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23일 주일낮설교 (하나님의 눈이 머무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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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23 June 2019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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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눈이 머무는 곳
6. 23, 2019
本文:신명기11:10-12
說敎:崔 仁 根 牧師
어떤 아이가 사과를 먹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얘야, 어디서 그 사과를 얻었니?"하고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과일 가게에서요" "아저씨가 주시던?" "아니, 안 주셨어요, 아무도 보지 않기 때문에 갖고 왔어요." "뭐?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하늘에서 하나님이 보고 계셔." 라고 어머니가 말하니까 애는, "괜찮아요, 가게에는 지붕이 있으니까 하나님도 못 보셨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우스운 이야기 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지만 우리 어른들 모두가 이렇지 않습니까? 心學(심학)의 철학자 왕양명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안다."고 했습니다만 우리는 모든 마음속까지 간파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마치 하나님이 소경으로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같이 여기는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캄캄한 밤에 검은 개미가 검은 돌 위를 기어가는 것까지 하나님은 모두 보고 알고 계시기 때문에, 당신이 아무리 깊은 곳에 숨고 인간의 눈을 피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앞에선 숨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그만큼 완전하시고 완벽하십시다. 이렇듯 하나님의 눈은 항상 우리들을 향하여 열려 있고 선악간에 판단하실 뿐만 아니라 힘들고 어려울 때 살피시고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눈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함께 공부하면서 위로와 은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가나안 땅을 향하여 하나님은 그 눈을 떼지 않으십니다
(신11: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1) 풍성한 열매를 주시려고
(시107:33-34)
여호와께서는 강을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으로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그 거민의 악을 인하여 옥토로 염밭이 되게 하시며
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강을 변하여 광야가 되게도 하시며 광야를 변하여 옥토가 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가나안까지 들어온 백성들을 하나님은 기적 같은 능력으로 풍성케 하시려고 그 눈을 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난하여 고통당하도록 그냥 두지 않으시고 친히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축복 받을 자세인 것입니다.
(출22:25-27)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
성경에는 가난한 자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친히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만일 약한 이들을 해롭게 하면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너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외롭고 힘없는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시고 계시는가를 잘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성도는 늘 약한 자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봔 다이크라는 사람은 우리가 비록 가난 할지라도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하고 누구나 도움을 받는 것을 좋아 하는 성품을 버려야 하며 남을 도울 때에 영육 간에 점점 성숙하여 진다고 했습니다. 미국의 철강 왕으로 불리우던 거부 카네기에게 신문 기자기 묻기를 “당신이 성공한 비결이 무엇인가, 그 비결을 오늘 미국 청년들에게 말해주시오.”라고 했을 때 그는 서슴지 않고 “성공의 첫째 비결은 내가 가난한 집안의 가난뱅이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내가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기 때문에 가난을 잘 알고 가난을 이길 수 있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 것입니다. 문필가였던 카네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근대의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불리우는 39명의 인물 전기를 쓴 후에 사람이 성공 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 그 공통점을 살펴보았는데 39명 중의 31명이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공통점을 발견 할 수 있었다는 것이요 그리고 대부분이 신앙인 이었다는 공통점을 발견 했다는 것입니다. 즉 성공의 공통점으로 가난과 신앙이 공통분모였던 것입니다. 그 후 다시 세계에서 가장 큰 성공자로 불리우는 사람 42명을 뽑아서 그들의 전기를 저술했는데 그때에도 42명중 32명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가난이 성공의 디딤돌이 되었음을 발견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남은 인생에게 결코 불행이 아니라 오히려 성공 할 가장 많은 잠재력을 가진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은 숟가락을 입에 넣는 자는 인생을 바로 배우기가 대단히 어렵다고 합니다. 괴테와 같은 사람은 눈물 묻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자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가난은 때로 인생을 인간답게 하고 삶의 깊이를 발견하게 합니다. 그러나 결코 가난 그 자체가 자랑이거나 가난 그 자체를 붙잡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가난의 노예가 되면 안 됩니다. 가난의 노예가 된 사람은 소망 없는 생활을 할 뿐 아니라 게으름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이러한 사람은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요 인색한 사람이요 생활에서 불평불만 걱정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비록 가난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가난의 노예가 되면 안 됩니다. 설사 내가 가난하지 않더라도 가난한 이웃이 있다면 결코 그 삶은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고먹는 자를 이웃 삼으면 불행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구제의 효율성을 살리기 위해서 그들의 구제금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놓았던 것입니다.
성전을 향하여 하나님은 그 눈을 떼지 않으십니다
(왕상9:3)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이렇듯 하나님께서 그 눈을 항상 성전에 두시는 것은,
1) 기도를 들어주시기 위해
(대하7:15-16)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
2) 우리들의 예배를 받으시려고
(합2: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성전을 사모하고 그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며 그 성전에서 찬양과 경배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다윗은 그래서 하나님의 기적 같은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단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왜 다니엘을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엎드려 기도하며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을까요? 바로 거기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동일한 의미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다니엘처럼 목숨을 내 놓고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면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내렸던 풍성한 축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중도덕을 잘 지키고 친구들에게 점잖게 대하고 주일날엔 예배에 참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것들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합니다. 단지 예수님을 내 대리인으로, 죽으신 내 개인의 구주로 맞아들일 때 구원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에이브라함 링컨은 위대한 인물이며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의 삶의 마지막 몇 달을 남겨놓고야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셨음을 아는 사람들은 드뭅니다. "나는 어머님의 기도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나는 그것을 언제나 따라했습니다. 어린 시절 나는 성경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도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남북전쟁 후 그의 임종 직전에 그는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Do you love jesus?" 그는 답하기를 "내가 대통령 직을 위해 고향 스프링 휠드를 떠날 때 나는 사람들에게 날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크리스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게티즈버그에서 나는 내 자신을 그리스도께 맡겼습니다. 이제 나는 진실로 말할 수 있습니다." " I do love Jesus! "형제여! 부모님의 믿음이나 자신의 착한 태도나 교회에 등록되었음을 의지 하지 마십시오. 링컨같이 당신의 믿음을 주 예수께 둘 때에야 비로소 영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진정한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라야 아벨의 제사와 같이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열납 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의인을 향하여 하나님은 그 눈을 떼지 않으십니다
(욥36:7)
그 눈을 의인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시고 그를 왕과 함께 영원히 위에 앉히사 존귀하게 하시며
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의인에게 그 눈을 떼지 않으시고 지켜보십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의인을 향하여 그 눈을 떼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1) 사랑하는 의인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시34: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거듭 그 눈을 의인에게 두신다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을 괴롭히는 대적들을 제거하시고 보호하시기 위함입니다.
(단3:19-26)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낯빛을 변하고 명하여 이르되 그 풀무를 뜨겁게 하기를 평일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을 명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 하니 이 사람들을 고의와 속옷과 겉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 때에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떨어졌더라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옳소이다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네 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느부갓네살이 극렬히 타는 풀무 아구 가까이 가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서 나온지라
이렇듯 하나님은 한 순간도 그 의인에게서 그 눈을 떼지 않으시고 계시다가 이처럼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기적같이 동행하시고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1500년 초 독일 아이스레벤 성당에서 찬양대가 연습을 하고 있을 때 소년의 노래 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습니다. 지휘자는 잠시 연습을 중단하고 문을 열어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열두 살쯤 된 소년이 서 있었습니다.
“너 거기서 뭐하고 있니?”
“찬양대원이 되고 싶어 노래를 불러 보았어요.”
“우리 찬양대는 모두 어른들뿐인데 네가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하니?”
소년은 이 질문을 받고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습니다.
“네. 예수님이 써주시면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마틴 루터였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이미 루터가 어릴 때부터 함께 하셨고 루터는 주님의 그와 같은 은총을 덧일 수 있을 만큼 당당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