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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8년 10월 21일 주일낮설교 (에서와 야곱)

2018년 10월 21일 주일낮설교 (에서와 야곱)

에서와 야곱

10. 21, 2018

本文:말라기1:1-3

: 仁 根 牧師

평생 목회 해 오면서 가장 많은 질문을 받은 것 중의 하나가 야곱이 어떻게 복을 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일반상식으로 볼 때 야곱이 복 받을 만한 짓(?)을 한 것이 없다고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들을 더욱 당혹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선포하시기를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다.”고 하셨기기 때문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여기에 쯤 와서는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실까?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불완전하거나 실수 같은 것은 없는 것이기에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바로 그 이유를 함께 찾아보면서 신선한 가을의 향기를 맛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라도 바로 배워서 우리들과 우리들의 후손들에게 유익하고 복된 삶이 될 수 있도록 마음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에서와 야곱

결론부터 먼저 말씀 드린다면 하나님은 구약성경을 마무리 하시면서 새로운 신약시대의 성도들인 우리들에게 야곱과 같은 신자가 되고 에서와 같은 신자는 되지 말라시는 말씀을 오늘 본문과 같이 단도직입적으로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상식과 경험과 지식으로 사람을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가장 분명한 증거가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을 하나님은 오늘 본문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해 두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을 모르는 존재들과 야곱과 같은 존재들 그리고 에서와 같은 존재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디에 해당 되는 사람들일까요? 손자병법에도 적을 알고 자신을 알면 세상에서 두려울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사실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세상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비록 초등학교의 문 앞에도 못 가 보았지만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그는 곧 성자요 세상 모든 지식에 통달하는 인물보다 더 위대한 인물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오늘은 하나님께서 친히 정리해 두신 세 가지 인간상에 대해 공부하면서 제대로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을 모르는 인간

오늘 본문을 묵상해 보면 참으로 가슴이 아픈 하나님의 심정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하나님께서 친히 사랑한다.”고 하시는데도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한다면 사실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 느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도 동일하게 느끼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가장 많이 하는 부류가 바로 자식들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잉태하고 낳고, 기르고, 교육시키는 긴 과정은 참으로 사랑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자식들은 부모의 그와 같은 사랑을 제대로 아는 이가 없습니다. 한결 같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였느냐?”고 항변하고 있는 세태가 바로 지금이기 때문입니다. 이 종이 짧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성도들을 통하여 느낀 인간상은 서너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하나를 사랑하여도 열을 받은 것처럼 감사하는 부류와, 열을 사랑하여 주어도 하나를 받은 것처럼 느끼는 부류와, 다섯을 사랑하면 다섯만 받은 줄로 아는 부류가 바로 그렇습니다. 과연 어떤 부류가 가장 멋진 사람들일까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를 주었는데도 열을 받은 것과 같이 감격하고 감사하는 성도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결론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그것은 상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모르면 부모님의 사랑도 또한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의 사랑도 헛것이고 맙니다. 목사님을 모르면 목사님의 아무리 큰 사랑도 무의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놀라운 한 가지 사실을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요일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 또한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만이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 사랑으로만이 인생이 변화되고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작가 다니엘 피포가 쓴 장편소설 [로빈슨 크루소]는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무장하게 될 때 그 어떤 환경도 극복하게 되는 위대한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비극의 주인공이 된 크루소는 불행하게도 항해를 하다가 파선당하여 무인도에 홀로 떨어지게 됩니다. 무인도에서 굶어 죽겠구나 했는데 무성하게 자라난 무인도의 과일나무를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탄하게 됩니다. 입을 옷이 없어 어떻게 하나 했는데 춥지 않고 온화한 무인도의 온도에 또한 놀라게 됩니다. 무기가 없어 무인도의 맹수를 어떻게 막아낼 수 있겠나 했는데 그 무인도에는 맹수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 하나 없는 외로운 무인도에서 어떻게 살아가나 했는데 하나님이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이 때 그는 깨닫게 됩니다. 환경과 조건이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은 조물주를 통하여 스스로 얻어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1930년대에 미국을 휩쓸었던 핑키 톰린(Pinky Tomlin)의 노래 가사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님이 나를 바꾸었다네. 장미 빛 인생으로 나를 바꾸었다네. 그녀가 내 손을 잡고 나는 당신의 것이에요하고 말할 때마다 나는 바뀌었다네.” 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만큼이라도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들을 바꾸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어리석은 백성들인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탄식하시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나는 사랑하는데 그들은 나를 향하여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하니 내 마음이 슬프도다.”고 말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사는 날 동안 가슴에 새겨 두고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두 번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이와 같은 슬픈 탄식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해야만 합니다.

야곱과 같은 인간

다음으로 오늘 본문에서 살펴볼 수 있는 인간상은 바로 야곱과 같은 인간입니다. 우리는 야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냉혈적인 존재였습니다. 식구들을 위해 들에 나가 사냥을 하고 돌아와 배가 고프다는 형을 위해 팥죽을 마땅히 제공해 주어야만 할 것인데도 그는 형의 장자권과 바꾸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속이고 형도 속인 채 장자인 형이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챘던 사기꾼이었습니다.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한 채 그는 외삼촌댁에서까지도 외삼촌을 속이고 외삼촌의 재산을 가로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 야곱은 그 자체로도 사기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놀라는 것은 그와 같은 야곱을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야곱을 사랑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은 이와 같은 야곱을 친히 사랑한다고 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형 에서는 미워한다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이와 같은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야곱의 이와 같은 사기성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한다고 하신 배후는 매우 의미 깊은 영적인 뜻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야곱은 이삭의 아들입니다. 이삭이 원래 자식을 갖지 못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식을 많이도 사모하였습니다.

(25:21-23)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아이들이 그의 태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 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야곱은 같은 어머니의 배속에서 있었으면서도 장자가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장자에 대한 깊은 사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장자권이야말로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유산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야곱은 인간적인 육신의 것보다 하나님의 영적인 것을 더 깊이 사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이것을 귀하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기꾼과 같은 야곱의 삶은 고통의 늪을 통해 철저하게 파괴되고 회개되고 새롭게 됨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얍복나루에서 밤이 새도록 하나님과 함께 시름하며 매달린 그의 기도였습니다.

(32:24-28)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 되었더라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 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여기에서 사기꾼 야곱은 사라지고 신선한 이름 이스라엘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한다 선언하시고 이스라엘의 위대한 족장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2018년도 한 해 동안 영적인 사람이 되자!”고 표어를 내 걸고 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이 인간적인 야곱이 죽고 영적인 이스라엘로 거듭나기 위함인 것입니다.

병원에서 채플린으로 섬기고 있는 박동서라는 목사가 쓴 칼럼을 읽어보았습니다. 지난 레이버 데이 때 아침 커피를 마시며 모처럼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병원에서 호출이 왔습니다. 두 환자가 임종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달려갔는데 두 환자 모두 평소에 잘 알고 지내 온 성도들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평생을 통해 신앙생활을 하다가 암으로 병들어 4년 전부터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분인데 성경은 거의 다 외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성경을 잘 알고 있고 있는 성도였습니다. 그런데 성질이 못 되어서 주변 사람들을 늘 힘들게 하고 까칠하게 행동하여 찾아오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역시 암으로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인데 암이 발병 되자 예수님을 영접하고 아주 소망 가운데서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어왔다고 합니다.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는 장기를 모두 기증하기로 사인도 하였고 비록 신앙연조는 짧지만 예수님을 영접하고부터는 생활이 완전히 변화를 받은 그런 훌륭한 성도였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 가운데 누가 과연 야곱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 받는 성도일까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늦게 믿었지만 변화를 만들어 낸 후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가슴으로 말씀을 받아야 할 대목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귀한 사실을 영적으로 변화를 받아 이스라엘의 축복을 누리는 참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에서와 같은 인간

불행하게도 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에서를 미워한다.”고 하셨습니다.

(1: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딱히 에서를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실 만한 잘못이 없는 것을 잘 압니다. 잘못이 있다면 에서보다 야곱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와 같은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한다고 하시니 참으로 의아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하나님의 그와 같은 말씀에는 깊은 뜻이 숨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에서는 육신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25:29-34)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여기에서 우리는 왜 에서가 하나님의 미움을 사게 되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장자권 조차도 한 그릇 팥죽에 팔아버릴 만큼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랬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깊이 깨달아야 할 보배로운 진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것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친히 강조해 주신 귀한 진리요 보배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는 비록 아버지의 재산을 세상에 나가 다 탕진하였으나 아버지를 생각하고 그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큰 아들은 크게 잘못한 것이 없었지만 오히려 책망을 받았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는 아버지를 제대로 알지를 못했습니다.

(15:18-21)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15:29-30)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라는 말씀과 같이 탕자는 비록 큰 잘못을 저질렀어도 회개하는 마음으로 아버지 품으로 돌아 왔으나 큰 아들은 아버지를 오해하고 또한 원망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오늘 우리들은 에서를 통해서 보배로운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주신 떡은 비록 부스러기 일지라도 버리지 말고 다 주우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6:12-13)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지 간에 우리는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직분도, 축복도, 자식도, 교회도, 주의 종도 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귀한 선물들입니다. 귀하게 여기고 야곱과 같이 축복을 누리되 에서와 같이 미움과 저주를 받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이 종의 총신 신학대학원 75회 동기 동창이었던 김 모 목사는 이민목회가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우니까 그만 접어버리고 사업을 하였습니다. 그로서리도 해 보고 호텔도 해 보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사업을 해 보았지만 결국은 다 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명을 저버린 자를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그 친구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사는 날 동안 에서를 거울로 삼고 하나님의 것을 가볍게 여기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복되고 귀한 계절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영적인 삶에도 이처럼 풍성한 가을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말씀이 너무나도 보배롭고 적격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축복을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복되게 여기고 가슴으로 간직할 때 우리들의 영적인 삶에도 풍성한 열매가 맺히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말씀하십니다. 에서는 미워하나 야곱은 사랑한다고 말입니다. 과연 우리들을 보시는 하나님의 판단은 어떠할까요?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도 야곱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것은 어쩌다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에서와 야곱의 긴 인생 여정이 끝났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판단하시고 남기신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늘 오늘 말씀을 경계로 삼고 거울로 삼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영원히 남는 그런 멋들어진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오늘도 거룩한 성전으로 올라와 예배와 예물로 하나님을 섬기시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주후 20181021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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