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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일 주일낮설교 (경험과 믿음)

경험과 믿음

 

6. 2, 2019

本文:창세기22:1-8

   : 牧師

 

 

 

   미국에 유명한 신유의 부흥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는 청을 받고 그 교회에 일찍 도착했더니 현관에 어떤 앉은뱅이 부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부흥 목사는 그 여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부인, 여기 앉아서 누구를 기다리십니까?" "저는 앉은뱅이예요. 오늘 이 교회에 신유의 목사님이 오신다기에 그 분을 만나러 왔습니다. 목사님이 오시면 제일 먼저 병 고침을 받으려고 이렇게 문 앞에 앉아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꼭 병 고침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주위에는 동행자도 휠체어도 없었습니다. 목사는 물었습니다. "그 불편한 몸으로 어떻게 이곳까지 오셨나요?" "차를 타고 왔지요. 그리고 제 아들이 그 차 속에 휠체어도 넣어 왔어요 그러나 오는 도중 저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도착한 즉시 그것들을 모두 보내버렸습니다." "아니, 왜 보내셨습니까? 가실 때 어떻게 하시려구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이제 목사님만 만나면 걸어서 혼자 집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왜 필요합니까?" 이 말을 들은 목사는 무척 기뻤습니다. 그는 "자매님, 내가 바로 그 목사입니다. 꼭 나을 줄 믿습니다."하고 손을 잡아끌며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리 일어나라!"하고 외치니 그 즉시 그 여인이 일어나 걸어 다니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삭의 경험과 아브라함의 믿음

 

(창22:7-8)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이 말씀에서 우리는 이삭의 경험과 아브라함의 믿음을 대비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이삭은 지금까지 불과 나무와 번제물은 항상 같이 준비 되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고 또한 그렇게 경험하여왔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지금은 그렇지가 않고 번제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이에 대해 여쭈었던 것입니다. 이는 아버지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확신으로 대답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준비하시리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경험으로 묻는 이삭에게 대답한 아버지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이런 물음에는 선뜻 좋은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여러 곳에서 믿음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말하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라는 것이란 "Confident" 즉 확신하는, 믿는, 신임하는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신임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란 그 신임 받는 자가 얻는 실상인 것입니다. 여기서 실상이란 증명이란 말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는 자는 항상 그 속에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비록 형상적으로 보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속에는 확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챤 G. 로세티의 시에 바람(The wind)이란 시가 있습니다.


누가 바람을 보았는가?(Who has seen the wind?)

나도 당신도 못 보았다(Neither I nor you)

그러나 나무 잎이 흔들리면(But when, the leaves hang trembling)

그때, 바람은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Them wind is passing through)

바람을 본 사람 누구인가?(Who has seen the wind?)

당신도 나도 못 보았다(Neither you and I)

그러나 나무가 고개를 숙이면(But when the trees bow down their heads)

그때, 바람은 지나고 있는 것이다(The wind is passing by)

누가 하나님을 보았는가?

그의 마음속에 죄의식이 있을 때 그때 하나님은 내 곁을 지나가신다.

누가 하나님을 보았는가?

이웃의 아픔으로 눈물이 쏟아질 때 그때 하나님은 내 곁을 지나가신다.

누가 하나님을 보았는가?

골고다 언덕의 예수님, 그 신음 소리를 듣고 통곡할 때

바로 그때, 하나님이 내 곁을 지나가신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쳐드릴 때, 바로 그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최소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들을 불살라 바쳐도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다시 살려내실 것이라 확신하는 것이었습니다.

(히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경험과 베드로의 믿음

(요6:35-4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이것이 당시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실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요셉이 누군지, 그리고 그 요셉이 낳은 예수가 누군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좁은 마을에서 같이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들이 경험한 예수님은 결코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똑 같은 마음에서 그들과 같이 살았었지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6:66-69)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똑 같은 환경과 조건하에서도 경험과 믿음의 차이는 이렇게도 엄청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아니면 결단코 하늘의 역사를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영국의 계관시인인 테니슨이 친구와 같이 후원을 거닐며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친구는 테니슨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자네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나? 테니슨은 말없이 한참 걷다가 가장 아름다운 꽃 앞에 와서는 이렇게 입을 열었습니다. 여보게, 나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이 꽃과 저 태양의 관계와 같다네. 이 꽃은 태양의 빛과 열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네.

믿음의 사람 다윗도 고백하였습니다.

(시4:7-8)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느부갓네살 왕의 경험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믿음

(단3:13-18)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 오라 명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그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느부갓네살 왕은 뜨거운 풀무불 속에 던져 넣으면 다 타 죽고 말 것이라는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 불 속에서 건져 내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왕에게 고하고 있습니다. 과연 사람의 믿음은 어느 정도로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들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환경에 처해 있었다면 과연 어떻게 처신하였을까요? 바로 여기에서 경험과 믿음의 한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불란서의 나폴레옹이 유럽을 휩쓸고 갈 때에 그의 장군 한사람이 정예부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의 한 국경 도시인 펠드리히(Feldrch)를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도시의 주변 고지에는 수많은 불란서 군대가 진을 치고 쳐들어 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펠드리히 시에서는 비상 시의회를 소집하고 불란서 군에게 미리 항복을 해서 피해를 방지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모든 시민들로부터 존경받는 교회의 목사가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부활절이 아닙니까? 지금 우리가 우리의 힘을 의지한다면 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예정대로 교회의 종을 치고 예배를 드립시다. 그리고 나머지 일은 하나님께 맡깁시다. 시 의회에서는 이 발언에 모두 찬성하였습니다. 불란서 군대가 공격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교회에서는 기쁨에 찬 우렁찬 종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이 종소리를 들은 불란서 군인들은 밤사이에 오스트리아의 많은 지원부대가 도착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불란서 군대는 작전을 변경하여 오스트리아의 펠드리히 공격을 취소하고 다른 곳으로 돌아 가버렸기 때문에 그 도시는 군대도 없이 하나님의 간섭으로 승리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삶의 모든 결정권과 작전권을 하나님 손에 들려드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신약성경 속에는 믿음 이라는 뜻의 피스토스라는 헬라어 말이 600번이나 들어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믿음을 빼면 텅 빈 책이 되고, 그리스도인에게서 믿음을 빼면 정신 나간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사람의 경험을 따르지 말고 너무나도 확실한 믿음을 따라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주후 2019년 6월 2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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