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8일 주일낮설교 (고통에서 해방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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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08 July 2018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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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서 해방되라!
7. 8, 2018
本文:요한복음5:1-15
說敎:崔 仁 根 牧師
이 세상에는 고통으로 소중한 세월을 낭비하며 절망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은 병든 사람일 것입니다. 몸이 병들게 되면 삶의 기본인 돈을 벌수도 없고 남에게 부담과 짐만 되기 때문에 이 보다 더 큰 고통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 일이 년이 아닌 숱한 세월을 질병으로 자리보전하게 된다면 아마도 최악의 상황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38년 된 병자가 바로 그 대표적인 고통의 상징일 것입니다. 그는 지금 예루살렘의 한 연못인 베데스다 곁에 누워 있습니다. 그가 그곳에 있는 이유는 어쩌다가 천사가 내려와서 그 못의 물을 동하게 할 때 그 물 속으로 뛰어들기만 하면 낫게 되는 기적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소망은 오직 하나 물이 동할 때 그 물 속으로 뛰어들어 병에서 해방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꿈은 진정한 꿈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요행이었고 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일 배웠습니다. 우리들의 소망을 성취하는 유일한 길은 환난과 인내와 연단의 과정을 이겨내야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환자는 이와 같은 과정을 정상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리에 누워 꼼짝도 할 수 없는 중환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그와 같은 지긋지긋한 질병에서 순식간에 해방 되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요5:5-9)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문자 그대로 이것은 기적 그 자체였습니다. 문제는 이처럼 놀라운 기적이 그 환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일방적으로 고쳐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오직 주님의 주권과 강권적인 사랑으로 일어난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고귀한 진리를 중심으로 “고통에서 해방되는 기적”을 우리들도 체험해 볼 수 있도록 사모하는 마음으로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도록 하겠습니다.
고통에서 해방되라!
사실 오늘 우리들도 모두가 다 고통에서 자유하지 못한 채 크고 작은 문제로 영육이 시달리며 고난의 강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 중에 단 한 사람도 문제와 고난이 없이 인생을 랄라룰라 살아가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오늘 본문의 주인공처럼 38년 동안이나 질병으로 자리보전하고 소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또한 우리 가운데는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모두의 감사의 이유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내일은 그 누구도 모릅니다. 내일 우리 앞에 어떠한 일이 닥쳐올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맑은 날에 우산을 준비하듯이 대사 없이 잘 지내고 있을 때 주님과 깊은 관계를 회복하며 보험들 듯이 내일을 대비하는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고통은 해결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38년 된 병자를 한 번 되돌아보십시다. 하루 이틀 행여나 물이 동할 때 그곳에 들어가 질병에서 회복되는 기적을 볼 수 있을까 환자는 기대하고 그곳에 머물렀지만 그 세월이 38년이나 되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그의 절박한 한 마디의 고백이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요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는 말씀을 조용히 묵상해 보신다면 이 병자가 당하고 있는 현실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어언 38년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질병은 더욱 더 깊어버렸고 결국 못에 들어가는 일은 요원한 일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신대로 살아가는 이 세대의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잘 되겠지, 하고 기대하고 꿈을 꾸지만 세월은 더욱 더 작은 소망마저도 밀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저절로 문제를 해결해 주고 고통에서 자유케 하는 그런 역사를 만들어 내는 일은 이 땅에 없는 것입니다.
이 종이 미국에 처음 와서 천불을 주고 자동차를 샀는데 사다 놓고 이튿날 일어나 자동차를 켜보니 그동안에 자동차는 고장 나 있었고 다시는 엔진이 켜지지를 않았습니다. 아무리 들어다 보아도 도대체 어디가 고장 났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엔진이 켜지겠지, 하고 시간을 보내고 나서 또 하룻밤을 지나고 나서 다시 시도해 보았으나 역시 다시는 엔진이 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이 종은 깨달았습니다. 시간이 문제를 저절로 해결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막5:25-26)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라는 말씀에서도 우리는 이와 꼭 같은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루 이틀 고쳐보려고 가진 애를 다 썼으나 그 시간들이 그 병을 고쳐주고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욱 악화되면서 시간은 어느 덧 12년이 흘러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들의 고통과 문제가 시간이 흐름으로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들의 고통과 문제에서 해방 되는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요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는 말씀과 같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기적의 시작이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힘이나 능력으로 안 되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때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예수님께서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이요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과연 어떠한 분이신가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환자를 보시자 말자 곧 그의 병이 오랜 줄을 아셨다고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단 한 마디의 말씀으로 38년 동안이나 앓고 있었던 병을 순간에 낫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요5:8-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예수님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고 못하시는 것이 없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은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교회에만 다니지 말고 예배만 드리지 말고 이처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방법은 오직 두 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시는 것과 우리들이 그 주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환자는 그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도 못하고 있었으나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기적을 베풀어 주신 케이스이고 마가복음에 나타난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여인은 예수님을 친히 찾아가서 기적을 체험한 케이스입니다.
(막5:25-28)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하면 안 됩니다. 포기하면 안 됩니다. 고통과 고난이 제아무리 무섭고 오래가도 반드시 해결 될 수 있다는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절대자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12년 동안이나 지속되고 38년이나 계속 되었던 모든 고통들이 한 순간에 해결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이 축복이 될 때가 있으려니 참으면서 그 고통을 품고 예수님의 때를 기다리는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진주가 어떻게 생기는지 아십니까? 조개 속으로 모래알이 한개 들어갑니다. 그 부드러운 조개의 살 속에 거친 모래알이 들어왔으니 조개는 얼마나 아프고 쓰리겠습니까, 고통스러운 조개는 몸의 진액을 짜내어 그 모래알을 싸고 견디며 고통을 참아냅니다. 이렇게 한 해가 가고 또 가고 하는 중에 그 영롱하고 아름다운 진주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고난이 있는 것은 우리 인생의 참 진주를 형성하는 계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길이 참고 견디며 예수님을 만날 날을 기대하면 반드시 진주와 같은 보석으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고통이 오는 이유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뜻밖에도 왜 이 환자가 38년 동안이나 끔찍한 질병으로 고생하였는지 그 해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라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이와 같은 말씀은 결코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 죄는 우리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며 무서운 형벌을 자초하는 무서운 것입니다. 이 시대의 가장 불행한 역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죄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죄에 대한 감각이 없어져 범죄를 즐기면서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가 바로 말세인 것입니다.
[사건은 지난달 26~27일 이틀간 서울 노원구의 한 노래방과 관악산 일대에서 발생했다. 피해자 B 양(17)은 6월 26일 오후 서울 노원구의 한 노래방에서 5명에게 1차로 집단 폭행을 당했다. 가해자들은 폭행 장면을 휴대전화로 촬영하고 영상통화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자랑했다.
이들은 이어 B 양을 관악산으로 끌고 갔다. 그 사이 다른 학생들이 합류했다. 여학생 5명과 남학생 3명은 산 속 으슥한 곳에서 B 양을 집단 폭행하고, 일부는 나뭇가지와 음료수 캔을 이용해 B 양을 성추행까지 했다. 2차 집단폭행 후 B 양은 가해자 중 한 학생의 집으로 끌려갔고, B 양은 가해학생이 잠든 틈을 타 가족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낸 뒤 구출됐다.
B 양의 언니인 A 씨는 1차 폭행 후 가해자들이 마스크를 씌워 동생을 관악산으로 데려갔다며 “중간에 지하철에서 (B 양의)마스크를 벗기고 자랑하듯이 멍든 사진을 자기 친구들한테 전송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관악산으로 이동한 뒤 가해자들은 B 양의 옷을 모두 벗겼다고 했다. A 씨는 “도망갈 수도 있으니까 옷을 다 벗기고 성추행을 하고 폭행을 5시간 동안 했다.”며 “산에 각목이 생뚱맞게 있었을 리는 없고 미리 그 장소까지 알아본 거 같다.”며 계획 범행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어 “각자 때리는 게 정해져 있었나 보다. 누구는 팔, 누구는 가슴, 누구는 다리, 누구는 배랑 자궁 있는 쪽만 집중적으로 때렸다.”면서 “때리면서 인증 샷을 찍고 SNS로 친구들한테 자랑하듯이 전송했다.”고 말했다.](7월4일자 조선일보에서 발췌)
범인들은 14살부터 18살까지의 앳된 청소년들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어떻게 이와 같은 끔찍한 무법천지의 범죄가 이루질 수가 있겠습니까? 가슴에 죄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범죄에는 거기에 합당한 형벌이 가해지기 마련입니다. 그 흔적이 평생을 따라다니며 인생을 망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범죄에는 형벌이 따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이 세상이 질서 있게 유지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방편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 가운데 가장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요 하나님을 그렇게도 사랑하고 섬겼던 한 인물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성군 다윗입니다. 그러한 그도 한 순간 죄에 빠지게 되어 많은 고통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삼하12:13-18)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하고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곁에 이르러 다윗을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저희로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복들이 아이의 죽은 것을 왕에게 고하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의 죽은 것을 고할 수 있으랴 왕이 훼상하시리로다 함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이 낳은 소중한 어린 아들이 죽는 모습을 목도해야만 했었고 하나님으로부터 거기에 상응하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오늘 본문 14절의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 시사 하는 바가 매우 큰 도전의 말씀으로 남아 있습니다.
(요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이 말씀은 바로 죄가 끔찍한 고통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고통을 더해 줄 뿐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늘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 숱한 사람들 중에는 삶에 기쁨과 유익을 주는 소중한 사람들도 많지만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인생을 가로 막는 고통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이 같은 부모를 가진 형제들 속에서 일어났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사람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전라도 강진에서 일어난 끔찍한 여고생 살인 사건도 바로 이와 같은 맥락으로 참으로 우리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16일 16살 난 여고생은 아빠의 친구가 아르바이트 할 곳을 소개해 주겠다고 해서 따라 나섰다가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아빠의 친구가 그녀를 무참히 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빠 친구도 이 사건 이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기 때문에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아빠의 친구를 의심하였겠습니까?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소녀가 다른 사람도 아닌 아빠의 친구가 아르바이트를 소개해 준다니 좋아라 하면서 따라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이렇게 되고 말았으니 이 세상은 참으로 무섭다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삶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만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들여다보면 그 때도 예외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5: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는 말씀이 너무나도 참담하기 때문입니다. 38년 동안이나 앓고 누웠다가 고침을 받아 일어났으면 축복하고 박수를 보내주어야 할 텐데 오히려 이렇게 비난하고 판단하고 있으니 참으로 끔찍하지 않습니까? 법도 사람을 위해 있고 심지어 하늘의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을 위해 희생하셨는데 이처럼 천신만고 끝에 고통에서 해방된 사람에게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이런 사람들이 주인공 곁에 있었다는 자체가 비극이고 불행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이와 같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하는 이 종도 젊고 철없던 시절에는 이런 사람들과 꼭 같았으니 진심으로 후회하고 회개합니다. 성도들이 주일에 교회에 나오지 못하면 무슨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 있지나 않았는지, 그것부터 점검하고 위로하고 축복을 해 주어야 할 목사가 “어떻게 주일을 범할 수 있느냐?”고 몰아붙였으니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한 종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실이 이렇다 보니 우리는 그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고 위로 받을 수가 없음을 서글프게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마약에 찌든 젊은 엄마가 마약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7살 난 아들을 2,500불에 팔아먹었다가 경찰에 체포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해 오늘 우리들을 경악케 하고 있습니다.
[마약 빚을 갚기 위해 7살 아들을 2500달러(280만 1250 원)에 팔아넘긴 미국 텍사스주의 한 엄마가 지난 주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텍사스주 공공안전부가 발표했다. 코퍼스크리스티 콜러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주 경찰은 코퍼스 크리스티에 거주하는 한 여성이 에스메랄다 가르사(29세)의 아들을 그 돈을 내고 샀다고 말한 뒤 그녀를 체포했다. 가르사는 남자친구와 함께 마약 빚을 지게 되자 그 여성에게 500달러에 아들을 넘겨 준 뒤에 남은 빚을 탕감하고 추가 700불을 현금으로 받는 등 총 2500달러를 정산했다고 말했다. 텍사스 주 마약수사반은 코퍼스 크리스티에 대한 마약 수색 영장을 집행하던 중 이 7세 남아를 발견했다. 이들은 두 살짜리와 세 살짜리 아기도 판매 흥정이 진행 중이었다고 말했다.](외신보도에서 발췌)
이 정도면 참으로 막가는 세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마약을 위해 어떻게 자신이 낳은 아들을 팔아먹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더 이상 사람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우리 예수님뿐임을 없는 믿음으로라도 고백하고 주님께로 돌아가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열 번을 잘못하고 열 번을 회개하고 돌아와도 따뜻한 사랑으로 받아주시고 우리들의 형편과 처지를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잘 아시고 그 엄청난 능력으로 해결해 주시는 참으로 좋으신 우리 하나님 품에 안겨서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며 지상에서도 천국과 같은 넘치는 축복으로 살아가는 그런 선택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어느 대학 교수가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내는 알코올 중독자로 가구를 내다 팔아 술을 마시고, 술 마실 돈이 없으면 아내를 두들겨 팬다. 거기다가 그 아내는 폐결핵에 걸려 콜록거린다. 그들은 셋방살이 형편이다. 그런데 아내가 임신을 했다. 여러분에게 묻겠는데, 이 임신된 태아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학생 하나가 재빠르게 손을 들고 일어서서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낙태시켜야 합니다." 대학 교수가 말했습니다. "자네는 방금 베토벤을 죽였네!" 베토벤을 낳은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지병인 폐결핵으로 죽었습니다. 그는 11살 때부터 극장을 돌며 구걸 예술을 해야만 했습니다. 거기다가 그는 서른 살 때 음악가의 생명인 청각을 잃었습니다. 그의 음악은 강한 주제를 지니고 있으며 대부분 끝부분에 가서는 환희를 노래합니다. 그의 작품은 고통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고백대로 그는 "괴로움을 뚫고 나가서 기쁨을 발견"한 것입니다. 로망 롤랑이 쓴 베토벤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는 나이가 들고 성공할수록 깊은 신앙의 세계에 빠져들었습니다. 신앙이 그를 모든 파괴적이고 체념적인 불행의 조건에서 구출하여 높은 경지로 인도한 것입니다. 고난은 불행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은 신앙과 만날 때 가치와 행복의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부터 당하는 고통을 예수님을 만나 승화시켜 나갈 때 비로소 고통은 기적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죄악이 넘쳐나는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그 자체가 고통이요 고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더 이상의 소망도 없이 죽어가던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회복되는 치유와 회복의 축복은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원하기는 오늘 우리들도 이 복된 주인공과 같이 예수님을 만나서 고통의 현장에서 해방되는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삶을 짓누르는 거의 대부분의 고통은 우리들이 그릇 생각하고 그릇 산 삶의 흔적일 수 있음을 명심하고 죄를 멀리하고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는 성실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늘 속고 속이면서도 이웃들과 사람들을 기대하는 우리들의 그릇된 습관을 버리고 사람은 오직 사랑해 줄 대상일 뿐 기대하고 의지할 대상이 아님을 오늘 본문에서 다시 한 번 더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가장 많이 기대하였기에 말할 수 없는 실망과 상처를 입는 것이 바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신앙으로 새로운 내일을 기대해야 하겠습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조용히 찾아오셔서 질병과 고통의 깊이가 크고 무서운 것을 아시고 그 고통의 근원을 해결해 주심으로 진정한 자유와 소망을 주셨던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 곁에 찾아오시고 우리들의 아픔과 상처를 보담아 주시고 해결해 주실 줄을 기대하는 믿음이 오늘 우리들에게 넘쳐나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이 날을 주님의 날인 줄 알고 힘을 다해 성전으로 올라오고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리는 귀하고 복된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주님만이 주시는 위로와 축복과 기적이 충만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주후 2018년 7월 8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