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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9년 4월 7일 주일낮설교 (간절히 사모하라!)

2019년 4월 7일 주일낮설교 (간절히 사모하라!)

      

       간절히 사모하라!

 

 

4. 7, 2019

本文:창세기32:24-32

     : 牧師

 

 

 

 

   1990년 9월 소련이 문을 열자 시애틀에서 목사 장로 18여명이 소련으로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모스크바 크레믈린 광장에서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걸었습니다. 그 때 저는 그 좋아하는 콜라를 하나 꺼내 마시려고 하는데 갑자기 주변에서 아이들 십여 명이 몰려들었습니다. 콜라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은 여간 빛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저히 그들의 눈을 피하여 혼자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한 아이에게 주면서 서로 돌아가며 한 모금씩 맛만 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들이 콜라를 갈망하던 그들의 눈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이 그렇게 간절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도 적당하게 하지 말고 온 마음과 성품이 다 모아진 사랑을 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이 정성과 간절함이 있을 때에는 지체 없이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시107: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한 가지 분명한 자세를 취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간절함입니다. 그것은 또한 사모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에서는 엘리야를,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통하여서 이와 같은 간절함의 아름다운 모습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다음 말씀에서 그와 같은 모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왕상18:42-46)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편을 바라보라 저가 올라가 바라보고 고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저가 고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 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가로되 올라가 아합에게 고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눅22:42-46)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우리는 이 두 말씀 중에서 엘리야와 예수님의 기도하시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엘리야는 두 무릎 사이에 머리를 넣고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땀이 피가 되어 떨어지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기도의 간절함을 보여주는 참으로 놀라운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토록 간절하게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토록 놀라운 응답을 주셨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던 땅에 풍성한 비가 내리는 기적을 만들어 내었고 예수님은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나시는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처럼 간절하고 사모함이 넘치는 마음을 준비하여 하늘의 기적을 이 땅에 만들어 놓아야 하겠습니다.

 

   간절히 사모하라!


  

   오늘 본문 말씀은 한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절박한 상황을 기록해 놓은 말씀입니다. 바로 야곱의 위기입니다. 자기를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형 에서를 앞에 두고 사랑하는 처자와 재산을 보호해야만 했던 절박한 순간에 과연 야곱은 어떻게 처신하였는지. 살펴보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큰 도전과 롤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삶의 위기는 있기 마련이고 누구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감당해야만 하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야곱을 통해서 참신한 지혜와 위기 극복의 능력을 얻을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귀한 축복도 없을 것입니다. 함께 말씀으로 돌아가 그 놀라운 축복의 지름길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야곱은 끈질긴 기도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외삼촌댁에서 지속적으로 품삯을 사기 당하자 특단의 조치를 결단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의 개인 소유를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재산을 자기의 것으로 만든 다음에는 자기 아내들에게 결단을 촉구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여기에서 살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따라 도망 갈 것인지를 선택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야곱은 마침내 처자식들과 자신의 재산을 모아 삼촌 몰래 야반도주하게 됩니다. 하지만 앞에는 평생을 통해 자신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던 형 에서가 있었습니다. 뒤에는 삼촌이 따라오고 앞에는 형이 기다리는 이런 형국에 놓이게 된 야곱은 참으로 四面楚歌(사면초가)였습니다. 바로 그 때 야곱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창32:9-11)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이와 같은 기도에서 우리는 오늘 우리들과 다른 기도의 내용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호칭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부를 때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라고 불렀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역사적인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오늘 나는 나 홀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찾는 나의 하나님은 조상 대대로 역사해 주셨던 역사적인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참으로 이것은 놀라운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존재하는 것은 그와 같은 할아버지,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이요 지금 나를 도와주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나의 조상들을 나에게 주셨고 또한 그분들의 삶 또한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셨다는 놀라운 고백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 보다 더 든든한 고백도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은 자신에게 친히 나타나 주시고 말씀을 주시고 축복을 주셨던 하나님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9절과 10절 하반에 나타나는 말씀입니다. 야곱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감사를 드리는 모습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비로소 본론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창32: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고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에서 야곱의 이와 같은 기도의 자세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조상 대대로 인도해 오신 역사적인 하나님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말씀을 따라 말할 수 없는 풍성한 축복을 내려주신 하나님이심을 또한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짜로 구해야 할 기도의 제목을 맨 나중에 간절함으로 내어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기극복을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야곱의 아름다운 모습니다. 거기에다 하나 더 첨부하면 錦上添花(금상첨화)가 되는데 그것은 바로 간절히 사모하는 절절한 마음입니다.

 

(창32: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도대체 야곱은 어디에서 이런 배짱이 나왔을까요? 감히 하나님의 사자를 앞에 놓고 이렇도록 완강하게 축복해 달라고 매달리는 그런 사람이 과연 이 땅에서 몇이나 있겠습니까? 실로 야곱은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축복을 달라고 목숨을 걸고 매달렸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극한 정성이면 하늘이 감동한다는 뜻입니다. 실로 야곱은 이렇게 간절하고도 애절하게 축복을 사모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붙들고 늘어졌다가 결국에는 기적 같은 축복을 받아내고야 말았습니다.

(창32:28-29)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야곱과 같은 끈질긴 기도와 축복을 사모하여 끝끝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내는 그런 멋들어진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엘리사는 도전정신으로 갑절의 영감을 받았습니다

 

   열왕기하에서 우리는 또 다른 모습의 끈질긴 사람 한 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분은 바로 엘리사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로서 스승인 엘리야가 승천을 하려고 하자 끝까지 따라가서 끝내는 스승에게 머물고 있던 영감을 그것도 갑절로 받아내는데 성공하게 되는 인물입니다. 이에 관한 성경의 증거를 열왕기하에서 먼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왕하2:2)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 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왕하2:4)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매

 

(왕하2:6)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행하니라

 

우리는 위에서 똑 같은 모습을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스승인 엘리야는 제자 엘리사가 자신을 떠나가기를 요청합니다. 자신은 곧 하나님을 따라 승천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한사코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스승은 제자를 떠나보내려고 하고 제자는 떠나지 않으려고 하면서 그들은 무려 3번씩이나 부탁하고 거절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끝내 제자 엘리사가 떠나지 않으려는 의지가 확고함을 인식한 스승 엘리야는 마침내 그에게 물어봅니다. 그렇다면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제자 엘리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똑부러지게 대답합니다. 스승님, 갑절의 영감을 내게 주십시오.하고 말입니다.

 

(왕하2:9-11)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고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배울 수가 있습니까? 끈질긴 사모함입니다. 만약에 엘리야가 엘리사를 보고 너는 여기에서 머물고 있으라.고 했을 때 엘리사가 , 알겠습니다.고 하면서 거기에 머물고 있었더라면 그는 결코 갑절의 영감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스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3번씩이나 반복적으로 쫓아갔습니다. 여기에서 3은 완전수로 완벽하게 따랐다는 뜻입니다. 그랬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취하여야 할 소중한 진리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들에게는 이와 같은 끈질긴 바램이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배부르고 아쉬움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닐지라도 잘 먹고 잘 살기 때문일까요? 저는 46년의 기나긴 경험 속에서 엘리사처럼 끈질기게 배우고 얻으려고 끝까지 노력하는 제자를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후배 목회자들도 보면 선배가 밥을 사먹이면서까지 그들을 불러 모아도 곁에서 이민목회를 제대로 배우고 도움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후배들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긴 세월 시애틀에서 후배들을 보지만 선배만한 후배들을 만나보기가 어렵습니다. 쉬운 것 같아 보이고 별 볼일 없는 것 같아 보여도 이민목회에는 용빼는 재주가 없는 것입니다. 배우고 익이며 선배들을 통한 노하우를 얻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식이라도 얻으려는 간절함이 없으면 주고 싶지가 않는 법입니다. 이는 하늘의 하나님도 꼭 같습니다. 하늘의 소중한 축복을 쉽게 내어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모함이 없는데 왜 주시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은 소중한 것을 아무렇지 않게 내어 주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마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에게는 구하되 간절하게 사모하며 구하여야 하는 엘리사의 끈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사모함으로 기적을 보았습니다

 

   오늘날 교인들에게 과연 믿음이 있을까요? 모르긴 하지만 우리교회 성도들과 같이 훈련 받고 믿음에 반듯하게 서 있는 성도들도 그렇게 흔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 한 마디에 넘어지고 작은 것에 걸려 돌아서는 모습들을 종종 체험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조금 더 끈질기고 조금 더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가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도 감동하신 한 여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도 하고 가나안 여인이라고도 기록된 여인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성경 속에서 먼저 그 여인이 어떠하였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막7:25-30)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여기에서 우리는 가나안 여인의 애끓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딸이 귀신이 들려서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의외로 예수님의 반응은 냉정하였습니다. 당시 가나안 지역은 혼혈족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 유대인들은 그러한 사람들을 인간취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예외 없이 차갑게 대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자존심 따위는 개의치 아니하고 계속하여 주님의 은총을 사모하며 애걸하였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고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자신과 자신의 딸을 개에게 비유하며 무시하여도 안타깝게도 그녀는 주님의 은총을 구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는 밝히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고 말입니다. 도대체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자신을 개와 같이 취급하여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좀 주십시오. 하는 간절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처럼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다스리시며 온갖 권세를 다 가지신 주님 앞에서 자존심 따위가 대수이겠습니까? 개들이 먹는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고 매달리면 우리 주님은 반드시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사람의 진실과 간절함은 감동을 주게 되어 있는 법입니다. 실제로 중국에서 지난 주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주운 지갑을 주인에게 돌려주자 지갑 주인이 아이 병원비에 쓰라며 50만 위안(8453만원)을 쾌척한 사연이 알려졌다. 28일 베이징청년보에 따르면 산둥성 지난시에 사는 탕샤오롱씨는 두 살짜리 아이의 골수이식 수술을 위해 병원생활을 하고 있다. 이 수술에 드는 비용은 40만 위안(6762만원)이다. 그는 최근 병원 주변에서 지갑 하나를 주웠다. 지갑에는 2만 위안(338만원)의 현금과 신용카드, 운전면허 등이 들어있었다. 탕씨는 아이 병원비에 보태고 싶어 갈등하던 순간 지갑 주인도 본인처럼 병원비 때문에 고민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탕씨는 수소문 끝에 지갑 주인을 찾아 지갑을 돌려줬다. 지갑 주인은 딩이롱씨로 보상을 제안했으나 탕씨는 사양했다. 둘은 서로 연락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얼마 후 딩씨는 탕씨가 아이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알고 보니 딩씨는 거물 야채상이었다. 그는 자신의 창고에 순무 200톤이 있으며 5월 이전까지 처리하지 못하면 값이 떨어지기 때문에 순무 200톤을 탕씨에게 기증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같은 사연이 지방신문에 실리자 다음날 순무 200톤이 모두 팔렸다. 순무 판매대금은 50만 위안(8453만원). 아이의 수술비를 충분히 댈 수 있는 돈을 벌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사연이 알려지자 중국 누리꾼들은 "정직함은 언젠가 보상을 받는다."는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베이징청년보는 전했다.(2019년 3월 29일자에서 발췌)

우리 모두 이처럼 진실이 있고 성실함이 있을 때 사람의 마음도 감동을 받게 되고 하늘의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은총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부활의 달 4월 첫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조금 더 간절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마음을 원하시고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앞서 배운 말씀처럼 야곱이나 엘리사나 가나안 여인은 한결 같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소중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오늘 우리들이 쉽게 가지지 못하는 공통분모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간절함이었습니다. 간절하게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한 야곱이나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고 간절함으로 스승을 쫓았던 엘리사나, 자존심까지도 내려놓고 오로지 상 밑의 강아지처럼 주인의 부스러기라도 사모하였던 가나안 여인은 한결 같이 기적을 체험하고 성경에 기록되는 유명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비록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성공자라고 할지라도 하늘의 하나님의 것을 더욱 사모하고 기다리는 그런 목마른 사슴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땅의 소중한 보물들은 언젠가는 두고 가야지만 하늘의 하나님의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의 아름다운 계절에 서 있습니다. 우리들을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나는데 보다 더 간절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보다 더 사모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죽고 다시 사는 영광스런 몸을 덧입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오늘도 변함없이 성전으로 올라와 예배로 영광을 올려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우리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기적 같은 풍성한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주후 2019년 4월 7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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