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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31일 주일낮설교 (예수님을 오시게 하라!)

      

       예수님을 오시게 하라!

 

 

3. 31, 2019

本文:사도행전16:19-34

     : 牧師

 

 

 

   우리 교회가 복을 받아서 작년 8월부터 올 3월까지 다섯 명의 어린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하나 같이 예쁘고 건강하여 더욱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하지만 젊은 엄마들과 아빠들은 가슴이 짠하리 만큼 어린 아이를 키우느라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먹이고 씻기고 돌보며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말도 못하는 신생아를 돌본다는 것은 그만큼 힘이 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데 가만히 보면 신생아의 의사 전달법이 신통합니다. 울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없어도 아이가 울면 엄마 아빠가 긴장하며 달려갑니다. 그런데 그들의 유일한 의사표시시인 울음은 딱 3가지 이유에서 나타납니다. 배가 고프거나 기저귀가 젖었거나 어딘가가 아플 때입니다. 그러므로 아이가 울면 무엇보다도 먼저 기저귀를 만져보고 배를 만져보고 머리에 손을 얹어 열을 재어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이의 울음은 엄마를 부르는 사인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도 이처럼 우리들의 상황에 따라 엄마처럼 달려오십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험한 세상을 혼자서 허덕이며 절망하고 고통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달려오실 수 있도록 제대로 된 관계를 회복하고 예수님께서 달려오시지 않을 수 없도록 엄마를 부르는 아이의 울음과 같은 믿음의 사인을 제대로 준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도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하여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지 그 길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을 오시게 하라!


  

   성경은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고 어떻게 하나님의 그 풍성하신 은총을 덧입을 수 있는지, 의외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어야 하고 또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조용히 들여다보면 예수님께서 특별한 집이나 사람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애매하게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갇혔을 때 뜻하지 않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고 옥문을 다 열어버리시고 착고에 차인 제자들의 발에서 쇠사슬이 저절로 풀어지도록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것을 목도한 간수는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에 자결하려고 칼을 빼 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자기만 살겠다고 감옥에서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결하려는 간수를 달래어 복음을 전하고 그가 해를 입지 않도록 도와주는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결과 간수와 그 가족들이 몽땅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는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도들을 구원하시고 사도들은 또 다시 죄인들을 구원하는 이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목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상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한 놀라운 모습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을 받아서 복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그 복을 받지 못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는 멋을 배워야 합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그런 모습은 감동은커녕 하나님도 등을 돌리시는 어리석은 삶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 주님은 누구에게 달려오시는지, 오늘은 그것을 배우려고 합니다. 우리들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고 달려오시는 그런 멋들어진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하나님을 자주 만나는 그런 귀한 심령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최선을 다할 때 주님은 오십니다

 

   미국의 대통령을 지냈던 지미 카터의 좌우명에 얽힌 일화가 있습니다. 지미 카터는 본래 해군장교로서 해군사관학교 출신입니다. 그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부임하는 자리에서 사령관은 그의 신고를 받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카터소위 귀관은 사관학교 시절에 몇 등이나 했는가?"라고 말입니다.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던 그는 "네, 750명 중에 57등을 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사령관은 "귀관은 어찌하여 최선을 다하지 못하였으며 어찌하여 57등밖에 못했는가? 라고 꾸짖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난후부터 지미 카터는 "왜 최선을 다하지 못했는가?"라는 사령관의 말을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최선을 다 했고 미국의 대통령까지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서는 더욱 더 미국인들과 하나님의 가슴에 남는 위대한 봉사와 헌신으로 전 세계를 다니며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봉사활동을 줄기차게 해 왔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성실한 사람, 충성스러운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래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이 충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충성, 신실이라는 말을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최선을 다하지 못하면 어떤 업적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어느 날엔가 우리는 후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느 날 후회하지 않으려면 오늘이라는 날에 최선을 다하여 살아야 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나 주시고 기적 같은 역사를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복음서에는 바로 이와 같은 역사가 생생하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막6:45-5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이 사건은 얼핏 보면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셨다는 사건으로 지나치게 되지만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 이처럼 바다 위로 걸어서까지 제자들에게 오시게 된 배경이 잘 묘사 되어 있습니다. 조용히 이 사건을 들여다보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로 달려가신 하나의 요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풍랑을 대처하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깊은 밤, 깊은 바다에서 뜻하지 않게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그 풍랑 속에서 절망하고 있지만 않았습니다. 두려움에 떨고만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으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위기를 최선을 다해 극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예수님께서 친히 보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의 최선을 보셨기에 예수님께서도 그들을 도우시기 위해 물 위로 달려가셨던 것입니다.

(막6: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을 때 바로 우리 주님께서 달려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해 보지도 아니하고 머리로만 판단하고 절망하거나 포기하고 돌아서는 나약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옛날 어느 날 이벙철씨가 일본에서 한국 삼성의 중역들을 불러내어 삼성의 미래를 위한 중대한 전략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병철씨가 내 놓은 것은 반도체에 관한 건이었습니다. 하지만 비서를 비롯한 모든 중역들이 한사코 반대를 했습니다. 우리들 보다 몇 십 년을 앞서 있는 일본도 감히 꿈을 꾸지 못하는 그 반도체에 삼성의 모든 것을 걸었다가는 삼성이라는 간판을 내려야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중역들을 내어보낸 이병철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고민하고 있다가 급기야 서울로 전화를 해서 이건희를 오라고 불렀습니다. 부자가 마주 앉아 이 일을 다시 의논했습니다. 그런데 이건희는 망설임 없이 아버님의 뜻이 그렇다면 한 번 해 보시지요!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이병철은 내심 역시 내 아들이다!하면서 결단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IT의 핵심이 되고 있는 현재의 삼성 반도체입니다. 삼성이 반도체를 내 놓지 않는다면 당장 전 세계의 IT는 올 스탑해야 할 정도로 막강한 기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해 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하는 것은 기업정신도 신앙정신도 아닙니다. 해 보지 않고 실패하지 않는 것 보다 해보고 실패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들도 남은 삶 최선을 다하고 또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런 멋들어진 예수님의 제자들로 거듭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기다릴 때 주님은 달려오십니다

 

   인간의 기술이 하늘을 찌르고 바다 속 땅 속을 막론하고 광케이블이 전 세계를 뒤덮고 온통 세상이 손바닥에 나타나는 초스피드 시대를 지금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끊임없이 스피드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영화 한 편을 다운 받으려면 한 밤을 다 지세고 나도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단 몇 초 만에 영화 한 편이 다운 됩니다. 기차가 시속 300-400km를 달리고 하늘에서는 시속 2,000km로 날고 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니 오늘날 인간은 조금만 느려도 세상을 뒤집을 듯이 짜증을 내고 기다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남산으로 올라가다가 연인을 만들고 남산 정상에서 결혼을 하고 내려오면서 이혼한다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세상이 이렇다 보니 요즘 젊은이들은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다리기를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25년을 기다리게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시야를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600년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삼계탕의 재료인 닭은 21일 만에 태어나게 하셔도 사람은 10달을 엄마의 배속에서 자라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조급하고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잠21:5)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잠29:20)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조급하고 기다질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길이 참고 기다리는 자들에게는 친히 찾아오시고 풍성한 은총으로 보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1:47-49)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한 말씀이 오늘 우리들에게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밑줄 친 부분의 말씀과 같이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부터 보셨다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 엎드려 기도하며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예수님은 그의 그와 같은 기다리는 모습을 이미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렇게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은 고사하고 사람들의 생각까지도 다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마9: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눅6:8)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서거늘

 

이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묵묵히 기다질 줄 아는 멋진 제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조급하여 금세 포기하고 돌아서는 어리석고 경망스러운 초라한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고통과 눈물 속에서도 절망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기다렸다가 결국에는 기적을 본 사건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막10:46-52)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이 소경 바디매오는 여리고 바깥에서 학수고대 예수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문둥병자들은 성 안에서 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기다렸기에 그 문둥병자는 그 누구의 방해나 협박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소리 높여 예수님을 불렀던 것입니다. 이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결코 그를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친히 찾아오시고 소원을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기다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길이 참고 기다리면 반드시 예수님은 찾아오십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들의 믿음이 되어야 하고 기적을 보는 지름길이어야 합니다!

 

캘리포니아 남쪽에 '산주안 카피스트라노'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관광지인데 비둘기와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서 그야말로 원색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지역입니다. 그곳에서 비둘기를 잡으려면 가만히 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팔을 내밀고 손바닥을 폅니다. 그리고 날아다니는 비둘기를 가만히 보면서 5분, 10분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면 날아다니던 비둘기가 손바닥에 조용히 내려앉습니다. 그때 살그머니 잡으면 쉽게 잡힙니다.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욕심이나 인간적인 지혜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만 쳐다보고 조용히 인내하면서 기다리면 마치 비둘기가 손바닥에 내려앉듯이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위기에서도 우리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을 열어서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이 절망적인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더 큰 것을 주시기 위하여 잠시 지나가게 하시는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용기와 새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귀하고 값진 것일수록 그것을 주시기 전에 기다리게 하시고 또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찬송하고 기도할 때 주님은 오십니다

 

   오늘 본문은 찬송과 기도의 위력이 무엇인가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놀라운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찬송과 기도가 과연 어떤 환경 속에서 나오게 되었는지도 오늘 우리들을 무척 감동시켜 주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말씀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행16:19-26)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바울과 실라가 왜 이렇게도 모진 매를 맞고 감옥에까지 갇히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귀신에게 붙잡혀 점이나 해주고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낸 죄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귀신이 나가버리자 점을 더 이상 칠 수가 없어 돈을 벌지 못함으로 인해 바울과 실라에게 엉뚱한 죄를 덮어씌우고 채찍질하여 감옥에 가두게 하였던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의 입장에서 보면 이 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찬송하고 기도하였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오늘 우리들이 배워야 할 소중한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모든 것을 이미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경우에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찬송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이웃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그랬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이처럼 성숙한 모습으로 하나님께는 영광을 이웃 죄수들에게는 감동을 주니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옥문을 열어젖히고 그들을 묶고 있던 쇠사슬을 다 풀어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찬송과 기도의 위력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면 그리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일꾼들이라면 최소한 이 정도의 덕목은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찾아오시고 기적으로 화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웹스터 사전(Webster's Dictionary)에 의하면, 찬양이란 말은 '칭찬', '찬미', '존경' '환호' 그리고 '특별한 인정'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찬양한다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하여 우리들이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것이며 또한 특별한 인정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인정한다는 것은 또한 우리가 인정하고 있는 것을 용납하며, 그것과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질병과 재난 같은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생활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이 우리들의 생애를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될 일들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에 대한 기쁨이 없이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찬양이란 감사와 기쁨 양면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운명의 여신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사실은, 우리들의 생애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데 대한 우리들의 고백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감사한 고백으로 찬송하고 기도하게 될 때 하나님은 크게 영광을 받으시고 풍성한 응답으로 기적 같은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벌써 3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새해를 맞아 예수님의 제자가 되자!고 표어를 내 걸고 기도와 말씀으로 훈련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제대로 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려드리고 이웃들에게는 감동을 주고 우리들과 후손들에게는 풍성한 축복을 만들어 내는 그런 멋들어진 신앙생활을 회복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우리들의 노력과 결단과 믿음만으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예수님을 모셔야만 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예수님을 우리들의 삶에 오시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서너 가지로 예수님을 달려오시게 하는 방안을 찾아보았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현실에서 원망과 불평을 걷어내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하나님은 우리들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전에 우리들에게 주신 재능과 건강과 재물과 믿음으로 일단은 최선을 다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기특하게 보시고 우리들의 삶의 위기를 아시는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라도 달려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딜지라도 묵묵히 기다리는 믿음의 덕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했던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지 않았다면 오늘날 인류의 역사는 많이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스마엘을 만들지 않도록 끝까지 약속의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다리는 시간에 고통과 절망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기도와 찬양으로 영적인 성숙을 만들어 내며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실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은 복음서에서 이미 모범을 보여주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에게도 반드시 찾아오셔서 풍성한 기적으로 충만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를 기대하며 오늘도 변함없이 예배로 하나님을 섬기며 영광을 돌려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풍성한 은혜와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주후 2019년 3월 31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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