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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1일 주일낮설교 (죽어도 살리라!)

      

       죽어도 살리라!

 

부활주일

4. 21, 2019

本文:요한복음11:17-27

     : 牧師

 

 

 

   여호와의 증인들이 집총을 거부하며 종교적인 이유로 군 입대를 하지 않다가 감옥에 간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희한하게도 종교적인 이유로 입영을 거부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판결이 나오자 군대에도 가지 않고 감옥에서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여호와의 증인이 되겠다고 젊은 청년들이 봇물처럼 밀려들고 있다고 합니다. 군 입대를 피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얼핏 보면 여호와증인이라는 집단에 대박이 난 것 같아 보이지만 군에 가지 않기 위해서 오는 가짜 종교인들은 이미 국방의 의무조차 회피하는 질이 낮은 인간들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유익을 만들어 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인간들은 결국 쓰레기에 불과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기독교에 오면 사람이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고 하면 온 세상 사람들이 홍수처럼 밀려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선은 기독교가 대박이 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죽지 않기 위한 목적으로 오는 그런 인간들은 눈산처럼 몰려온다고 해도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쓰레기에 불과한 별 볼일 없는 존재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죽으면 즉석에서 다시 살아나도록 하지 않으시고 먼 훗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때에나 가능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신자들을 만들어 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참으로 인간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사람이 죽어 썩은 냄새가 나는데도 예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거짓말처럼 다시 살려내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거짓이 아닙니다.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사가 성경에 기록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어리석은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이 다시 살 수 있다는 가능성과 그렇게 다시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은 2019년도 부활주일로 사람이 죽어도 다시 부활하여 살아날 수 있다는 진리를 정확하게 배우고 우리들의 것이 될 수 있도록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부활이 허황된 이야기가 되지 않도록, 먼 훗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진리로 가슴 깊이 새겨두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죽어도 살리라!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들이 익히 잘 아는 나사로의 사건입니다.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는 부모 없이 외롭게 살아가던 형제 자매였지만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축복 받은 가족들이었습니다. 평소에도 누구보다 예수님과 가까웠고 서로 왕래가 잦았으며 극진히 예수님을 대접하고 섬겼던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불행하게도 나사로가 병들었고 결국은 그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오라비가 병들자 두 자매는 즉시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나사로의 상황을 전하고 예수님 오시기만을 학수고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더디 오셨고 그 와중에 오라비 나사로는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날씨가 더운 아열대 지방이라 급히 장례를 치루었고 오라버니의 시신을 무덤에다 두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시신에서는 이미 썩는 냄새가 나고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예수님은 그렇게 긴 시간이 흘러도 오시지 않다가 모든 장례가 다 끝나고 난 다음에야 오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이웃 지인들은 소망 없이 죽어버린 나사로로 인하여 슬픔과 고통으로 울고 있을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고 나서 많은 변화와 사건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대표적인 서너 가지 사건을 통해서 부활주일인 오늘의 말씀으로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믿으면 살리라!

 

   온통 슬픔과 절망 속에서 눈물바다가 되어 있던 그 지경에 드디어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기다리다 지쳐 있던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시자 버선발로 달려 나가 영접하였습니다. 하지만 막내인 마리아는 삐졌는지 달려 나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마르다도 장녀답게 나가 예수님을 영접은 하였으나 원망 섞인 언어로 예수님께 채근하였습니다.

 

(요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묘한 뉘앙스를 남기는 말로 예수님께 대한 기대를 놓지 않았습니다.

 

(요11: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고 말입니다. 바로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즉시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씀을 던져 주셨습니다.

 

(요11: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고 말입니다. 그러자 마르다도 그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놀라운 대답을 드렸습니다.

 

(요11: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

 

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중에 부활의 날에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조건이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요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고 말입니다. 참으로 이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진짜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예수님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와 같은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놀라운 해답이 이 한 마디의 말씀 속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른 성경에서 익히 알지 못했던 마르다의 놀라운 순발력과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마르다는 지체하지 아니하고 다음과 같이 분명한 말로 대답하였기 때문입니다.

(요11: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고 말입니다.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더 이상의 조건은 필요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마르다의 이와 같은 확실한 대답과 고백을 들으시고 마르다에 대한 확신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사로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적에는 이렇게도 단순한 조건만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평소에도 믿음이 없는 제자들을 책망하셨고 믿음만 있으면 놀라운 기적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막16:14)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마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눅17: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꼭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마르다와 같이 군소리 없이 내가 믿나이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고 외쳐야 하겠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비로소 기적이 묻어나오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체험적인 설교로 유명한 미국의 필립 브룩스(1835-1893) 목사는 임종 전 손님들의 방문을 일절 사양하였습니다. 그런데 법률가 잉거솔만은 방문을 허락했습니다. 잉거솔은 브룩스 목사가 임종을 앞두고 만난 유일한 외부 인사였습니다. "만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잉거솔은 진지하게 감사의 표시를 했습니다. 그러자 브룩스 목사는 잉거솔의 손을 잡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여보게, 다른 사람과는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 같아 특별히 따로 만나지 않았지. 그러나 당신과는 아무래도 천국에서 만나지 못할 것 같아 이렇게 만나게 되었네. 제발 우리 훗날 천국에서 만날 수 있도록 믿음을 가지게."라고 간청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의 본질입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믿고 소망하는 믿음이 오늘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울어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마르다의 믿음을 확인하신 예수님은 이제 여유롭게 슬픔 당한 자녀들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삐져서 주님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던 마리아가 드디어 일어나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울었습니다. 그리고 언니와 똑 같은 말로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요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고 말입니다. 이 모습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은 급기야 그들을 부등켜안고 울으셨습니다.

 

(요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종은 젊은 날에 외롭고 가난하고 힘이 들어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나올 그 때에 이 말씀을 읽고 참으로 많은 감동과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나를 위해, 나와 함께 눈물 흘려 줄 사람이 없는데 하늘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눈물을 흘려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놀랐고 또한 희망이 넘쳐났었습니다. 이 세상에 그 누가 과연 연약한 우리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십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 예수님께서 단순하게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관념에만 젖어 있지 말고 우리들의 아픔과 슬픔을 눈물로 함께 해 주시는 인격적인 삶의 주인으로 다시 가슴에 새기고 사랑하는 실제적인 믿음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님은 외로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나사로가 그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던가를 재확인하시고 통분히 외치셨습니다. 나사로를 어디에다 두었느냐?(요11:34)고 말입니다. 이는 내가 그를 다시 살려 너희들의 눈물 근원을 막아 주겠다.는 주님의 사랑과 의지가 담겨 있는 결의체 찬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체하지 않으시고 나사로를 살려 그들의 슬픔과 눈물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결국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참으로 꿈만 같은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비웃으며 돌아 설 그런 말씀이 실제적으로 기록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가 인도하는 대로 나사로의 무덤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죽어 이미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향하여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놀라운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거짓말처럼 수건을 동인채로 다시 살아나 무덤에서 걸어나왔던 것입니다.

 

(요11:42-44)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엄청난 능력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능력과 권세가 한이 없으신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부활은 이렇듯 단순하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 능력을 재확인하는 계절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힘겨운 삶의 현장에서 이제 이와 같은 우리 주님의 능력을 도입해아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기적을 오늘 우리들도 나사로와 같이 친히 체험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진정한 부활신앙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놀라운 역사는 사모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닌다고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듯이 그 하나의 조건은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들에게 믿음이 있어야만 그와 같은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요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능력은 우리들이 믿음이 있을 때 비로소 기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곧 믿음인 것입니다. 그 옛날 예수님의 제자들은 불행하게도 예수님께서 친히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조차도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히 노하시고 그들을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막16:14)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들의 이성과 경험으로 가능한 사실만 인식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현실을 초월하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몸으로 친히 경험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래서 도저히 이성으로 믿을 수 없는 그런 사실일지라도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매 아멘하고 믿는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와 같은 믿음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 인간 이성으로 절대 불가능한 부활의 역사를 친히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부활주일을 시작으로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무조건 믿는 믿음으로 단련 되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부활도 천국도 구원도 결국에는 체험할 수 없는 헛된 종교인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복된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2019년도 부활주일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개념이 바로 불신자들의 사상입니다. 하지만 우리 믿는 성도들은 우리 주님의 말씀처럼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신자와 불신자로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부디 오늘 부활주일 예배를 드리는 우리 빌립보의 권속들은 부활을 믿는 진정한 신앙으로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에게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세이프웨이에서 비싼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할 때 생기는 특별한 축복입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성도들을 만나보기 어려운 말세입니다. 오로지 육신적인 것으로 만족하고 슬퍼하는 그런 슬픈 세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와 같은 부활절을 통하여서 우리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시고 또한 그 가치를 재인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다 가진다 해도 목숨을 잃으면 그 모든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부귀영화보다 부활을 더 고기하게 여기에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 복되고 귀한 부활의 계절에 그 부활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거룩한 믿음이 우리들에게 넘쳐나서 나사로와 같은 기적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이를 위해 부활새벽을 깨우고 부활절 감사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우리 귀한 빌립보의 모든 권속들에게 부활의 신선한 기적이 충만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주후 2019년 4월 21일

                                         고난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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