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30일 주일낮설교 (떠난 자와 남은 자)
- Details
-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30 June 2019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 Hits: 469
떠난 자와 남은 자
6. 30, 2019
本文:요한복음6:66-71
說敎:崔 仁 根 牧師
사람을 상대로 하는 모든 일에는 “떠난 자들과 남은 자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람들을 고용하고 사업을 해도 그렇고 청소년 때부터 친구들과 이성을 사귀어도 그렇고 사회단체나 그룹 활동을 해도 이는 동일한 모습입니다. 특히나 목회를 하다보면 이것은 거의 생활이 되다시피 빈번하고 비일비재한 일입니다. 이것이 예외가 안 되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사역가운데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바라보게 됩니다.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의 엄청난 기적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아예 그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옹위하였고 그렇게 결집하여 로마를 정복하고 신천신지를 이룰 것으로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충격적이고 놀라운 사실은 그랬던 그들이 모두 욕을 하며 돌아섰고 하나 같이 다 떠나버렸다는 것입니다.
(요6:14-15)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요6: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6장 속에서 우리는 이처럼 극명한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어떻게 사람이 한 순간에 이렇게도 놀랍게 변할 수가 있을까요? 오늘은 이와 같은 말씀을 중심으로 “떠난 자와 남은 자”에 대한 말씀을 상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남은 자들이 되어 교회의 기둥이 되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떠난 자들
(1) 그들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자들이었습니다
(요6:41-42)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예수님을 임금으로까지 삼아서 그들의 욕구를 채우려고 했던 유대인들이 거기에는 관심이 없고 신비한 하늘의 메시지만 전하시자 돌변하여 원점으로 되돌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단순한 요셉의 아들로 치부하며 더 이상 예수님을 하늘로서 내려오신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정관념의 실상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비난하며 떠나버렸고 떠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예 그를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여 버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들의 고정관념이 예수님을 따르고 믿는데 얼마나 무서운 장애물이 되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스페인 출신의 프랑스 화가인 피카소가 기차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옆자리에 앉아 있던 승객이 피카소를 알아보고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선생님의 그림은 너무나 난해해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실체를 너무 왜곡하는 것 아닙니까?” 그 말을 들은 피카소가 다시 물었습니다. “실체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그 승객은 피카소에게 실체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려고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제 아내의 실체입니다. 만약 선생님이 제 아내의 그림을 그린다면 이와 같은 실체와 같은 모습을 그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참동안 그 사진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던 피카소가 비로소 그 승객에게 말했습니다. “당신 아내는 대단히 납작하고 쪼끄만하네요. 그리고 당신 아내가 당신 손 안에서 이처럼 꼼짝도 못하고 갇혀 있구려. 그러므로 이 사진은 당신 아내의 실체가 아니고 종이에 불과합니다.”하고 말입니다. 피카소는 일반 사람들의 이와 같은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화폭에다 그림을 그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다른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을 가두고 있는 고정관념을 깨뜨리지 못하게 되면 한치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사철 더운 하와이에서 밍크코트를 팔 매장을 연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더운 곳과 밍크코트는 절대로 걸맞지 않다고 하겠지요? 그것도 거액의 돈을 들여 그와 같은 사업을 시작한다면 정신 나간 사라이라고 하겠지요? 하지만 하와이엔 밈크 코트집이 있고 그것도 성황리에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고정관념은 꺠뜨려야 할 우리 인생의 잘못된 관습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라는 이 고정관념을 깨뜨리지 못한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에는 예수님을 떠나버렸고 그것도 모자라 요셉의 아들인 주제에 하늘에서 내려온 왕이니 하나님이니 하는 희한한 사람으로 낙인 찍어 끝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우리들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믿음의 길을 이탈하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 그들은 군중심리를 따른 자들이었습니다
(요6: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요6: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님 곁에 머문 자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놀라운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요6:66-67)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5천 명이 넘는 숱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옹위하고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던 놀라운 모습을 떠나 조용히 산으로 피신하셨던 주님께서 마침내 그들에게 본격적으로 선지자의 사명을 완수하시려고 하늘의 진리를 증거하여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6장의 핵심 내용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들의 육신적인 욕망을 채워주지 못하고 오히려 엉뚱한(?) 이야기만 하는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인 주제에” 하면서 다 등을 돌리고 떠나 가버렸습니다. 마침내 주님 앞에 남아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의 제자들뿐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바라보시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너희들도 가르느냐?”고 말입니다. 이는 일종의 다짐과 같은 질문입니다. 그러자 역시 베드로가 분명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요6:68-69)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고 말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만족해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 하나는 마귀라는 무섭도록 놀라운 말씀도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미리 다 알고 계셨다면 가룟 유다를 불러 새롭게 만들어 주실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예수님은 그냥 내버려 두셨을까요? 바로 여기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선이든, 악이든 하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선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에는 이와 같은 악에서 물러 날 수 있도록 가르쳐 주고 붙잡아 줄 수 있는 스승과 친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여기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그 많은 무리들과 함께 행동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예수님 곁에 머물러 있었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고 신선한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과 믿음이었습니다.
(1) 예수님은 영생으로 가는 말씀이십니다
(요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히1:1-4)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말틴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구유 속에 있는 그리스도"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구유는 천하고 더러운 짐승의 밥통입니다. 평범하고 구질구질하고 허물 많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표적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동시에 구유에는 더러운 지푸라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푸라기만 보면 안 됩니다. 지푸라기 위에 뉘어 있는 아기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키에르케골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연애편지"라고 표현하였습니다. Love Letter는 단순히 문자가 아닙니다. 그 속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애인의 편지를 받을 때 가슴이 뛰고 기뻐 어쩔 줄을 모르고 용기를 얻고, 자신감을 가지고, 무엇보다도 행복해집니다. 사랑의 편지는 피차의 마을을 묶고 그 모습을 보지 못해도 보게 하며 그 음성을 듣지 못해도 듣게 하고 그 마음을 알고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연서이다. 신학자 에밀 브루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인의 음성"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My Master's Voice). 성경은 사람의 언어로 기록되고 수천 년을 두고 전해 왔으므로 이해하기 힘들거나 윤리나 생활 교훈 등 따라가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나옵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도 지식이나 생활면에서 부족이 많습니다. 그러나 잡음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고 주인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요6: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은 앎에서 오고 앎은 믿음으로 말미암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알지 못하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들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엡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도 분명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요6:64-65)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는 말씀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