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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8년 5월 27일 주일낮설교 (주변 사람들)

2018년 5월 27일 주일낮설교 (주변 사람들)

주변 사람들

5. 27, 2018

本文:출애굽기14:10-14

:

 

한번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과 사랑에 빠져 8년간 20억 원에 달하는 돈을 보냈다면 믿을 수 있을까요? 홍콩의 금융회사에서 매니저로 일하는 40대 여성 A씨는 8년간 사랑이라고 굳게 믿었던 미몽에서 깨어나 뼈아픈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 A씨는 2010년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에서 한 영국 남성을 알게 됐습니다. 자신을 영화감독이라고 밝힌 이 백인 남성의 매너 있고 센스 있는 말투와 재치 넘치는 유머 감각에 A씨는 이내 푹 빠져버렸습니다. 온라인 데이트를 한지 석 달 뒤, 이 남성은 갑자기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며 1만 홍콩달러(140만원)를 보내달라고 A씨에게 부탁했습니다. 30만 파운드를 지니고 말레이시아에 갔다가 관련 법규 위반으로 구금돼 벌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A씨는 아무 의심 없이 말레이시아의 계좌로 돈을 보내주었습니다. 이후로도 이 남성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돈을 보내달라고 부탁했고, A씨는 그때마다 매번 돈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렇게 8년간 A씨가 이 남성에게 보낸 돈이 무려 1400만 홍콩달러, 우리 돈 약 20억 원에 달했습니다. 보낸 횟수는 200번 이상이 되었습니다. 여유자금을 넘어서 본인의 전 재산을 다 써버린 A씨는 이 남성의 계속되는 돈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가족과 친구들에게까지 손을 벌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가족들이 그 남성이 사기꾼이 아니냐며 의심했고,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린 A씨는 지난달 경찰에 신고를 했습니다. A씨의 사례처럼 온라인 로맨스 사기가 홍콩에서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며 사우스 차이나 모닝포스트(SCMP)가 지난 22일 보도했습니다. 홍콩 경찰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경찰에 신고 된 온라인 로맨스 사기 피해액은 모두 7590만 홍콩달러로 한국 돈 106억 원에 달했습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배 이상으로 늘어난 수치라고 했습니다. 지난 달 A씨가 피해를 신고한 뒤에도 이달 들어 또 다른 여성 2명이 총 800만 홍콩달러(11억 원)의 피해를 신고했습니다. 올해 들어 5개월 동안 피해액이 이미 지난해 전체 피해액을 넘어섰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주변 사람들로 인해 이처럼 어리석은 피해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가정의 달을 마지막 보내면서 항상 소중하게 함께 살아가는 우리 주변 사람들은 과연 어떠한지 점검해 보고 우리들은 또한 우리들의 주변 사람들에게 어떠한 존재인지 살펴보면서 진정한 인간관계를 통한 행복한 내일을 기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변 사람들

오늘 본문은 모세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짧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다행히도 주변 사람들을 잘 만나게 되면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나 불행하게도 주변 사람들을 잘 못 만나게 되면 불행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주변 사람들로 인해 위대한 인물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를 받았는지 함께 살펴보면서 좋은 주변 사람들을 만나도록 힘쓰고 우리들도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인물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겠습니다.

모세와 그 주변 사람들

모세는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로 탁원한 믿음과 지도력으로 한 평생을 풍미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변 사람들을 잘 못 만남으로 인해 불행한 최후를 맞았던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만난 사람들은 과연 어떠하였는지 성경에서 직접 그들을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14:11-12)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출애굽 시킨데 대한 극단적인 원망입니다. 출애굽 한 그들 앞에 거대한 홍해가 가로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이와 같은 원망은 이해가 가는 일리도 있습니다. 죽는 것 보다는 고생하더라도 사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육신적인 생각의 한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판단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모세는 원망하고 절망하고 있는 그들에게 담대하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고 말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 계신다면 우리는 당연히 원망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낙심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선민이라고 불러 주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세를 원망 할 것이 아니라 모세와 함께 문제를 극복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그들은 모세를 배격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며 사사건건 불신으로 일관하는 우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광야에서 다 죽임을 당하였고 그들의 지도자 모세도 또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20:3-5)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가로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면 좋을 뻔 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이렇듯 끊임 없이 모세를 원망하며 고통을 주자 마침내 모세가 자제력을 잃고 하나님 앞에서 허물을 들어내고 말았습니다.

(20:10-12)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모세가 이처럼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 채 화를 내며 반석을 친고로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으로 하여금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고 말았습니다.

(32:49-52)

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산에 올라 느보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네 형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어 그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나의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연고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네가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리하여 모세는 무려 40년이란 긴 세월을 고생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나왔으나 결국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를 못한 채 혼자서 쓸쓸히 느보산으로 올라 거기에서 생의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잘 만나지 못한 모세의 일생은 이렇게 하여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부정적인 백성들을 만나 평생을 시달렸던 그의 인생도 이처럼 그 마지막 순간에 다 망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감정에 치우쳐 절망하고 원망하며 육신적으로 살아가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히려 영적인 신자가 되어 환경과 현실을 보지 말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내일을 기대하는 성도의 길로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Norman Cousins(노만 카즌-Saturday Review 편집장)1964년에 한 번 걸리면 500명 중에 단 한 명 정도만 완치 될 수 있다는 어려운 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모든 관절이 약해지는 희귀한 병으로 카즌은 처음에 목을 움직일 수 없게 되고 팔, 손가락 발가락 순서로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병상에서 그는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하고 많은 책을 읽어나갔습니다. 그러던 중 부정적인 생각은 질병을 더욱 악화시키게 되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는 질병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병원에 비치되어 있는 TV대신 코메디나 긍정적인 정서를 자아낼 수 있는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바꾸어 달라고 요청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 할 수밖에 없는 환자이기에 의사도 쾌히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 이후 그는 자신의 질병은 잊어버리고 웃을 수 있고 내일의 꿈을 가질 수 있는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소중한 시간들을 보내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뒤 그는 놀라운 자신의 몸의 변화를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움직일 수 조차 없었던 몸이 움직여졌고 고통으로 호소하던 몸에 고통이 사라졌던 것입니다. 의사도 믿을 수 없다고 할 만큼 카즌의 병은 호전되어 갔던 것입니다. 그 이후 그는 500명에 단 한 사람만이 완치 될 수 있을 정도로 완치율이 낮은 희귀병에서 완전히 해방 되었습니다. 그는 그 지독한 질병에서 해방 된 후 두 가지 소중한 진리를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우리 몸은 우리 몸 스스로 재생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과 또 다른 하나는 병에 걸려 있는 환자의 정신적 자세가 병을 호전시킬 수도 있고 악화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우리들의 영혼을 위한 신앙생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항상 원망하고 불평하며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반드시 망하게 되나 기뻐하고 기대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면 엄청난 축복과 기적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충고하고 있습니다.

(고전10: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고 말입니다. 하지만 성군 다윗도 우리들에게 소중한 진리 하나를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고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배우고 또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소극적이고 비 신앙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다윗과 같이 적극적으로 기뻐하며 심령의 소원을 이루는 아름다운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삶이 바로 그렇습니다. 할렐루야!

다윗과 그 주변 사람들

사람은 어려움을 당해보면 그 주변 사람들이 과연 어떠한지 알 수 있습니다.우리들이 고통을 당하고 실패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그와 같은 어려움을 통하여서 사람이 되게 하시고 또한 좋은 사람들을 붙여주셔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도 하십니다. 다윗에게는 참으로 많은 주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왕으로 모셨던 사울 왕은 실로 다윗에게는 엄청난 가시였습니다. 거대한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가 대적들을 물리쳤건만 백성들이 그를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로 그를 잡아 죽이려고 했으니 그 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은 그와 같은 환경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더 가까이 모셨고 그로 인해 더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고통의 때에 다윗과 함께 한 위대한 신하들을 많이 얻을 수 있었고 그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왕권을 곤고히 세우는데 초석이 되었던 것입니다. 태평성대 할 때는 따르는 사람이 많지만 실패하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면 다들 자신의 소욕을 위해 떠나기 마련인데 다윗에게는 600여명이 넘는 충신들이 변함없이 함께 하고 따르는 풍성한 인맥들이 넘쳐났던 것입니다.

(삼상23:13-14)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 다윗이 황무지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황무지 산골에도 유하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주변에 아무리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할지라도 어려움과 고통과 실패를 당하게 되면 거의가 다 떠나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고통의 때에도 떠나지 않고 함께 한다면 그런 사람들이야 말로 충신이요 충복이요 진정한 친구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충성스러운 인물들은 고통과 시련의 때가 아니면 결코 그 진실을 알 수도 없고 또한 만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실로 그와 같은 신실된 충복 600명이 있었기에 사울이 죽고 그의 왕권을 회복하여 왕 위에 올랐을 때에도 흔들림이 없는 위대한 나라를 굳건하게 세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실로 그에게는 그를 따르는 신실한 충복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배신자는 어느 때 어디에라도 있는 법이나 그 배신자로 인해 더욱 굳어지고 강해지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다윗은 온 몸으로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한 번은 다윗이 대적들에게 소중한 땅을 빼앗기고 평화로웠던 지난 날들을 추억하며 그곳에서 누렸던 행복을 회상하며 그곳 우물의 물을 마시기를 사모하는 탄식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신하 중 세 사람이 다윗의 그 소원을 들어드리기 위해 적진까지 목숨을 걸고 들어가서 다윗이 소원하는 그 우물의 물을 가지고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받은 다윗은 목이 메어 차마 그 물을 마시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부어드리고 말았습니다.

(삼하23:14-17)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블레셋 사람의 영채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다윗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하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 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다윗이 다윗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름 없는 이와 같은 위대한 충복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과연 어떤 주변 사람을 가졌는지요? 아니면 이와 같은 충복들이 되었는지요?

챨스 콜슨(Charles Colson)은 워터게이트 사건이 있기 직전에 닉슨 대통령의 특별 보좌역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 대통령은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고 콜슨 역시 감옥에 가야 했습니다. 후에 감옥에서 나온 콜슨은 한 대학에서 초청 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연설이 끝나고, 자유로운 질의응답 시간이 주어졌을 때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질문하기를, “워터게이트 사건이 있었을 때 닉슨 대통령을 끝까지 변호했던 이유가 뭡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콜슨은 그것은 닉슨이 저의 소중한 친구였기 때문입니다.”라고 한 마디로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이 날, 비록 정치적으로 닉슨 대통령의 행동을 비난하던 학생들도 챨스 콜슨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날 쏟아진 청중의 박수는 무엇을 의미하였을까요? 이 박수는 닉슨 대통령과 콜슨의 부도덕한 정치 행동에 대한 책임이 면제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려움을 당한 친구의 곁을 지킬 수 있었던 그 충성된 행동의 동기에 그 사람을 아끼는 우정이 있었다면 이것은 참으로 귀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도에게 원하시는 것도 바로 이렇게 사랑의 동기에서 이루어지는 충성입니다. 마태복음 511절과 12절을 보십시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핍박받는 사람에게 무조건 복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비웃음을 받으면서도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자리에 서 있다면,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이라면, 이 사람은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는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바울과 그 주변 사람들

사도 바울은 매우 특이한 삶을 산 사람입니다. 그는 당대에 자타가 공인하는 참으로 잘 난 사람이었습니다. 탄생의 배경이나 그가 취득한 학문으로나 종교적으로 그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직접 고백했던 그의 배경을 성경에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4-6)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는 말씀과 같이 그는 과연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최고의 학문을 연마했으며 당대에 누구도 쉽게 가질 수 없었던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했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180도 다른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그 모든 자랑할 만한 것들을 한 순간에 배설물과 같이 다 던져버리고 오로지 예수님을 전하는데 일생을 다 바쳤습니다. 그는 이것을 주님께서 주신 사명으로 알았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데 있어서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는 그의 고백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인생 여정에도 순탄한 일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한 그에게도 역시 악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죽이지 않으면 먹지도 아니하고 자지도 아니하겠다는 무리들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23:12-13)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의 큰 일을 하는 자들에게는 모세든, 다윗이든, 사도 바울이든 다 이렇게 악한 자들이 옆에서 괴롭게 하고 있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한결 같이 그들은 그와 같은 악한 인간들 때문에 위축 되거나 두려워하거나 가야 할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럴수록 더욱 함께 하시며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역사해 주신다는 확신이 있었고 또한 온 몸으로 친히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환경이나 주변 사람들 때문에 낙심하거나 주님과의 관계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단단히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더 좋은 사람들을 붙여주시고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역시나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주변에 악한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이라도 내어 줄 만큼 사랑하고 섬기고 함께 해 주는 너무나도 멋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브리스가와 아굴라였습니다. 그러므로 평생에 사도 바울은 그들을 잊지 못하고 성경에 기록하여 이 세상에 남겨 두었던 것입니다.

(16:3-4)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사도 바울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이라도 내어 놓을 만큼 충성스럽게 섬긴 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종들을 위해 목숨이라는 내어 놓을 정도로 섬기고 함께 해 보십시오. 그런 자들의 삶과 후손들은 반드시 하늘의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보면 일생을 바쳐 주님의 손발이 되어 헌신하는 주의 종들을 이렇게 섬기지는 못할망정 헐뜯고 욕하고 배척하며 고통스럽게 하는 악한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대를 이어가며 목회자와 교회를 고통스럽게 하는 가족들도 있을 정도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가슴에 품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주의 종들을 돕고 헌신하는 그런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같이 주의 종들이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런 아름다운 성도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축복하는 그런 인물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의 종들은 스스로의 삶을 위해 존재하는 분들이 아니라 사도 바울과 같이 자신의 삶을 접고 오로지 주님만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거룩한 하나님의 종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들에게 잘 하는 것은 곧 그들을 종으로 부르신 하나님께 잘 하는 것입니다.

저드슨(1788-1850)이라는 멋진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가 대학을 거쳐 신학교를 졸업하자 보스톤 시에 있는 상류층의 교회에서 부목사로 와 달라는 초빙을 받았습니다. 그의 동료 친구들은 모두 그러한 그를 부러워하였고 집의 어머니와 누이도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해외선교에 쓰시려고 부르셨습니다. 내가 이곳에 남아서 일을 해도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지만 나는 부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나는 주님께 전체로 순종하렵니다.” 이렇게 안일한 자리를 물리친 저드슨은 결국 철통같은 불교의 나라 버마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곳은 너무나도 어려운 곳이었기에 목숨을 바칠 각오로 일했으나 처음의 한 사람을 전도하여 세례를 베푸는데 무려 6년간의 갖은 고생을 다 해야만 했습니다. 저드슨은 오랜 기간을 버마의 감옥에서 지내기도 했고 죽음과 질병의 고비도 여러 번 넘겼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의 거룩한 헌신은 결국 5만 명이라는 크리스챤을 버마 땅에 탄생시키고 전 세계의 크리스챤들의 마음에 꺼지지 않는 영원한 횃불을 밝히 켜 놓았던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2018년도 가정의 달 마지막 주일입니다. 가정과 사회는 우리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데 토양과도 같이 소중한 요소입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 살 수 없고 더불어 얽히고설키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고까지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작게는 가족들과 함께 또 많게는 이웃과 사회와 나라와 세계에 연관을 가지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더불어 행복을 추구해야 할 주변의 사람들로 인해 오히려 불행해지고 더 힘든 삶을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평생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헌신하고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혼자서 쓸쓸히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잘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과 같이 멋들어진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목숨이라도 내어 놓고 순종하고 섬기고 충성하는 그런 인물들을 주변에 둘 수 있는 것은 인생 여정에 최고 최대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살려고 한다면 우리들이 먼저 그와 같은 충성스러운 일꾼들이 되어야 하고 우리들이 속한 구조 속에서 또한 그렇게 충성할 줄 아는 인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들도 그렇게 하려고 오늘 이처럼 마음을 다해 하나님 전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며 소중한 진리의 말씀으로 영혼의 양식을 삼고 있는 것입니다. 모쪼록 귀한 예배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섬기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이와 같은 삶의 가치와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고 이웃들에게 인정을 받는 그런 진정한 행복자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주후 2018527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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