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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14일 주일낮설교 (고난이라는 축복)

      

       고난이라는 축복

 

고난주일

4. 14, 2019

本文:시편119:65-72

     : 牧師

 

 

 

   우리들이 잘 아는 "천로역정"을 쓴 저자 죤 번연(John Bunyen)은 젊었을 때 군대에 나가 보초를 서고 있는데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친구에게 부탁하여 대신 보초를 서있게 하고 마을에 나가 일을 보고 돌아오니 그 친구가 그만 적의 저격을 받아 시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에 번연은 자기 대신 죽은 친구의 죽음 앞에서 비통하게 울면서 그때 떠올랐던 기억을 중심으로 작품을 썼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혀지는 천로역정의 일부분이었습니다. 고통은 그 누구라도 싫어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그 고통을 통해서 더 귀한 것을 얻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2019년도 고난주일을 맞아서 우리는 고난을 단순하게 싫어하고, 겪지 말아야 할 것으로만 치부하지 말고 그것을 통해서 더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새로운 삶의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고통을 승화시켜 나가는 지혜를 터득하여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거룩한 고백인 것입니다.

 

(시119: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119: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는 말씀들은 한결 같이 고난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난을 싫어하고 피할 것이 아니라 겪어야 하는 고난이라면 그것을 통해서 더 나은 변화를 만들어 놓을 수 있는 그런 성숙한 신자와 인격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고통은 더 이상 우리들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축복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고난이라는 축복


  

   이 세상에서 우리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보다 더 잔인하고 모진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이시면서도 천하에 저주 받은 죄인처럼 우리 주님은 그렇게도 잔인하게 고난을 당하시고 끝내 그 고통으로 인해 돌아가시기까지 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주님의 그 고난은 인류를 구원하신 놀라운 밑거름이 되었고 모든 인류에게 축복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기록하여 두었습니다.

 

(사53:4-5)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고 말입니다. 말은 단순하게, 그가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고 하고 말았지만 그 비하인드에는 참아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우리 예수님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오늘 우리들이 나음을 입었고 또한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 주님의 그 고난을 우리들의 축복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고난이 축복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들에게 임하는 고난을 축복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하고 끝내는 오늘 시편 기자와 같이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난도 하나님의 허용이 없이는 결코 우리들에게 닥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고난을 주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해야만 합니다. 그러한 신실된 예수님의 제자들이 될 수 있도록 오늘 말씀에 깊은 깨달음과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욥이 당한 고난과 축복

 

   이 세상에서 욥과 같은 고통을 당한 사람은 결단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욥의 고난보다 그가 받았던 축복을 더 많이 기억하고 또한 사모합니다. 이는 단순하게 욥은 고난을 축복으로 승화시킨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대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욥은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품에 안긴 이후 수 천 년이 지난 후에도 사도들이 그의 인내를 기억하고 축복의 롤 모델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약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욥은 고난의 때에 입을 열어 저주하가나 좌절하는 말을 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참고 이겨냈던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고난의 때에 입을 열지 아니하고 견뎌내셨던 예수님의 모형이었습니다.

 

(사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고난의 때를 인내함으로 이겨내야 한다는 교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이 축복이 될 수 있도록 오늘 우리는 인내하고 참아내는 멋들어진 하나님의 제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인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생각하고 또한 욥을 모델로 삼아 우리들도 입을 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축복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래 전의 영화에 [워털루 브리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전쟁에 나간 남편 로버트 테일러의 이름을 신문에 발표된 전사자 명단 속에서 발견한 젊은 아내 비비안 리는 절망한 나머지 타락하여 길거리에서 웃음을 파는 불행한 직업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전사한 것이 아니었고, 신문의 보도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꿈에도 그립던 아내를 만나려는 희망에 부풀어 집으로 돌아오는 그의 가슴에는 옛날의 순수한 사랑이 그대로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기쁘게 맞아야 할 아내는 자기의 더럽혀진 몸을 부끄럽게 여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습니다. 물론 춤추는 직업을 가졌던 비비안 리와 명문의 아들 로버트 테일러의 결합은 당초부터 불행의 씨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우선 시어머니 되는 사람이 며느리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남편 없는 시집살이를 도저히 그는 감당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불행의 가장 큰 원인은 인내심의 결핍이라고 하겠습니다. 설혹 남편이 전사했다는 보도가 믿을 만한 것이고 또 가문을 내세우는 시어머니의 냉랭한 태도가 마음에 거슬리더라도 참을 데까지는 참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내심은 확실한 소망을 토대로 하지 않고는 생기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인내심으로 이어가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라고 사도 바울은 힘 있게 부르짖었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확신하는 사람만이 현재의 고난을 참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고 우리는 오늘 이 괴로움을 이기고 살아갑니다. 이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날, 주주님과 더불어 길이 살 것을 믿고, 인내의 아름다움으로 일관 하여 보십시다. 그래야 진정한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는 인내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난과 축복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만큼 무서운 고난의 길을 걸어간 인물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당대에 최고의 학문을 연마하였으며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고상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변화를 받아 그 예수님을 위한 고난을 생활처럼 온 몸으로 감내하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가 스스로 고백한 고난의 현실을 성경에 나타난 그대로 한 번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후11:22-27)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것이 사도 바울이 예수님으로 인해 당한 고난이었습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오늘 우리들이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인 무서운 고통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당한 고난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두고 가시처럼 그를 괴롭혔던 지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후12:7-10)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위대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의 잠재적인 고통인 가시의 이유를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너무나도 많은 은사를 받았고 신비로운 체험을 많이 하였기에 스스로 높아지고 교만하여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고통을 축복으로 주셨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고백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역시 그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은 힘들지만 그것은 정녕 축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거룩하게 승화시키고 있는 사도 바울은 역시 사도 중의 사도요 위인 중의 위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오늘 우리들도 사도 바울과 같이 기도해도 떠나지 않는 고통이 있다면 겸손 하라시는 하나님의 사인인 줄 알고 감사함으로 승화시켜 나가는 차원 높은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 프란시스의 제자가 어느 날 환상에서 하늘나라에 올라갔습니다. 그곳에 높은 보좌가 있어서 누구의 의자냐고 물었더니 성 프란시스의 자리라고 했답니다. 제자는 그 소리를 듣고 슬그머니 질투가 났습니다. 그는 꿈을 깨고 난 후에 자기 스승에게 가서 "선생님은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성 프란시스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지"라고 대답을 하자 제자는 항의를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대답은 위선이고 거짓입니다. 스승님은 성자이신데, 악하다고 하시면 살인자, 거짓 증거 하는 자들은 어찌합니까?" 이때 성 프란시스는 웃으며 아주 편안하게 대답했습니다. "자네가 잘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걸세, 만약 내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이 받았으면 그들은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 되었을 걸세, 내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고 사는지 자네는 잘 모르네." 바로 여기에 겸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가슴으로 기억하고 아무리 무서운 고통이 자신을 짓누른다 할지라도 그는 웃으며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고통이 만들어준 커다란 축복의 고백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고난과 축복

 

   오늘은 고난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기념하고 감사드리는 주일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감히 우리 죄인들이 필설로 표현한다는 자체가 語不成說(어불성설)입니다. 그만큼 주님의 고난은 오늘 우리들을 부끄럽게 하기 때문입니다. 흠도 점도 없으신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옷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만도 고통인데 스스로 죄인이 되시어 십자가에서까지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해답을 이사야는 아래와 같이 단백하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사53:4-5)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라고 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들의 그 무서운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렇게도 죄에서 해방되고

자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 역시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분명하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사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와 같은 고난을 순간이라도 잊으면 안 됩니다. 늘 주님 앞에 빚진 자와 같이 겸손하게 감사하며 충성스러운 일꾼으로 헌신하여야 합니다. 죽을죄로 인해 버림을 받아야 할 죄인은 이렇게도 복을 누리고 살아가는데 예수님께서 친히 죄인이 되어 하나님의 버리심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마27: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시기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순종과 헌신을 귀하게 여기신 하늘의 하나님께서 단번에 주님으로 하여금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살아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행2: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는 말씀과 같이 우리 예수님은 사망에 매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 사망을 정복하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고통을 부활이라는 엄청난 영광으로 바꾸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권세와 능력이 한이 없으신 예수님과 연합하면 오늘 우리들도 엄청난 부활의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2019년도 고난주일입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고통이 없이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길 또한 없습니다. 타락하여 죄인이 된 우리 인생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생명도 해산이라는 고통의 과정을 거처야만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피하여서는 안 됩니다. 기꺼이 우리 앞에 닥친 고난을 당당하게 이겨나가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욥이요 사도 바울이요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이와 같은 위대한 인물들을 거울삼아 오늘 우리들도 고난과 싸워 이기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이라는 과정을 통하여서 예비해 주신 고귀한 축복을 또한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고난주일을 주시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고난을 통하여서 자신을 돌아보고 겸손하게 변화를 덧입으며 고난이라는 연단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고 고난이라는 풀무를 지나면서 부활의 진정한 생명을 얻어야만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이룩해 드리려면 무엇보다도 고난을 감사하며 축복의 지름길로 여기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소망이 없는 고난은 바로 죽음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고난을 만나면 먼저 죽는 일부터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신자들은 달라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거룩한 무기로 고난이라는 대적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고 골을 넣은 축구선수가 감독에게로 달려가 영광을 나누는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고난을 극복한 감격을 주님께로 달려가 감사로 화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 오늘도 거룩한 예배자로 거듭나서 하나님께 영광스러운 예배로 감사를 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하나님만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와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주후 2019년 4월 14일

                                         고난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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