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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9년 1월 20일 주일낮설교 (이 마음을 품으라!)

2019년 1월 20일 주일낮설교 (이 마음을 품으라!)

이 마음을 품으라!

1. 20, 2019

本文:빌립보서2:5-11

: 牧師

한 때 한국 방송국에서 방영된 허준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허준은 조선의 최고 의사가 되었고 끝내는 왕의 병을 돌보는 어의가 되는 조선 최고의 명의가 되어 동의보감을 기록한 인물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매우 어린 나이에 의술을 배우고 싶어 의사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의사는커녕 차가운 새벽에 먼 곳에 있는 물을 길어오는 고된 일만 하게 됩니다. 물지게를 져보지 않았던 그는 차가운 새벽에 물을 길러 지고 오다가 출렁거리며 쏟아지는 물을 온 몸으로 적시며 동상에 걸릴 정도로 고생을 하였으나 끝끝내 의술을 배우겠다는 집념 하나로 이겨내어 결국에는 의술을 배우고 어의까지 되어 조선 최고의 명의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되돌아보면 제자의 길이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의 제자가 되어 무엇을 하다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하겠는지, 한 번쯤은 고민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어차피 한 세상 살고 가야 하는 인생이 오늘 우리들이라면 무엇인가 인류와 자손들에게 유익한 삶을 살아야 하겠기에 말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에게 한 가지 거룩한 명령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 예수님을 가르치고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있으면서도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들을 향하여 강하게 명령하는 것을 보면 그 길이야 말로 감옥에 갈지라도 따라가야 할 길임을 그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경험보다 더 강력한 스승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 붙잡힌 사람이었습니다. 전혀 자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를 위해 그는 자기 자신의 소중했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버렸고 결국에는 그 예수님을 전하다가 감옥에까지 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후손들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 같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입니다. 이는 그 길이 그만큼 가치 있고 쫓아갈 만한 소중한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온 몸으로 겪어보고 하는 말씀이니 그냥 지나쳐 들을 일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인생 다 살고 후손들에게 당당하게 말 해 줄 수 있는 그 무엇인가 확실한 증거를 남겨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들도 사도 바울과 같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경험하고 확신해야만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오늘 말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듣고 배우고 깨닫는 축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이 마음을 품으라!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많이 배운 사람답게 매우 간결하면서도 매우 강력한 어법으로 하나의 명령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는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도치법으로 기록되어진 문장입니다. 원래 이 말은 너희 안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인 것입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에 사도 바울은 이 마음을 도치시켜 앞에 먼저 쓰고 다음에 이 마음이 곧 예수님의 마음임을 강조하는 어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며 그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에 예수님을 채우고 마음이 변화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만의 어법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도 우리들에게 마음을 요구하시며 그 마음을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듯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무엇보다 이렇게 소중한 마음에 예수님을 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온갖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우리들의 마음을 비우고 그 마음에 예수님의 마음을 채우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제자의 길임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에 담아야 할 예수님의 마음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요?

겸손한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매우 명쾌하게 예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군살 하나 없는 단백하고도 분명한 증거로 예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기록해 두었습니다.

(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실로 이것은 엄청난 말씀입니다. 육신에 젖어 있는 오늘 우리들은 감히 이해조차 할 수 없는 그런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말씀과 하나님께서 종이 되셨다는 말씀이 바로 이것을 입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말씀들이 한결 같이 오늘 우리들이 공감할 수 없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위치가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모든 말씀을 단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바로 겸손한 마음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친히 자기 자신을 그렇게 표현하시기도 하셨습니다.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이 마음을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 바로 이것이 없이는 예수님의 제자는커녕 제대로 된 신자도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남보다 낫다는 우월감과 그것으로 남을 무시하는 안타까운 습승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속에서도 이와 같은 문제가 노골적으로 나타났을 정도이니 더 무슨 말씀을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9:46-48)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런 일로 예수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 드린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와 같은 어리석은 모습을 제거하고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겸손한 마음으로 무장해야만 하겠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과 똑 같은 분이시지만 종의 형체를 입고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까지 내려오신 겸손함으로 우리들의 영원한 모범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진통제가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환자들이 수술과 질환으로 고통을 받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진통제를 누가 발명했는지 혹시 아십니까? 에든버러 대학의 제임스 심프슨 경이 개발하였습니다. 이것은 의학계의 노벨상이라 할 만큼 대단한 발견이었습니다. 그의 강의 시간에 한 학생이 노교수 심프슨 경에게 질문하였습니다. "선생님의 생에서 가장 뜻 깊고 소중한 발견 한 가지를 들라고 하면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는 한참 동안 머리를 숙이고 생각하고 있다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발견은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과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천국 보화는 낮은 곳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어느 발명도 독창은 없습니다. 전 인류의 공동 발명인 것입니다. 인류가 발견하고 발명하고 경험한 모든 것의 그 위에다 그것을 토대로 해서 조그마한 발견 하나를 하는 것이 발명입니다. 노예를 조상으로 가지지 않은 왕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왕을 조상으로 가지지 않은 왕도 한 사람도 없습니다. 강도나 살인자를 조상으로 가지지 않은 성자도 없습니다. 성자를 조상으로 가지지 않은 살인자나 강도도 없습니다. 거지를 조상으로 가지지 않은 부자도 없고, 부자를 조상으로 가지지 않은 거지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만 잘나서 위대한 업적을 남겨 놓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거기에는 있었고 그 누군가보다 더 위에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근본이신 겸손으로 무장하고 예수님을 쫓아가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복종하는 마음입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예외 없이 자기 생각과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자신의 모든 경험과 생각을 접고 온전하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은 그래서 고도의 인격과 신앙이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벗이요 믿음의 조상으로 삼기 위해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를 직접 시험해 보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이 백 살에 기적 같이 얻었던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22:1-3)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이와 같은 지시를 받고 조금도 망설이지 아니하고 아침 일찍 그 아들을 바치기 위해 사흘 길이나 되는 머나먼 곳으로 당장에 충발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무런 조건 없이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에게는 우리들의 생각이 있고 가치가 있고 경험이 있어서 하나님의 그와 같은 명령을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함께 보았던 창세기의 말씀은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항의 할 수밖에 없는 명령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이고 태워서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이교들의 악랄한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당시에는 비난 받아 마땅한 가장 악질적인 종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이도 아닌 거룩하신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교도들과 다름 없는 이처럼 끔찍한 명령을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이 있고 상식이 있었던 아브라함이 결코 순종할 수 없었던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단 한 마디의 질문이나 생각을 내 놓지 아니하고 그대로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이 사건과 대비 되는 요나의 케이스를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명령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 성에 있는 백성들을 구원하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명령보다는 자기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불순종하고 멀리 다시스로 도망을 가버렸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과 같이 악을 행하는 자들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으로 백 번 천 번 망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도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보내어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으므로 그는 멀리 다시스로 도망을 가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더 앞세웠던 것이 그의 불순종의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요나와 같은 가치관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신앙생활을 지속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인생여정에 끊임없이 풍랑이 일어나고 가는 길이 막히고 고통의 늪에서 허덕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 인생들에게 양보하시거나지지 않으십니다. 끝끝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고야 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은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예수님의 복종하시던 마음을 품으라!”고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늘의 하나님과 똑 같으신 분이시면서도 종과 같이 되셨고 하나님의 옷을 벗으시고 사람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복종하시며 죽으시기까지 하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자세와 마음을 가져야 그 분의 제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오늘 우리들도 예수님의 그 복종의 마음을 품고 순종하고 복종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 종부터 모든 성도들은 전혀 그렇게 살지를 못합니다. 끝까지 자신의 생각과 형편과 경험과 지식을 들고 나와 요나와 같이 불순종하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쳐야 합니다. 바꾸어야 합니다. 변화되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복종하고 따라가는 그런 복종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는 한 우리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요나서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하나님은 결코 인간에게 양보하시거나 물러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연히 풍랑만 만나지 말고 일찌감치 우리들의 생각을 접고 순종하고 복종하는 일꾼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독일 전역이 30년간의 종교전쟁으로 폐허가 됐을 때 눈물의 기도를 드리던 한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핍박받는 신자들의 가정을 찾아다니며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독일 전역에 흑사병이 나돌아 1천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독일은 마치 거대한 무덤과도 같았습니다. 목사 부부는 어느 날 중병을 앓고 있는 한 신자의 가정을 심방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 목사 부부는 참아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을 목도해야만 했습니다. 교회와 집이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해버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두 아들은 서로 껴안은 채 죽어 있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아들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울면서 조용히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들이 그 때 올려드린 기도가 훗날 정리 되어 하나의 시가 되었고 그것이 오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찬송가로 수록 되어져 있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 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국 향하여 고용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라는 내용입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벤자민 슈몰크목사입니다. 그 때 올린 기도에 곡이 붙여진 것이 바로 찬송가 431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입니다. 슈몰크 목사 내외는 고통과 시련까지도 순종하는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보상하십니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순종하고 복종하며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반드시 보상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종은 이미 새해 두 번의 설교 말씀에서 이것을 확실하게 증거해 드렸습니다. 베드로가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을 때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되었던 불쌍한 거지를 말씀 한 마디로 일으켜 세우는 놀라운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을 말입니다.

(3:1-8)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어릴 때부터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나 잡으며 살아갔던 어부가 어떻게 이처럼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낼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늘의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올인하고 그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는 그에게 권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소중했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던져버리고 온전히 예수님을 쫓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하여 죽은 자도 살려내는 놀라운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도 이미 전해 드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똑 같은 사람이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냈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습니까?

(20:8-11)

우리의 모인 윗 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다 한결 같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이 되어 순종하고 헌신하는 이들에게 주셨던 특별한 은총이요 권능이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선택하신 종들에게 막연하게 일만 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권능을 주시고 축복을 주시며 보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 본문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힘도 없고 연약하여 악인들의 손에 잡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죽으시기까지 내려 가셨으나 하나님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려내시고 지극이 놓은 왕 중의 왕이 되게 하시고 모든 자들로 그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그 주님을 그리스도라 시인하게 하시어 그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우리들의 충성스러운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우리들과 우리 자손들이 하나님의 이와 같은 풍성한 보상으로 영육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승리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 수많은 일꾼들이 한결 같이 위대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보상하시고 각양 좋은 것으로 채워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오로지 이 세상의 부귀영화만 축복인 줄 알고 그것만 쫓아가며 축복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섬기지 못하는 것을 보면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는 깊은 깨달음과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죽도록 충성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놀라운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벌써 새해를 맞은 지도 한 달이 저무는 1월의 중하순입니다. 더 이상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멋들어진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승리할 수 있도록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새롭게 새 출발하는 복된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어가야 하겠습니다. 그 길은 오로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처럼 아브라함처럼 순종하고 복종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 드리는데 있습니다. 그렇게만 하면 말씀에 진실하시고 능력으로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말로 다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거해 주고 성경이 인을 쳐주는 너무나도 명확한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만 살지 않고 영원을 사는 성도답게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들이 한결 같은 믿음과 예수님의 마음으로 속사람을 채워서 축복의 대상이 되어가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오늘도 거룩한 성전으로 올라와 찬양과 경배로 하나님을 섬겨 예배드리는 우리 모든 신실한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하나님의 풍성케 하시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주후 2019120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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