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5일 주일낮설교 (일어나라 함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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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05 August 2018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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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함께 가자!
8. 5, 2018
本文:이사야60:1-7
說敎:崔 仁 根 牧師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반드시 삶의 전환기가 찾아옵니다. 이 전환기는 대개 고난과 시련을 수반합니다. 이때 고난과 시련을 잘 극복하면 새로운 삶을 출발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하면 그대로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나는 앉은뱅이 인생이 될 뻔한 자기의 삶을 새롭게 개척한 사람의 이야기를 신문기사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절벽산책>의 저자 돈 슈나이더입니다. 그는 미국의 한 지방 대학 교수였는데, 1992년 느닷없이 재임용에서 탈락하면서 실직하게 되었습니다. 교수직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던 그는 2년간 101개의 대학에 지원서를 냈으나 모두 퇴짜를 맞았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빈민에게 제공되는 식량 구입권에 의존하고 아내의 뱃속에 있는 아기를 몇 천 달러에 입양시킬 궁리를 해야 하는 극한 처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추구하던 것들이 가족의 행복과 맞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후 그는 골프장의 잡역부로, 건축 현장의 보조 일꾼으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솜씨 좋고 성실한 목수 겸 페인트공 돈 슈나이더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생한 체험을 그린 <절벽산책>이라는 책을 써내 베스트셀러 작가까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삶에 지친 우리의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에 힘을 주셔서 일으켜 세우시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열등의식과 좌절감과 패배감의 상처를 씻기시고 치료하셔서, 우리가 이 모든 어려움을 능히 헤치고 나가 풍성한 복을 누리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앉은뱅이 걸인이 새 인생을 찾은 것처럼 지금 우리들의 지친 손을 붙잡고 "일어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결코 나는 일어설 수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제 삶의 앉은뱅이 모습에서 단호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십시오. 여러분이 당한 고난과 시련을 새롭고 가치 있는 삶을 위한 전환기로 삼으십시오.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이 이미 여러분에게 주어졌습니다. 다만 여러분은 그 힘을 의지하여 일어나 세상을 향해 당당히 걸어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종은 이렇게 우리들에게 새로운 힘을 주시며 “일어나라!”고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과 엄청난 능력을 온 몸으로 체험하며 벌떡 일어나는 신선한 변화와 축복을 체험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친히 “일어나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오늘 우리들이 일어나 서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형태로 지금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누워 있습니까? 아니면 앉아 있습니까? 한 때는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대항하여 싸우고 당당하게 그들을 처단하며 참으로 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던 엘리야가 한 악녀 이세벨의 저주서린 결단을 보고 그만이야 낙심하여 엎드러지고 맙니다. 그는 극과 극의 모습으로 오늘 우리들을 놀라게 하는데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입니다. 어떻게 850명과 싸워 이긴 하나님의 사람이 한 여인의 한풀이에 기가 그토록 꺾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 이야기를 성경으로 돌아가 자세히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왕상19:1-4)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바로 이것이 엘리야의 초라한 모습입니다. 한 여인 이세벨의 저주가 850명의 선지자들 보다 더 무서워 떠는 엘리야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겠습니까? 하지만 이를 바라보신 하나님은 여느 가슴이 따뜻한 아버지와 같았습니다.
(왕상19:5-8)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이것이 낙심하고 좌절하고 드러누워 죽기를 원하던 엘리야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푸근한 모습입니다. 이 세상 그 누가 이처럼 한 여인 앞에서 낙심하고 죽기를 원하며 드러누워 절망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이처럼 따뜻하게 찾아와 위로해 주며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면서 어루만져 주겠습니까? 하지만 그 누구도 해 주지 못하는 사랑과 위로와 능력을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제공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분이 오늘 우리들의 예배를 받으시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이 낙심했을 때 우리들이 절망하고 포기하였을 때 우리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리 자신만을 위해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 때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도 따뜻하게 찾아오셔서 위로해 주시고 일으켜 세워주시고 새로운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8월 첫 번째 주일을 맞아 아버지 집에 올라오신 우리 모든 성도들은 바로 이와 같은 놀라운 하나님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주검처럼 소망 없을 때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때때로 상상도 하지 못한 고통을 당하거나 재난을 당하게 됩니다. 최근 그리스에서는 순식간에 일어난 산불로 미처 도망가기도 전에 불길이 집을 덮쳐 재산은 말할 것도 없고 소중한 생명까지도 잃어버린 사람들이 무려 1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일본과 한국에서는 41도 넘는 폭염이 찾아와 수십 명이 생명을 잃고 농작물도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아직도 어린 아이가 갑자기 죽어 온 가족들과 이웃들이 대성통곡을 하며 가슴을 치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고통이 주검과 같은 절망이요 사람으로서는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재난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주검 앞에서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외치십니다. “일어나라!”고 말입니다.
(막5:35-43)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 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 을 주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능력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절망 속에서 허덕이는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 오늘 예배자로 선하신 하나님 앞에 올라온 우리 모든 성도님들도 한결 같이 우리 주님께서 외치시는 음성, “달리다굼”을 들으시기를 기적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면 안 됩니다. 포기하면 안 됩니다. 영적인 귀가 열려 우리 주님의 음성 듣기를 고대하며 기다리고 인내해야 합니다. 사람이 절망하고 쓰러질 때 바로 그 때가 구원의 주님을 만날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마가복음의 기사를 한 번 보십시오.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라도 비웃고 조롱하며 기대하지 않습니다.
(막5:39-40)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 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에 동참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믿지도 않고 기대도 하지 않는 그들은 주님께서 다 쫓아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말고 끝까지 우리 주님을 기대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고 일어나 주님과 함께 하는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 한 말씀, “일어나라!”는 말씀만 듣게 되면 그 순간부터 기적은 시작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연약하여 넘어졌을 때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앞서 말씀 드린 주검과 같은 절망은 아닐지라도 연약하여 넘어지고 낙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주님을 섬길 때도 그렇게 직장을 다닐 때도 그렇습니다. 마치 신년을 맞아 운동을 해 보겠다고 결심하고 피트니스의 회원권을 사서 열심히 나가다가 어느 한 순간에 한 번 빠지게 되면 그만이야 소중한 회원권이 다 소멸될 때까지 다시는 못 나가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다가 어느 한 순간에 예배에 빠지게 되고 맡은 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다 보면 그만 신앙생활 그 자체도 그만 두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두 번은 이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바로 이와 같은 연약함으로 인해 넘어져 있을 때 누군가가 붙잡아 주고 일으켜 세워주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데 불행하게도 우리 주변에는 그렇게 용기를 북돋우워 주고 손 내밀어 이끌어 주는 그런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돌아서서 “제 왜 저러지?” 하고 흉은 보기 쉬워도 그 연약함을 이해해 주고 붙들어 주고 일어켜 세워주는 그런 멋들어진 사람들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을 것은 사람보다 천 배 만 배 더 위대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다가오시고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따뜻한 손을 내 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마26:40-46)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이 종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참으로 여러 번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주님의 생애에서 가장 외롭고 힘들고 어려울 때 예수님은 열 두 명의 제자들 가운데서 특별히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구별하시고 그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시며 함께 기도하러 가자고 데리고 가셨습니다.
(마26:37-38)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아무리 철이 없고 미련하여도 주군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고 구별하여 자신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가셨는데 주님과 함께 깨어서 뜨겁게 기도하는 그런 열정도 없이 어떻게 그냥 자버릴 수가 있었겠습니까? 주님께서 한참 동안 땀방울이 피가 되어 떨어지도록 기도하시고 돌아 와 보니 어이없게도 그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만약 오늘 우리들이 이와 같은 현실을 맞았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였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그들을 이해해 주시고 용납해 주시고 변함 없는 따뜻한 사랑과 격려로 그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일나나라 함께 가자!”고 말입니다. 정말 야단맞을 짓을 했는데 그래서 야단맞을 것이라고 단단히 각오를 하고 있는데 이렇듯 따뜻하게 야단이 아니라 사랑으로 손을 내밀어 주실 때 왜 그 때는 눈물이 나는지... 참으로 우리 예수님은 너무나도 멋진 분이심을 실감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로 하여금 이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주님을 실망시켜 드리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지도 못하고 초라하고 어리석게 세상 잠에 빠져버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 이렇게도 따뜻하게 손을 내 밀어 일으켜 세워주시고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한결 같은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니 우리 모두 낙심하지 말고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심기일전하여 주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 힘차게 한 번 다시 쫓아가야 하겠습니다. 기회는 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흑암과 같이 어두움에 잠긴 우리들에게 일어나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은 성도들은 어두운 세상의 빛입니다. 그리고 썩어져 가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렇게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합니다. 최소한 지옥 형벌에 떨어져야 하는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아는 성도들이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세상에서 이처럼 세상에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섬기며 자신을 희생하는 성도들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그리고 오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이처럼 성전으로 올라오신 우리 모든 성도들은 과연 이렇게 빛이요 소금이라는 사명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요? 바로 이와 같은 오늘 우리들에게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고 계십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말입니다.
(사6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이요 경고입니다. 이제 더 이상 죽은 자와 같이 소망 없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세상 잠에 빠져 누워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제는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발하며 썩어가는 세상을 살려내야 하는 사명이 우리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우리들에게 우리 스스로 세상을 비추고 세상을 건져내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능력과 권세와 사랑을 가득 품은 우리 구주 예수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러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과 함께 우리들에게 주어진 이처럼 소중하고 신선한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복음은 철의 장막을 뚫고]로 널리 알려진 브라더 앤드류가 캐나다의 한 대학에서 말씀을 전할 때 있었던 일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었습니다. "내가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말했을 때 그 즉시 강단 뒤쪽에서 청년 두 명이 마이크 앞으로 나왔습니다. 수염을 기른 이 청년들은 과격분자 같은 태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종주의자요 제국주의자라고 그리스도인을 비난하며 모택동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격찬했습니다." 앤드류는 결국 그들의 말을 중단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발언이나 질문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수백 명의 그리스도인 학생 중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절망적으로 보이는 바로 그 상황에서, 흑인학생과 백인학생이 앞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흑인이 먼저 말했습니다. "저는 나이지리아에서 왔습니다. 이 기회에 저는 아프리카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준 그리스도인들에게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그들이 오지 않았다면, 나는 이 대학에 오지 못했을 것이고 아직도 미개인이요 이교도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나는 영원히 죄악 속에 버려질 뻔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회개케 하려고 찾아온 선교사님들에게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어서 동유럽에서 피난 온 백인이 말을 시작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핍박을 참을 수 없어 나는 조국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나는 조국에서 할 수 없던 모든 것을 이 기독교 국가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모든 미주시민 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자들까지도 말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회에 사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두 명의 마르크스주의자가 사백 명의 그리스도인에게 겁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이요 침묵하는 다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바로 무관심입니다. 기꺼이 싸우려는 사람이 있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은 명령하고 계십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처럼 일어나 빛을 발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빛을 전하시고 침묵하고 나태한 우리들은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히 주님을 믿고 당당하게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수련과 훈련의 달 8월이 밝아 왔습니다. 과연 오늘 우리는 이렇게 빨리 흐르는 세월 속에 떠내려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저 적당하게 돈이나 벌고 나와 우리 가족들만 생각하는 아주 작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만약 우리들이 그런 삶에 만족하고 있다면 우리들을 위해 하늘 보좌도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을 우리는 어떻게 만날 수 있겠습니까? 죽은 자를 살려내시고 낙심하고 절망한 자들을 일으켜 세우시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가르쳐 주신 그 예수님을 우리는 어떻게 대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밥만 먹고 살도록 보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주검과 같은 소망 없는 삶을 떨쳐버리고 일어나야 합니다. 자신의 안일과 유익만을 생각하는 잠이나 자고 누워 있는 그와 같은 초라한 삶에서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빛을 발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여드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만방에 선포해야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당당하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같이 불속에라도 들어가는 용기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신선한 열매를 이 땅에 남겨둘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거룩한 성전으로 예배자가 되어 올라오신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이와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주후 2018년 8월 5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