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8일 주일낮설교 (가슴을 넓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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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28 October 2018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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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넓혀라!
10. 28, 2018
本文:누가복음15:25-32
說敎:崔 仁 根 牧師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것이 무엇일까? 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의 저자이자 코넬대학교 교수인 칼 필레머가 박사가 2004년부터 “인류 유산 프로잭트”를 시작하였는데 65세 이상 된 1,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당신들의 삶 속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이 무엇입니까?”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대답들 중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필요 없이 걱정을 많이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시간인데 그 소중한 시간들을 걱정하면서 보내버린 것이 가장 후회스러웠다는 것은 오늘 우리 모두를 생각하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이는 인생들이 인생을 후회스럽다고 경험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신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은 다 이렇게 걱정하면서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것은 딱 하나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랜 경험을 통해 이처럼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살펴보았는데 그것은 바로 가슴이 좁아 모든 것들을 넓게 보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아버지지이고 다른 하나는 장남이며 그 마지막은 막내입니다. 이 세 사람 중에서 아버지는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넓은 가슴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다 가지고 나가서 창녀와 함께 낭비해버리고 알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도 단 한 마디의 원망도 없이 맞아들이고 반갑다고 온 동네 사람을 불러 큰 잔치를 벌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본 장남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동생에게 이처럼 성대한 잔치까지 열어 줄 수가 있는가? 하는 원망 때문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극명하게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넓은 가슴의 소유자와 좁은 가슴의 소유자로 대변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끝이 없는 사랑의 소유자이신 하나님을 상징하고 장남은 그런 아버지를 모시고도 감사하며 살아가지 못하는 오늘 우리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변화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좁은 가슴에서 넓은 가슴의 소유자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변화 될 수 있겠는지 함께 그 길을 모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슴을 넓혀라!
지난 10월 24일 수요일 밤 부산시 사하구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발생하여 부산시민을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아파트에서는 3대가 오순도순 살고 있었는데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딸 이렇게 3대가 한 순간에 비참하게 살해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범인은 바로 서른세 살 딸과 동거까지 하며 사실상 손녀사위로 인정받았던 32살의 한 남자였습니다. 그는 헤어지자는 딸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가 이처럼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 자신도 그 집에서 자살하여 조용하게 살던 아파트에서 다섯 구의 시체가 실려 나오는 비극을 초래하였던 것입니다. 왜 이와 같은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가슴이 좁아 원한이 쌓였기 때문이요 그와 같은 원한을 풀어버리지 못한 채 원수를 갚으므로 소중한 자신의 삶까지도 접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무서운 독약도 한 컵에 풀어 마시면 즉사하지만 호수에 타서 마시면 죽지 않는 것처럼 넓은 가슴은 문제도 원한도 근심도 넉넉하게 희석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군 다윗도 그의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하기를 힘써 대장부가 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왕상2:1-3)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 아들 솔로몬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고 말입니다. 우리들도 오늘 다윗이 긴 인생을 마감하면서 남겨 둔 이 한 마디의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야 하겠습니다.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 그리하면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는 이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별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리의 말씀과 선배들이 살아보고 경험해 본 다음에 주는 교훈을 가슴으로 받아 따라 살아가면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고집대로 진리도 교훈도 경험도 무시한 채 제 마음대로 살면 비참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 등장하는 바로 이와 같은 한 사람을 부정적인 측면에서 교훈삼아 가슴을 넓히고 넉넉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성도들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아버지를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아버지는 나를 이 땅에 존재하게 하신 최고의 소중한 분이십니다. 비록 그 아버지가 죄를 짓고 감옥에 가 계신다 할지라도 그 아버지를 원망하지 말고 존중하고 섬기고 배워야 합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 아버지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자이기 이전에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되는 가장 기본적인 도리는 나를 이 땅에 존재하게 하신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아버지를 공경하는 자들에게는 복을 주시고 아버지를 욕되게 하는 자들은 무섭게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엡6:1-3)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신21:18-21)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는 말씀들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아버지에 대한 자식들의 도리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신을 묶어서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내리쳐 죽이려는 순간에도 단 한 마디의 말조차 하지 않은 채 순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며 섬겨야 한다 할지라도 자신을 칼을 들어 쳐 죽이려는 순간까지도 가만히 있을 정도이면 이는 사람이 아니라 성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실제로 그렇게 하였던 인물이었습니다.
(창22:7-10)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이삭은 이처럼 담대하게 죽음을 각오하고 아버지의 뜻에 순응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예수님께서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던 것처럼 절대 순종함으로 예수님의 모형이라는 칭송을 받았고 이스라엘의 2대 족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건을 중심으로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와 탕자의 형이자 장남이었던 아들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한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눅15:25-30)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그는 동생이 돌아와 반갑다고 잔치를 베풀어 주신 아버지를 향하여 노를 발하고 극명하게 따지고 들며 원망하였습니다. 얼핏 보면 매우 타당한 것 같고 논리 정연한 것 같고 마땅히 화가 났겠다고 보이지만 이는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옹졸하고 작은 가슴의 소유자임을 스스로 만 천하에 공포한 초라한 모습입니다. 동생이 돌아왔으면 기뻐해야 하고 아버지께서 그와 같은 동생으로 기뻐하신다면 위로해 드리며 함께 즐거워해야 아들이고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인간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도무지 할 수 없는 처신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각이 좁고 판단이 좁고 가슴이 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가슴을 넓혀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은 바로 자신을 이 땅에 존재케 하신 아버지를 순종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동생을 사랑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형이 동생을 미워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 같습니다. 감히 아버지에게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달라하고 그 돈으로 집을 나가 창녀와 놀아나다가 그 귀한 재산을 다 탕진해버리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동생이니 어찌 밉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잠시만 되돌려 다시 생각해 본다면 그래도 그와 같은 동생이 곁에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언제나 새롭게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아들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당하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곁에서 보기에도 너무나도 민망하고 같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모진 말 하나로 위로 하여보았습니다. “그래도 그 아들이 죽어 없어진 것 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살아 있으니 언젠가는 새롭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동생인데 형답게 조금만 더 너그럽고 따뜻하게 맞아준다면 어느 날엔가 새롭게 되어 늙으신 아버지를 함께 모시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 형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같은 피를 나눈 동생에 대해 끔찍할 만큼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눅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는 말씀과 같이 그는 동생을 아주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재산은 아버지의 것을 탕진했는데 형이 왜 이렇게도 격분하는 것일까요? 가슴이 좁고 그 좁은 가슴에 사랑이 말라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떻게 자신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 왔는데도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할 수가 있었을까요? 가슴이 넓고 그 넓은 가슴에 사랑이 가득 담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넓은 가슴과 좁은 가슴의 극과 같은 차이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누가 우리들의 하나님이신지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형제와 이웃이 바로 우리들이 섬겨야 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가난한 이웃들에게 잘 해 준 것이 곧 주님께 잘 한 것이라고까지 말씀해 주셨으니까 말입니다(마태복음 25장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요일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이웃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형제와 자매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에서 벗어나는 것은 모두가 다 외식이요 거짓이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성도라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고 그와 같은 삶을 통하여서 비로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골1: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가슴을 넓혀야만 합니다. 좁은 가슴으로는 결단코 사랑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네 사람의 신생아와 그 어머니를 보고 있습니다. 윤경, 하영, 선영, 수원 집사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들의 공통분모가 하나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전화를 하면 병든 사람처럼 힘이 없고 넉다운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러냐?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면 똑 같이 대답합니다. “아니요, 아픈 것이 아니라 잠을 자지 못했어요.”라고 말입니다. 한 시간 두 시간 마다 신생아에게 젖을 먹여야 하니 잠을 자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직 나이도 어린데 그 어린 생명을 위해 잠도 자지 못한 채 수고하면서도 한곁 같이 기쁨으로 헌신하는 것을 보면서 엄마는 결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그 어떤 것도 품고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자니 가슴이 넓어야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좁은 가슴을 사랑으로 열어야 합니다
영국의 기독언론 ‘프리미어크리스채너티’의 정치 에디터인 마틴 이든은 최근 많은 기독인들이 디지털 바리새인이 될 위험에 처해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그가 말하는 디지털 바리새인이란 온라인과 SNS 등에서 특정한 사안에 대해 편협한 성경해석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기독교인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틀 테면 영국 성공회가 지난 해 말 사상 처음으르 사라 멀랠리라는 여성을 성공회의 주교로 임명 하였습니다. 그러자 기독 네티즌들이 극렬하게 비판을 하였는데 그들은 고린도전서2:12절의 말씀을 근거로 들면서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말씀입니다.
(딤전2:12)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에 대해서 이든은 성경 곳곳에 여성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게 사용 되어졌다는 사실을 그들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하였습니다. 이를테면 많은 여성들을 하나님은 실제로 많이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눅8:1-3)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 새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든은 말씀을 가지고 이웃이나 형제를 비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덧붙였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옹호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더 위험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웃에 대해 “네 몸과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불신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형제를 비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서 가장 우선되고 중요시 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장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감동 되고 평소에 남을 귀중하게 여기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와 같이 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직면하게 됩니다. 장자는 아버지도 사랑해야 했었고 또한 동생도 비록 탕자이기는 하였지만 자신의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것 이외의 어떤 일도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도 비판하고 동생은 증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자들은 그를 일컬어 “집안의 탕자”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비판입니까? 자기는 아버지를 잘 섬기고 아버지의 재산이라면 염소 새끼 한 마리라도 낭비하지 않았다고 강변하지만 그것이 아버지를 기쁘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리고 거지가 되어 돌아왔지만 아버지를 인정하고 아버지께로 가면 배라도 불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는 더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최근 한국에서는 참으로 지저분한 공방이 오랜 세월 계속 되고 잇는데 경기도지사인 이재명씨와 김부선이라는 배우의 전쟁이 그렇습니다. 거기에다 공지영이라는 작가가 김부선씨를 편들면서 더욱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러자 많은 네티즌들이 공지영씨를 비판하고 욕을 하는가 봅니다. 숱한 악플들로 인해 고통을 당한다는 소식을 들은 동료 천주교 신자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 낫겠는가? 아니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는 것이 낫겠는가?”라고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교만하여 자신은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라고 자부했지만 요즘 들어 이 말을 듣고 가슴이 떨렸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로 위로와 고통을 받지 않고 고고하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걸어가고 그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을 받겠노라고 하였습니다.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기쁨이 되는가를 두 아들을 통해서 극명하게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 의에 빠져 자신은 정당화 하고 타인은 판단하는 것보다 차라리 죄인이 되어 아버지의 품으로 항복하고 돌아오는 것이 훨씬 더 아버지의 기쁨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어쩌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장남과 같이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사람들을 다 판단하면서 자기 자신을 가장 옳은 냥 자신의 정당성과 자신의 의에 빠져 그렇게 집안의 탕자처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똑바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제아무리 잘나고 완벽하게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 가슴 속에 사랑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고전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으로 우리들의 빈 가슴을 채워야 합니다. 가슴을 넓혀서 더 많이 채우면 채울수록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삶이 윤택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의를 다 행하고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다 안다고 자부할지라도 이와 같은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못난 “탕자”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무조건 넓은 가슴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넓은 가슴에 예수님을 닮은 따뜻한 사랑을 채워가야 하겠습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느 덧 10월도 마지막으로 저물고 있는 시점에 우리는 지금 서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밝히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사람은 다 제 나름대로 어리석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길은 비록 탕자가 되었을지라도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장남과 같이 스스로의 의에 빠져 아버지도 판단하고 하나밖에 없는 동생도 적대시 하며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는 삶을 살아서는 결코 안 되겠습니다. 그렇게 바르고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려면 무엇보다도 마음과 가슴을 넓혀야 합니다. 좁은 가슴으로는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없을뿐더러 결단코 남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넓은 가슴으로 삶의 여유를 가지게 될 때 비로소 아버지도 이해하게 되고 동생도 너그럽게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 밝히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좁은 마음을 넓게 유지할 수가 있을까요? 우리들의 가슴에 하나님을 품고 말씀을 품고 믿음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사랑의 밑천은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같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잔인한 원수들이라도 용서하며 축복하는 그런 너그럽고 풍성한 사랑으로 우리들의 빈 가슴을 채워가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복된 날 하나님 전으로 올라와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풍성한 은혜와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주후 2018년 10월 28일
1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