이 나게 하셨사오니 말씀하옵소서

(10: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대충 이러한 말씀들이 우리 곁에 머물고 있습니다. 한결 같이 하나님은 명령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을까요? 여러 가지로 두려워해야 할 일들이 많겠지만 최소한 우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아마도 죽음일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 죄에 대한 형벌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 죄가 흉악 할수록 형벌은 더욱 더 가혹할 것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형벌은 사형입니다. 사람을 수없이 죽인 살인마라도 법정에서 마지막 형이 선고될 때 사형이라고 하면 그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떤다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사실은 이처럼 잔악한 범인에게도 두려움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이처럼 죽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생명을 가진 존재라면 그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는 가장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 죽음보다 더 두렵고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생일케익에 꽂혀 있는 촛불처럼 후- 불어서 불을 껐는데도 잠시 후에 다시 살아나서 타고 있는 것처럼 우리 생명도 죽였는데 잠시 후에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과연 지금 우리들이 느끼는 것처럼 죽음이 그렇게 무서울까요?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데 왜 무섭겠습니까? 오히려 잔인하게 죽이는 자를 조롱하듯 당당하게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더욱 더 강인하게 버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부활이란 이와 같이 죽여도 다시 살고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할 때 쓰는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더할 수 없이 잔인하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끌고 가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2:22-24)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위의 말씀 중에서 밑줄 친 부분을 다시 한 번 더 음미해 보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습니다. 사람을 그것도 살아 있는 사람을 어떻게 못을 박아 죽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은 예수님을 다시 살려 내셨습니다. 한 마디로 승리지요! 그것도 결정적인 승리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 보다 무서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을 더할 수 없이 가장 잔인하게 죽여 버렸는데 그 사람이 버젓이 다시 살아나왔다면 그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그렇게 당당하게 다시 살아나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만 천하에 선포하고 고백하는 계절이 바로 부활절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만이 그렇게 다시 사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그 예수님께 붙어 있는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엄청난 비밀이요 전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요 기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친히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엄숙하게 물으십니다.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고 말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의 이와 같은 질문 앞에 당당하게 아멘할 수 있는 신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화답할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삶에 그 어떤 것도 우리들을 두렵게 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의 삶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두려움을 쫓아버릴 수만 있다면 우리는 비로소 천국과 같은 멋들어진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영굴 덜햄(Durham)지방에 석탄광이 있는데 전에 그 탄광이 무너져 164명의 광부들이 생매장을 당하였습니다. 그때 구조작업을 하던 중 촘촘히 글이 쓰여 있는 판자때기 하나를 시체와 함께 발굴하였습니다. 그 판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주여, 축복하소서. 우리는 대단히 유쾌한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영원한 영광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 날 주님과 함께 같이 다시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화요일 오후2." 그들은 부활과 영생을 믿고 그렇게 떠났던 것입니다. 비록 그들은 뜻하지 않은 사고로 떼죽음을 당하였지만 그들의 부활신앙은 이렇게도 죽음을 넘어 담대하고 평안한 마지막 순간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마지막 삶의 고통에서 이렇듯 해방을 주고 자유를 주고 평안을 주어야 제대로 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제는 이처럼 확실한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신앙으로 깊은 탄광 속에서 죽어갔던 이름 모를 성도들과 같이 진정한 평안을 누리며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품안에 머물기를 소망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강하고 담대함으로 승리하게 됩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 신자들이 죄와 두려움에서 자유 할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에서 해방 될 수 있도록 죽음을 몸소 실천하시고 부활하여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들의 영원한 생명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로 하여금 그 주님을 따라 천국까지 승리하고 살아가도록 친히 길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선포해 주셨습니다.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들을 억압하고 누르고 두렵게 하는 모든 세력들을 당당하게 이겨내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길은 바로 소극적인 두려움을 물리치고 적극적인 담대함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을 지으시고 이 세상을 살아가도록 하신 방도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1:26-28)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이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는 이 엄청난 축복과 명령을 이루어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우리들을 죽일 수도 있는 그 모든 요인들을 다시 살 수 있다는 부활신앙으로 극복하고 당당하게 정복하고 다스리며 굳게 서는 길밖에 다른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온갖 염려와 근심과 걱정과 불만과 반목과 미움으로 동지를 적으로 만들고 오로지 자신만의 유익을 추구하며 그렇게 초라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신선한 롤 모델을 한 사람 세워 주시고 우리들로 하여금 그를 따라 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그 모델이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1:1-9)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 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고 곱씹어 보면 두려움을 물리치고 담대하게 승리하는 모든 비법이 이 말씀 속에 깊이깊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담대해야 합니다.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당당하게 이겨야 합니다. 그 이유는 죽음을 정복하신 엄청난 능력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미도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모세를 통해 입증해 주셨고 그것을 모세의 후계자로 세우신 여호수아에게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그 엄중하시고도 분명하신 말씀을 되새겨 보도록 보겠습니다.

(1: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 오늘 우리들을 강하고 담대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함께 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은 바로 우리들이 읽고 듣고 묵상하는 말씀 속에 계신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십니다.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초라하고 무능하고 자신밖에 모르는 그런 작은 자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다는 부활신앙으로 이처럼 담대하고 강하고 말씀으로 무장하여 만사형통한 삶을 만들어 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오늘 우리들을 살리시려고 몸소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더 큰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미국 보스턴 교외에는 골든 코넬이란 신학대학원이 있습니다. 이 코넬 신학대학원이 세워진 배경은 오늘 우리들에게 많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시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럿셀 코넬이라는 지휘관이 있었는데 전쟁이 불리하게 되자 후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휘관이 그 와중에 그만 자신의 指揮刀(지휘도)를 버리고 오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수치스럽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코넬 대령은 아무도 모르게 링이라는 작은 소년을 시켜서 그 칼을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이 소년은 목숨을 걸고 적진 속에 들어가 칼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과정에서 그만 적의 총에 맞고 말았습니다. 코넬이 머물고 있는 천막에 돌아와서 간신히 칼을 바치고는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눈을 감을 때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친구이기 때문에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어린 소년은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지켜본 무신론자였고 회의주의자였던 코넬은 어린 소년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 주여, 이 어린이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여, 이 어린이가 고백하는 하나님이 참으로 나를 죽어도 다시 살리시는 그런 하나님이시라면 그 하나님을 위해서 저도 이 한 몸을 바치겠습니다.'고 결단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전 재산을 다 털어서 하나님의 제자들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 학교가 바로 골든 코넬 신학대학원이었던 것입니다. 코넬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다시 Temple University를 세워서 수많은 지도자를 양성해 냈습니다. 어린 소년 링의 죽음은 불행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인해서 코넬 대령에게는 새로운 생명이 움트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의 면류관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관의 명령을 따라 강하고 담대하게 한 목숨을 내 놓았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도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내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막연하고 추상적인 신앙생활을 넘어서 이제는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다는 강력한 부활신앙으로 고넬과 같은 위대한 역사를 이 땅에 이루어 놓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해 살겠다는 담대한 결단입니다. 할렐루야!!

자족하며 만족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죽어도 다시 산다는 확신으로 두려움을 내어 쫓고 강하고 담대하게 이 세상을 정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부활신앙의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성도들은 환경을 탓하거나 남을 탓하는 등의 어리석고 초라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모델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인생의 대전환을 만들었을 때 가장 그를 괴롭히고, 심지어는 죽이려고 까지 혈안이 되었던 사람들이 다름 아닌 동족들인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유대인들로 인하여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고후11:23-27)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오로지 부활하신 주님 때문에 당한 개인적인 고난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 누구를 원망하거나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산 그의 삶에는 보통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그만의 독특한 삶의 철학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自足(자족)이라는 놀라운 비밀이었습니다.

(4:11-1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도 귀한 두 절의 말씀 가운데서 사도 바울의 놀라운 사도다움의 단어를 발견 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배웠다는 말입니다. 그는 자족하기를 배웠고 또한 풍부와 궁핍에 처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성경 전체에 사도 바울이 배운 이와 같은 자족을 논하는 大人(대인)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신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그 많은 위대한 인물들 중에 사도 바울 만큼 부활에 탁월한 식견과 믿음을 가진 인물도 없습니다. 아울러 부활신앙인 만이 배우고 익히고 살았던 자족의 삶을 또한 사도 바울처럼 살아간 사람도 또한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와 같은 자족하는 신앙을 본 받고 배우기를 원합니다. 진정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우리 또한 죽어도 다시 살 성도라면 사도 바울과 같이 자족하는 삶의 비결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없는 부활신앙은 논할 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부활신앙의 최고봉인 자족할 줄 아는 성도는 삶도 죽음도 초월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진정한 영적인 성도들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한 세기에 가장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Chartre)19803월에 불란서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 폐수종으로 입원했습니다. 그는 한 달 동안을 이 병원에서 발악하며 보냈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찾아온 사람들을 향하여 고함을 치며 절규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지 곁에 있는 아내에게조차 묻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현대인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자유라는 수많은 수필과 글을 남겼지만 그의 마지막은 실로 비참했습니다. 그는 1980416일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몹시 괴로워하다가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불란서의 신문들은 샤르트르의 죽음에 대하여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에 대해서 어떤 독자는 이렇게 신문에 투고했습니다. “샤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샤르트르에게 돌아갈 본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샤르트르에게는 진정으로 돌아갈 고향이 없었습니다.

반면 독일 고백교회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 훼퍼(Dietrich Bonhoeffer)는 세계 대전 중에 독일의 수용소에서 나치에게 항거하다가 투옥되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간수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는데 그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자기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감방에 있던 자기의 동지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동지 여러분! 이제 나에게는 죽음이 왔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고 시작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예비하신 아버지의 집에서 만날 때까지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마지막 인사를 하고 감방을 나서는 그에게는 놀라운 평안과 기쁨이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그 감옥에 있었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충격과 감동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본 훼퍼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돌아갈 본향이 있고 죽어도 다시 살 소망이 있는 성도들은 죽음도 자족하며 맞을 수 있는 담대함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 하셨느니라

는 말씀이 있기에 부활신앙을 소유한 성도들은 죽음조차도 초연하며 두려운 삶 속에서도 자족하는 여유와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2018년도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절은 단순한 절기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과 믿음의 가장 소중한 본질을 고백하고 되새기는 계절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에 확신이 없다면 헛된 믿음이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엉터리 신자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절을 우리 나이만큼이나 많이 맞이하였지만 우리는 여전히 부활에 반신반의 하면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에 직접적인 역사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도 육신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영적으로 거듭나 영적인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그 누구나 죽음을 가장 무서워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늘 살았으나 죽은 자와 같이 비겁하고 두려움에 떨며 소중한 인생을 불안과 근심 걱정으로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근본이 흔들리고 두려움에 젖어 있으니 이 세상을 정복하기는커녕 늘 그 무엇엔가 지배를 당하며 그렇게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으로 무장하게 되면 이와 같은 고질적인 우리들의 육신의 한계를 단방에 달려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아니라 우리들을 다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부활의 계절에 우리 믿음을 한 계단 더 업그레이드(Upgrade) 시켜 소망찬 영적인 자들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단번에 살려 내시던 우리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도 우리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귀하고 복된 2018년도 부활주일을 맞아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며 부활의 주님을 모신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841

부활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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