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13일 주일낮설교 (내가 택한 그릇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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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13 January 2019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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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택한 그릇이라!
선교주일
1. 13, 2019
本文:사도행전9:10-22
說敎:崔 仁 根 牧師
오래 전 서부 아프리카 기니에 김진봉, 정순영선교사님을 찾아 갔을 때 32살의 예쁘장한 여자 선교사님을 보고 마음 깊이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도 우리들과 같은 때에 기니에 막 도착한 참이었습니다. 100내지는 110도까지 온도가 올라가고 물과 전기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척박한 그곳까지 처녀의 몸으로 선교하러 온 그 자체가 엄청난 감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잠깐 다니러 간 짧은 시간에도 그곳에서만은 살 수가 없겠다고 여겨졌는데 그곳에서 연약한 여성이 삶의 뿌리를 내리며 온전히 헌신하겠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왔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느낀 것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선교사는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살기 좋은 조국과 부모형제를 버려두고 꽃 같은 처녀의 몸으로 그런 척박한 곳에서 복음을 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입증되고 있는 사실입니다. 초대교회의 집사였고 예수님을 증거하던 전도자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데 앞장을 섰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성도들을 잡아 죽이던 살인마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도가 되었다는 좀처럼 믿기 어려운 사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삶의 주인공이 오늘 우리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예 그를, “내가 택한 그릇이라.”고까지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행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도 바울 그는 믿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유대인들에게는 배신자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예수님께서 택하신 목적 그대로 예수님을 증거 하는데 일생을 다 바쳤던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2019년도 선교주일을 맞아서 오늘 우리들도 이렇게 한 번 가면 끝인 인생을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지 사도 바울을 통해서 도전을 받고 신선한 변화를 만들어 가는 은혜를 덧입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택한 그릇이라!
대한민국은 지금 2만 명이 넘는 선교사들을 전 세계에 보내는 선교대국이 되었습니다.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님들을 파송하고 있고 지금도 젊은이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어 그들을 선교사로 훈련하는 훈련장이 부족하여 밀리는 지경이라니 21세기의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언어와 문화와 음식이 다른 타국에 가서 예수님을 전하며 일생을 보내겠다는 젊은이들이 그렇게 모여들 수가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사람의 역사가 아닌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수많은 선교사님들을 만나 보았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보내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보통 사람들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놀라운 자부심과 기쁨이 가득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맛을 본 사람은 결코 그것을 내려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사도 바울은 모든 선교사들이 다 그랬듯이 엄청난 고통과 죽을 고비를 수 없이 많이 넘긴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인물들 중에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말을 담대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쁨과 감사였습니다.
(살전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고 말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선교하는 분들에게는 남다른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함께 공부하면서 선교사로 헌신하고 선교지로 떠나지는 못할지라도 후원하고 보내고 이웃들에게 전도하는 사명만은 감당해 가겠다는 결심으로 풍성한 주님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주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을 전하고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내고 허망하게 생명을 낭비하는 사람들에게 소중한 삶의 길을 가르쳐 주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며 복음 전하는 분들의 삶은 단 하나도 헛되지 않아 역사에 남고 하나님 앞에서 풍성한 삶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그처럼 소중한 삶을 살고 주님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하나님의 칭찬과 상을 받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복음 전할 일꾼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십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일생을 헌신한 사도 바울의 간증입니다.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님을 추종하는 성도들을 잡아 죽이던 자신이 어떻게 사도가 되어 그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증거인 것입니다. 그의 고백을 잠시 한 번 엿보고 그 배경을 통하여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행9:1-5)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것이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처음 만난 역사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복음 전도자가 되기 전에 무엇을 하였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악질적으로 예수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결박하던 자였습니다. 그러한 그를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찾아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급격하게 만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잘난 사울의 눈을 순식간에 장님이 되게 만들어버리셨습니다.
(행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이 제아무리 잘나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하루살이만큼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밝히 읽어보고 깨닫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손 하나 대지 않으시고 잔인하던 사울을 순식간에 거꾸러뜨리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온전히 주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악인이 선인이 될 수도 있고 선인이 악인도 될 수 있으며 잘 나가던 사업이 한 순간에 망할 수도 있고 망해가던 사업이 순식간에 흥해질 수도 있습니다. 사울을 순간에 넘어뜨려 항복하게 만드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그 잘난 사울을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만드시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잘나 스스로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으로 달려가던 그가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제아무리 잘나도 스스로 걸음조차 걷지 못한 채 남의 손에 의해 끌려가는 존재가 되는 것이 순간이라는 사실을 가슴 섬뜩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렇게도 잘났다는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세상만사 하나님께서 주셔야 누릴 수 있고 하나님께서 가져가시면 돌려 달라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초라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제자들이 주님께서 부르실 때 단 한 마디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즉석에서 순종하고 따랐던 것입니다.
(마4:21-22)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마9: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권세입니다. 이 종은 바보라서 사랑하는 부모형제를 버리고 가난하고 외롭고 힘든 이 길을 46년 동안 가고 있는 줄 아십니까? 모두가 다 주님께서 하시면, 주님께서 부르시면, 주님께서 명령하시면,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제자의 직분을 받은 것이 우리들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고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오늘 우리는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디 한 번 거역해 보십시오. 그 결과는 입에 담기도 두려운 실로 엄청난 것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관해서도 가감 없이 모두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버려두고 원점으로 되돌아가 어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어떤 결과를 그들은 체험하였습니까?
(요21:1-4)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하지만 이것은 매우 양호한 경우입니다. 가룟 유다는 엄청나게 더 비참하였습니다.
(행1:16-18)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하나님 앞에 거역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이처럼 평범한 것 같은 말씀으로 비범하게 오늘 우리들을 교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와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기는 자들을 복이 있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시112:1)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128:1)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고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얼마나 어리석은 교인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스스로 일꾼이 되고 스스로 일꾼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너도 나도 목사가 되어 목사의 사명을 커녕 세상에서 영화를 누리는데 악용하며 사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장로, 권사, 시켜주지 않는다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고 장로, 권사로 시킨다고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2019년 새해에는 제발 고집부리고 제방식대로 인생을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섬기며 불러주셨으니 순종하며 따라가는 순전한 일꾼들로 거듭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을 부르신 목적은 전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서 왜 하나님께서 사울을 거꾸러뜨리시고 부르셨는지 그 목적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행9:10-16)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사울을 친히 택하셨는데 그 이유는 오늘 본문 15절에 밝히 기록된 바와 같이 예수님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너무나도 그 목적이 분명합니다. 그렇게도 악랄하고 잔인한 사울을 하나님은 왜 친히 택하시고 굴복시키시고 아나니아를 보내시어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까? 그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요 초대교회 집사였던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살인자인데도 말입니다.
(행7:55-58)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는 말씀처럼 사울은 이 잔인한 살인마들의 증인이 될 정도로 악에 물들어 있었던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를 선택하시고 구별하셔서 성령님으로 충만케 하시고 새롭게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행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역사하신 목적은 오직 단 하나 예수님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거듭나고 나서 한 일을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행9:20-22)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 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잡아 죽이던 그가 그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이처럼 놀라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는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면 수군거릴수록 더욱 담대하게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유대인들이 그 말씀에 굴복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께서 친히 하시는 놀라운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오늘날 비록 온전하지 못해서 욕을 먹으며 살더라도 예수님을 담대하게 증거하면 그 전도를 통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온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전하는 우리들 때문에 죄인들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전하는 우리들을 통하여서 예수님께서 친히 역사해 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제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스스로 위축되어 물러서지 말고 담대하게 예수님을 자랑하고 전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맡기신 사명이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잘난 사람 앞이라고 기죽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 없는 잘난 사람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출세하고 돈만 있으면 잘난 줄 알지만 출세하고 돈이 많아도 인생을 부끄럽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예수님 없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보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면 그보다 더 출세할 수가 없고 그 보다 더 부귀를 많이 가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부귀와 성공과 출세로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그 보다 더 불행한 자도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만 천하에 보여 주십니다. 헤롯 대왕이 바로 그 불행한 주인공이었습니다.
(행12: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출세하고 잘났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한 순간에 이 세상을 떠나게 만들어 버리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왜 우리들에게 복을 주셨는지, 왜 우리들에게 소중한 하늘의 직분을 주셨는지, 왜 우리들에게 오늘날 까지 건강을 주셨는지, 두려운 마음으로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손 하나 대지 않으시고 사울을 엎어지게 하시고 장님이 되게 하시며 헤롯을 죽이기도 하시는 권세 있는 왕 중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사울과 헤롯의 차이점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악을 행한 것은 일반이나 사울을 붙잡아 사용하시고 헤롯은 죽이셨다는 것이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합니다. 못난 우리들이지만 헤롯같이 되지 아니하고 사울과 같이 되기를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무조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이 죽어서 아무 것도 못하는 것 보다 살아서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기를 더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해에는 새 직분을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만방에 전하라고 말입니다.
(막16:15-18)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도와 선교는 할 일 없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사람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 받고 직분 받고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다 해야 하는 의무요 사명입니다. 올 해는 우리 모두 이 복된 일에 전념함으로 우리들의 소원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는 기적을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하시고 지켜주십니다
사울이 이렇게 순식간에 돌변하여 자기가 핍박하던 예수님을 증거하니 많은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피하며 동족들인 유대인들을 배신자라고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행23:20-24)
대답하되 유대인들이 공모하기를 저희들이 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묻기 위함이라 하고 내일 그를 데리고 공회로 내려오기를 당신께 청하자 하였으니 당신은 저희 청함을 좇지 마옵소서 저희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 여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매 이에 천부장이 청년을 보내며 경계하되 이 일을 내게 고하였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고 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마병 칠십 명과 창군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하고 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
라는 말씀과 같이 사도 바울을 잡아 죽이기 위해 40여명이 동맹을 하고 술수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정보가 누설되게 하시고 위에 기록된 말씀처럼 어마어마한 군사를 동원하여 사도 바울을 보호하였던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서 감옥에까지 갇혔으나 하나님은 참으로 놀라운 기적으로 그를 풀어주었으며 이를 통하여 간수장이를 전도하는 또 다른 기적을 만들어 내시기도 하셨습니다.
(행16:22-26)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쓰시는 일꾼들을 어떻게 보호하시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신비로운 광경입니다. 그래서 성군 다윗은 단도직입적으로 선포하여 놓았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계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23:1,4)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것이 없다면 이 땅에 누가 주님의 종이 되어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고통과 가난과 보장 없는 미래를 두고 주님을 쫓아가겠습니까? 이는 주의 종으로 평생을 살아온 이 종의 간증이요 모든 주님의 종들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강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의 일꾼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 다 살고 모든 사람이 다 가야 하는 그 순간을 만났을 때 이보다 더 감격스럽고 감사한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생을 헌신하고 바쳤던 사도 바울은 당당하게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딤후4:6-8)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고 말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2019년도 선교주일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때를 따라 일꾼들을 선택하십니다. 그 복된 자들이 바로 오늘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오늘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과연 어떻게 복음 증거자들을 선택하시고 사명을 주시며 보호하고 지키시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목적 없는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을 선택하시고 일꾼들로 구별하신 목적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각양 능력으로 보하시며 지켜주시며 풍성케 해 주십니다. 단순하게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는 신앙생활은 결국 자기 의에 불과하고 하나님의 근심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 분연히 일어나서 몸으로 복음을 전하고 재물로 후원하고 기도로 능력을 받는 그런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우리들의 자녀들도 다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서 신나게 새해를 승리할 수 있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주후 2019년 1월 13일
선교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