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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9년 2월 10일 주일낮설교 (땅을 받을 것임이라!)

2019년 2월 10일 주일낮설교 (땅을 받을 것임이라!)

       땅을 받을 것임이라!

 

 

2. 10, 2019

本文:마태복음5:1-6

     : 牧師

 

   지난 2월 5일 설날 대낮에 이웃 주민 부부를 살해한 70대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서울 광진경찰서는 70대 중반 남성 A씨를 살인 혐의로 검거했다고 5일 밝혔습니다. A씨는 이날 오후 3시 18분께 80대 부부 B씨와 C씨의 집에 찾아가 이들을 흉기로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약 2년 전부터   5층 건물 신축 용도변경 문제 등으로 B씨 부부와 갈등을 빚어왔다고 합니다. 조금만 더 양보하고 조금만 더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들과 문제를 해결하였다면 이렇게 극한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참으로 안타운 심정입니다. 5층 빌딩을 지을 때는 더 편안하고 더 풍부하게 잘 살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빌딩을 짓고 이웃을 살해하고 살인자가 되어 감옥으로 가버렸으니 그 빌딩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사건을 직면하면서 우리는 참으로 인생을 어리석고도 우매하게 살아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인생을 70년 이상 살았고 5층 빌딩을 지을 정도면 육신적으로는 제법 성공한 인생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 인생의 결과를 보면 기나긴 인생을 헛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외형은 그럴듯하게 성공한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인생의 내면은 모래와 같이 삭막하고 메말라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예수님은 제자 된 우리들에게 진정한 축복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마5:5-6)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오늘 우리는 온유라는 단어에 심오한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온유는 부드러우면서도 올바른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드러워야 합니다. 하지만 천지분간도 없는 그런 부드러움이 아니라 가슴에 똑부러지는 정의는 살아 있고 옳고 그름이 분명한 지혜를 또한 동반하여야만 합니다. 그래서 온유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은 바로 이 온유의 주인공으로 우리들에게 친히 모범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면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온유한 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땅을 받을 것임이라!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재물의 축복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는지 정확하게 그 해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온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5층 건물을 지어 놓고 이웃을 살해함으로 5층 빌딩에서 살지 못하고 감옥에서 살게 된 한 사건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안타까운 우리 인생의 현주소입니다. 자기의 능력으로 빌딩을 지을 수는 있지만 그곳에서 살지 못하는 불행을 만들어 놓는 것이 또한 어리석은 우리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온유해야 비로소 우리들이 지은 집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5층 빌딩을 가지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온유함이 축복인 것입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 축복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재물입니다. 이와 같은 재물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자기 자신이 모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재물을 많이 가지기만 하면 복을 누리게 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가 모으는 재산은 비록 모으기는 하였으나 누리고 행복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를 한 번 생각해 보신다면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요 그 돈을 좋아함이 도를 넘어 남의 것을 도적질하고 스승을 팔아서라도 돈을 챙기는 정도였습니다.

 

(요12:4-6)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마26:15-16)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저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는 말씀과 같이 그는 돈을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결국 돈을 받았고 또한 모았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를 보면 그 돈으로 행복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마27:1-5)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라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는 말씀과 같이 그는 한 번뿐인 인생을 이렇게도 돈의 노예가 되었고 그렇게도 소중하게 모든 돈을 제대로 한 번 써보지도 못한 채 스스로 목을 매고 죽고 말았습니다. 자기의 재산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쓰면서 행복하게 살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이처럼 하나님은 극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돈으로 5층 빌딩을 지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빌딩에서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에 악이 그의 인생을 감옥으로 보내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에 대한 보배로운 말씀 하나를 남겨 두셨습니다.

 

(잠16:8)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고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많은 재물이 아니라 제대로 된 재물로 제대로 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온유인 것입니다.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에서 우리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 유일한 길이 온유한 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온유한 자는 예수님을 닮은 자이니 하늘의 하나님께서 제대로 된 축복으로 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온유가 왜 이토록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해답을 듣기 전에 우리는 먼저 이 온유라는 말의 의미부터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장로교를 이 땅에 만들어 놓은 우리 장로교의 창시자라고 불리움 받는 John Calvin은 이 온유에 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 놓았습니다. 온유는 부드러운 마음자세로 모해에 쉽사리 노하지 않으며, 보복코자 하지 않으며, 자기에 대한 악의에 길이 참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중압감을 한 순간도 내려놓지 말아야 합니다. 참고 또 참으며 상대를 더 높이고 사랑할 줄 아는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그 모진 십자가도 무저항으로 감당하셨던 예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들을 진정한 제자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죄 많은 인간들에게 뺨을 맞으시고 더러운 침 뱉음을 당하시고 옷 벗기심을 당하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치욕을 당하시다가 결국에는 양손과 양 발에 못이 박히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도 단 한 마디로 그들에게 대항하지 않으시던 우리 예수님의 그 온유를 제자 된 오늘 우리들도 배우고 익혀야 예수님처럼 승리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하트마 간디(M. Gandhi)는 키가 5척 밖에 되지 않는 볼품없는 모습에 무명옷을 입고 생활했지만, 그는 그의 유명한 '무저항주의'를 통하여 인도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했습니다. 1930년 3월 12일, 그를 따르는 온유한 무리들은 이른바 '소금의 행진'이라고 하는 시위를 했습니다. 소금 전매법을 반대하며 소금을 만드는 곳을 향하여 인도의 독립을 외치며 나아갔습니다. 그는 수차 투옥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암살까지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늘 하나 들지 않고, 돌 하나 던지지 않고, 3백 년 동안 지배하고 있던 영국으로부터 인도를 독립시키고야 말았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온유한 자의 마음에 평화가 깃듭니다. 새로운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땅을 차지하게 될 뿐만 아니라 진정한 땅 천국을 상속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유모와 같이 온유한 자가 되었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진정한 생명을 만들어 천국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들과 주변을 살펴보면 단 한 사람도 이렇게 온유한 자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든지 자기가 더 인정받아야 하고 자기가 더 유익을 얻어야 하고 자기가 더 옳아야 합니다. 양보라는 것을 찾기는 쓰레기통에서 보석을 발견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예수님의 제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결단해야만 합니다. 조금 더 손해보고 조금 더 참고 조금 더 사랑하도록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들이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 신자로서의 인정을 받을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전2:7)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라는 사도 바울의 제자 됨을 오늘 우리들도 배우고 따라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배부르게 하시는 축복

 

   우리들이 밥을 맛있게 먹으면 배가 불러 옴을 느낍니다. 맛있는 음식이 산더미 같이 많이 있는데 배가 불러 더 이상 먹지 못하는 것도 슬픔입니다. 그런데 더욱 큰 문제는 아무리 먹어도 포만감이 없고 자꾸만 더 먹고 싶어서 지속적으로 밥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당뇨병입니다. 그러나 배부른 것은 단순하게 음식이나 육신에 관한 것뿐입니다. 이것을 조금만 더 은유적으로 말을 돌려보면 현대인의 재물관입니다. 아무리 가져도 배가 고프고 만족이 없는 상태가 바로 오늘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재물에 욕심을 내서 사업을 확장하다가 잘 되는 사업체까지 말아먹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시애틀 다운타운에서 가장 큰 빌딩은 컬럼비아빌딩입니다. 이 빌딩은 76층으로 시카고 이후 서북미쪽에서는 가장 높은 빌딩입니다. 그것을 건축한 첫 번째 주인은 그 건물을 저렇게 멋있게 잘 지어 놓고 부도가 나서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저렇게 큰 빌딩을 다 지어 놓았으나 당시 시애틀의 경제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아 빌딩의 공간이 임대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 달에 몇 백만 불이 넘는 전기료를 감당하지 못해 부도가 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재물의 현실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더 크게, 어떻게 하든지 더 많이 소유하고픈 인간의 욕망은 결국 망하고 빈 털털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인간의 욕망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축복을 보장하시면서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굶주린 배는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터이니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주림이 있는 자에게만 진정한 축복이 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이에 부응하는 삶으로 하늘의 축복을 받고 성공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고라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는 진정 의에 주린 사람이었습니다.

 

(시42:1-2)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이 말씀을 곰곰이 묵상해 보면 참으로 눈물겹도록 간절하고 애절함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고라 자손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성직을 탐내며 모세 앞에서 반역을 일으켰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땅이 갈라져 생매장 당하며 멸망했던 족속들의 후손이 아닙니까.

 

(민16:23-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회중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 사면에서 떠나라 하라 모세가 일어나 다단과 아비람에게로 가니 이스라엘 장로들이 좇았더라 모세가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이 악인들의 장막에서 떠나고 그들의 물건은 아무것도 만지지 말라 그들의 모든 죄 중에서 너희도 멸망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매 무리가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 사면을 떠나고 다단과 아비람은 그 처자와 유아들과 함께 나와서 자기 장막 문에 선지라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일을 행케 하신 것이요 나의 임의로 함이 아닌 줄을 이 일로 인하여 알리라 곧 이 사람들의 죽음이 모든 사람과 일반이요 그들의 당하는 벌이 모든 사람의 당하는 벌과 일반이면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심이 아니어니와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으로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속을 삼켜 산 채로 음부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 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게 멸망한 후손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갈망하며 목말라 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가장 아름답게 보시고 사랑하시고 복을 내려주시는 우리 성도들의 기본자세인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이 이렇게도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모하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어 놀라운 직분을 누리며 축복된 민족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어쩌면 우리 예수님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선언하시고 그 복이 하나님께서 친히 주시는 것으로 배부를 것이라고 하심이 이와 같은 고라 자손들의 역사적인 사건을 염두에 두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이 고라 자손들의 모습을 한 번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민26:11)

그러나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

 

(대상9:19)

고라의 증손 에비아삽의 손자 고레의 아들 살룸과 그 종족 형제 곧 고라의 자손이 수종드는 일을 맡아 성막 문들을 지켰으니 그 열조도 여호와의 영을 맡고 그 들어가는 곳을 지켰으며

 

이상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고라의 후손들을 어떻게 인도해 주셨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후손들은 하나님께서 죽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으며 그들의 소원대로 성전에서 수종드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훗날 다윗은 아삽과 함께 고라의 자손들을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거룩한 악단들이 되게 하고 구별된 은총을 누리게 해 주었습니다.

 

(대하20:19)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고라 자손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신다면 그들에게 더 이상의 소원이 없을 정도로 풍성한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모세를 대항하다가 땅이 갈라져 사람이고 짐승이고 물건이고 모조리 깊음 속으로 떨어져 망한 조상들에 비한다면 이처럼 성전을 지키고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고 하나님을 여전히 섬길 수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처럼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그들의 영혼이 사슴과 같이 하나님의 은총을 사모하고 목이 말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시42:1-2)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말씀과 오늘 예수님께서 친히 내리시는 축복의 메시지를 비교해 보면 거의 비슷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처럼 의에 주리고 목마른 고라 자손들에게 그들의 소원대로 축복을 회복하여 주심으로 더 없이 만족하고 배부른 축복을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목이 마르고 굶주린 삶이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와 같은 갈급함이 없으면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예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고파 본 사람만이 식량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총체적으로 믿음이 없고 불순종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 어떤 말씀을 하셔도 듣지를 않습니다. 그만큼 배가 부르고 갈급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하니 믿음이 없고 믿음이 없으니 결국은 불순종하고 그렇게 고집이 세니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1월 18일에 일어났던 끔찍한 멕시코 송유관 폭발 사고가 바로 그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사고는 지난 18일 밤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이달고주 틀라우엘릴판의 구멍 난 송유관에서 새어 나오는 기름을 인근 주민들이 양동이 등으로 훔쳐가는 과정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이 송유관에서 기름이 새어나오게 된 것은 도적놈들이 송유관에 구멍을 뚫었기 때문입니다. 기름이 분수처럼 하늘을 향하여 치솟으며 쏟아져 나오자 주민들이 양동이와 그릇을 들고 기름을 받아가려고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경찰들이 폭발의 위험을 감지하고 주민들을 물리치라고 안간힘을 다 쏟았으나 단 한 사람도 경찰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주민들은 공짜 기름을 받기 위해 더 많이 모여들 뿐이었습니다. 거의 800여명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아수라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서로 기름을 받으려고 부딪치며 달려들다가 옷과 옷에서 일어나는 정전기로 개스가 폭발하여 순식간에 130여명이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리고 21명이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 되었으나 워낙에 화상이 심해 더 사망자가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미련과 무지와 불순종은 이처럼 순식간에 비참한 비극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온 산천이 얼어터지고 눈이 온 세상을 뒤덮어 시애틀에서 거의 보기 드문 혹한에도 개의치 아니하고 성전으로 올라오신 우리 모든 빌립보의 신실한 성도님들을 주님으로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왕에 이처럼 하나님 앞에 올라왔으니 우리 모두 예수님의 축복의 말씀에 깊은 깨달음을 가지고 그 복을 받아 후손들에게 유산하는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성품이 이제는 좀 따뜻하고 부드럽고 사랑이 묻어나오는 온유로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모두 힘든 이민생활에 시달려 마음이 가을 낙엽처럼 말라버린 안타까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온유하고 따뜻해야 우리들이 그렇게도 소원하는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돈만 많이 가지면 된다는 그릇된 사고를 버리고 돈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사랑이라는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축복이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쓰게 하시고 누리게 하시는 재물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마음이 온유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가슴으로 깨닫고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진정한 배부름으로 행복할 수 있는 축복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려면 세상이 아닌 의에 목이 마르고 주려야 합니다. 육신은 영원히 배부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배부르게 하시면 배부를 수 있습니다. 그 길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챙겨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구별하여 순종하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말씀 그대로 우리들의 삶이 모자람과 아쉬움이 없는 배부름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귀한 예배자로 환경을 초월하여 성전으로 올라와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하나님만이 주시는 풍성한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주후 2019년 2월 10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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