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9일 주일낮설교 (인생은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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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29 July 2018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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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관계입니다
7. 29, 2018
本文:사무엘상26:1-12
說敎:崔 仁 根 牧師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는 수 없는 인간관계, 사업관계 등 바쁜 일생을 보내면서도 주님과의 관계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성경에 나타난 부자처럼 세상 관계가 끝날 때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나사로는 세상에서 아무런 인간관계가 없었고 개들이 친구였으나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주님과 관계가 없는 인생은 일생을 속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많은 친구와 천명의 여인과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다 살고 난 후에 그가 남긴 한 마디는 “헛되다는 것”이었습니다.
(전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삶의 성패가 좌우되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강도도 세리 삭개오도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도 결국 주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삶이 이 땅에서 병들고 죄짓고 비참하였지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하여 인생의 새로운 역전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비록 세상 사람들에게는 존경을 받았으나 주님과의 관계에서 그들은 바른 관계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고 비참한 인종들로 역사 속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주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한 인생들은 세상이 다 알아준다 하여도 주님이 모른다 할 인생이므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렇듯 인생이란 관계 속에서 멋들어질 수도 있고 비참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울과 다윗의 인생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똑 같이 왕이 되었고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그 종말은 극과 극이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버리심으로 비참하게 자살하여 생을 마쳤으나 다윗은 하나님과 이웃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함으로 하늘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그를 통해 예수님을 보내시는 최고의 삶을 살고 갔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고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만 하겠습니까? 바로 배우고 바로 결단하며 짧은 생을 다윗과 같이 축복 받으며 칭찬 받으며 유복하게 살아가는 그런 멋쟁이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인생은 관계입니다
인생은 관계입니다. 역사적으로나 성경 속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관계를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그 한 사람의 성공과 실패로 갈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통하여서 덕망과 성공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인생은 우리들의 몸과 같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통하여서 그 생명을 유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며 칭찬과 존경을 받으며 인생을 살아가는 멋들어진 사람을 만나보기는 이 시대에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와 같은 관계, 즉 대신관계와 대인관계를 중심으로 말씀을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사람, 사울과 다윗을 관계형성의 두 모델로 삼고 그들의 대신관계와 대인관계를 들여다보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인생에 귀한 교훈으로 삼아보고자 합니다. 깊은 깨달음으로 신선한 관계형성에 유익을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사울 왕의 성공과 실패
우리는 사울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리라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서 그를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우신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삼상9:15-17)
사울의 오기 전 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가라사대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아보았노라 하시더니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통할하리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깊이 가슴에 새겨 두고 말씀을 계속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울이 왜 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자신의 공로 없이 한 나라의 왕이 되었다면 그 은총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부모 없는 오늘 우리들의 존재가 의미 없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한결 같이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루아침에 자기가 잘 나고 성공한 인물이 된 것처럼 경거망덕 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망하고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이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한 나라의 왕으로 세워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결국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다가 망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삼상15:22-23)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는 말씀과 같이 사울은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였다가 결국은 왕위에서 쫓겨나고 비참하게 그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렇듯 대신관계에서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삼상31:1-6)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 아들들을 쫓아 미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 미치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를 인하여 중상한지라 그가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 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병기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병기 든 자가 사울의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사울과 그 세 아들과 병기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한 순간에 사랑하는 아들들의 죽음을 보아야 했으며 왕이 신하보다도 더 비참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지경에 이른 사울은 참으로 비참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실패하면 이렇게도 끔찍하게 망하는 것임을 하나님을 사울을 통해 우리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사울은 대인관계에서도 실패하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만난 것은 天運(천운)이었습니다. 그 어리디 어린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용사와 왕까지도 두려워 떠는 블레셋의 골리앗을 쳐 죽였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이 얼마나 골리앗을 무서워했으면 “저 골리앗을 물리치는 자에게는 나의 딸을 주겠다.”고 까지 공개적으로 인물을 찾았겠습니까? 그러한 골리앗을 어린 다윗이 거짓말처럼 물리쳐 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그와 같은 다윗을 큰 장수로 임명하고 전쟁터에 내어 보내어 주변 국가를 평정하였습니다. 이 정도면 다윗은 사울에게 있어 은인에 가까운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을 보면 사울은 용사 3천을 뽑아 세우고 친히 다윗을 죽이러 나섰으니 인관관계를 잘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상26:1-2)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이르러 가로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사울이 일어나 십 황무지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과 함께 십 황무지로 내려가서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왜 이렇게도 다윗을 죽이지 못해 혈안이 되었을까요? 그 배경을 살펴보게 되면 사울이 인간관계에 실패자라는 사실을 알 게 됩니다.
(삼상18:6-11)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사울이 왜 다윗을 죽이려고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순박한 여인들이 대적을 무찌르고 돌아오는 사울 왕과 용사들을 환영하면서 “사울을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고 외친 소리 때문에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이렇듯 옹졸한 질투심으로 목숨을 걸고 왕과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멋들어진 신하인 다윗을 죽여 없애려고 했으니 이 얼마나 편협한 사람이요 인간관계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와 같은 자를 친히 제겨하시고 대신 다윗을 그 왕 위에 올려 세우셨던 것입니다.
다윗의 성공과 승리
우리는 이제 다윗의 성공과 승리에 관한 성경의 증거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나 지금이나 나라 전체가 미국 50개 주 중에서 가장 작은 매사추세츠 주 만한 작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곳은 특별히 아열대로 무덥고 비가 없으므로 나무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한 민둥산에서 왕이 친히 이끄는 3천 명의 용사들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들은 다윗이 어떻게 그와 같은 극한 상황 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그 해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감싸고 보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삼상26:8-12)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깨든지 이를 보든지 알든지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이었더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소중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비록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는 원수 중의 원수이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기름 부어 세우신 종이니 자신이 죽일 수 없다는 것과 그와 같은 환경을 만들어 다윗이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친히 시험하신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대통령을 수행하는 경호원들은 자신이 총을 맞아 죽을지언정 대통령을 보호하는 책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그 어떤 경우에도 주군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보호하는 자들이 바로 경호원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 옛날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울 왕을 경호해야 하는 용사들이 주변에 둘러 진을 치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피곤해서 왕이 잠들었다고 그들도 함께 잠을 잘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그들 모두가 왕과 함께 잠이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삼상26:12)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깨든지 이를 보든지 알든지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이었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와 같은 절호의 기회를 마련해 주시고 다윗으로 하여금 어떻게 처신하는가를 시험해 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신하인 아비새가 “이는 하나님께서 원수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고 단언하였던 것입니다(8절). 하지만 다윗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제거하실지언정 자신이 직접 원수를 갚아 사울을 죽이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삼상26:9-10)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그는 관계에 성공하는 멋들어진 믿음과 철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대인관계나 대신관계를 완벽하게 이루어 낸 놀라운 다윗만의 신념이었습니다. 비록 그 상대가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원수 중의 원수였을지라도 그는 직접 자신의 손으로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처신한 배경에 하늘의 하나님을 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가슴으로 기억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순종하고 따랐던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대인관계와 대신관계를 완벽하게 이루어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는 사울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고도의 인격이요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어느 날 자신이 죽이려고 하는 다윗을 도와주었다는 이유 하나로 하루아침에 하나님께서 친히 기름 부어 세우신 제사장들을 무려 85명이나 칼로 죽여 버린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제사장들의 가족들도 그 제사장에게 속한 짐승들도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까지도 잔인하게 칼로 다 죽여 버린 악한이었습니다.
(삼상22:17-19)
왕이 좌우의 시위자에게 이르되 돌이켜 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의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고발치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이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이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 오인을 죽였고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와 같은 사울과 다윗이 과연 어떻게 다른지를 이와 같은 특별한 기회를 만드시고 다윗에게 주어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마치 하나님의 이와 같은 속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아름답게 처신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엄청난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행13:21-23)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인생은 관계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윗과 같이 원활하게 잘 유지해 나갈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과 같이 자신의 감정 하나를 다스리지 못해 조급하고 잔인하게 관계를 깨드려 나간다면 반드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오늘 배워야 할 놀라운 진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울과 다윗을 거울로 삼고 관계에 승리하는 멋들어진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멋진 인간관계를 유지해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유명한 한 철학자의 견해와 다윗 왕이 보여 준 믿음으로 그 모델을 삼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관계에 성공하려면
근세에 유명한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현대인의 인간관계를 세 가지로 진단했습니다. 하나는 '그것과 그것의 관계'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마치 물건처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차버립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생명이 없는 무인격의 관계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유대인 철학자 부버는 또 하나의 관계로 '나와 그것의 관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물건처럼 이용해도 나는 상대방을 끝까지 인격으로 대할 때, '나와 그것의 관계'가 성립된 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관계는 '나와 너의 관계'로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인격으로 그리고 당신도 나를 인격으로 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끝나면 부버는 그렇게 위대하지 않습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당신을 인격으로 믿어 주고 당신이 나를 인격으로 믿어 주어도 우리들 사이에는 언제나 그 인격적인 관계가 깨질 수 있는 긴장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성의 연약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너 사이에는 언제나 이 인간관계를 중매하는 하나의 촉매자가 필요합니다." 부버는 그 촉매자를 '영원한 너'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영원한 너'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간과 인간으로 부딪칠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서 얼마나 많은 단점을 발견합니까?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바라 본 내 아내, 또 그리스도를 통해서 바라본 내 남편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한번 만날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무릎을 꿇을 때에 비로소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놀라운 관계가 가능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신관계와 대인관계를 서로 떼어 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둘은 하나로 묶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 사람들보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다른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비록 미국의 이혼율이 50%에 육박하고 있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예수님을 가슴에 품고 사는 성도들은 그렇지 못한 세상 사람들보다 인간관계를 훨씬 더 잘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인격적으로 만나고 이웃들과 사람들도 그렇게 인격적으로 만날 때 우리는 다윗과 같이 관계에 성공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명령하고 계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위기19:18)고 말입니다. 이것이 관계 형성에 기본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들이 함께 살펴보았던 다윗의 관계 성공도 바로 이처럼 말씀에 기초를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죽여야 자신이 살 수 있었지만 그것조차도 모든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릴 때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을 그는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을 순종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사는 날 동안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아름답고 좋은 관계는 곧 우리들의 삶을 윤택하고 행복하게 해 줍니다. 하지만 잘못 된 관계는 우리들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고 맙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우리들의 속을 들여다보는 듯 다음과 같은 놀라운 경험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잠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21:9)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나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고 말입니다. 그만큼 아름다운 관계가 행복의 조건임을 지혜자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보물단지를 얻는 것 보다 낫고 사람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지속해 가는 것은 지상의 천국을 누리는 것과 같이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곧 관계인 것입니다. 사울과 다윗을 거울로 삼고 감정을 초월하는 멋들어진 관계형성으로 하나님으로부터는 축복을 받고 이웃들로부터는 사랑을 받는 그런 멋들어진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주후 2018년 7월 29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