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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14일 주일낮설교 (목표를 바꾸어라!)

목표를 바꾸어라!

 

 

7. 14, 2019

本文:빌립보서3:4-14

   : 牧師

 

 

 

 

   사람은 거의 다 이루지는 못할망정 삶의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룬 사람들을 성공 자라고 지칭합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성공하기 위해 가슴에 목표를 세우고 최선을 다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렇게 성공은 했는데도 행복하지도 멋들어지지도 못한 채 오히려 비참하거나 실패자로 살아가는 이들도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청년 실업자가 130만 명을 넘어서는 엄청난 사회적인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젊은 청년들은 꿈에도 소원이 취직을 하여 직장을 갖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소원 소원하여 얻은 직장에서 40%가 도로 직장을 그만 두고 나온다고 합니다. 이유는 연봉이 너무 작거나, 일이 전혀 적성에 맞지 않거나, 상사와의 불화 등이 원인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의 삶의 현실입니다. 소원하며 겨우 얻어낸 직장이지만 막상 그 속에 들어가 보면 전혀 자신과 맞지 않는 것입니다. 성공을 향해 인격도 친구도 사랑하는 사람도 버리고 달려가 막상 쟁취했는데 손에 쥐고 보니 별 겻 아니거나 기대했던 바로 그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미국에서는 35억 명의 사람들 가운데 단 하나 바로 그 사람을 선택해서 평생을 함께 가자고 맹세하고 결혼하였으나 절반이 도중에 돌아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사도 바울입니다. 당대에 그는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당대에 모든 사람들이 소원하나 가지지 못했던 것을 그는 다 쟁취하고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가 스스로 고백하는 성공의 현실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빌3:4-6)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고후11:16-22)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우리가 약한 것 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등과 같이 말입니다. 실제로 그는 당대에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말리엘 문하에서 최고의 학문을 받은 최고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와 같은 배경으로 성공한 자 같은 거만한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삶의 목표를 왜 바꾸어야 하는지 함께 공부하면서 깊은 깨달음과 은혜를 받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울은 성공한 실패자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원래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그와 같은 이름으로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성공 자로서의 멋들어진(?) 삶을 살아갔습니다. 사람 하나를 죽여 없애버리는 것은 문제도 안 될 정도로 말입니다.

 

(행7:57-60)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사울이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는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쳐 죽이고 그것이 당연하고 마땅하다고 친히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피 맛을 본 사울은 스데반과 같이 예수님을 고백하고 증거 하는 고귀한 성도들을 잡아 죽이는데 친히 앞장을 섰습니다.

 

(행9:1-2)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훗날 그는 이와 같은 그의 성공적인 삶을 죄악 된 어리석은 것이었음을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다.

 

(딤전1:13-17)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이다 아멘

 

이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성공인 줄 알고 그 성공으로 행세하며 사람을 무시하며 안하무인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모르는 자들입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 사울과 같이 성공하였으나 실패한 자로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이와 같은 어리석은 삶의 목표를 수정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압살롬이라는 이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로서 아버지 다윗 왕을 배신하고 군사를 일으켜 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던 자가 바로 압살롬입니다. 그는 당시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이 되었으니 성공하였다고 자화자찬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압을 비롯한 다윗의 용사들이 압살롬과 전쟁을 선포하고 결국은 압살롬을 죽이고 다윗의 왕권을 회복함으로 비참한 실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사태가 평정 되자 요압은 다윗 왕에게 전령을 보내어 전쟁의 소식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그 때 아히마아스가 자원하여 전령이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요압 장군은 그를 전령으로 임명하지 아니하고 구스 사람을 임명하여 다윗에게도 보냅니다. 그러자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 장군에게 간청하여 자신을 보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요압은 끝내 그도 보내게 됩니다. 아히마아스는 지름길을 달려 구스 사람보다 먼저 다윗 왕 앞에 서서 사태를 보고하였습니다. 다윗은 전쟁의 이야기 보다는 아들 압살롬의 이야기가 더 급했습니다. 아히마아스가 전쟁에서 이겼다고 올리는 보고는 건성으로 듣고 다급히 물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은 어떻게 되었느냐? 살아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아히마아스는 차마 왕에게 그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할 수 없어 그것은 제가 잘 모릅니다.고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화가 나서 넌 바깥에 나가 섰으라!하고 쫓아내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에 즉시 달려 온 구스 사람을 통해 마침내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슴을 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압살롬이나 아히마아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힘을 다하여 달려갔으나 정작 중요한 사항은 말씀 드리지 못한 전령이나 아버지를 배신하고 왕위를 찬탈하였으나 그것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압살롬은 오늘 우리들이 성공 병이나 명예 병에 걸리지 말아야 할 소중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성공을 먹고 이 땅에 영원히 살지 못하는 유한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제대로 된 성공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의 목표부터 바꾸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게 목표를 바꾸고 제대로 성공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실패한 성공자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성공 요소였던 모든 아름다운 백그라운드를 배설물과 같이 과감하게 다 버렸습니다.

 

(빌3:4-9)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성공에 목을 매고 있습니다. 당장에 대한민국의 국회를 한 번 보십시오. 그까짓 검찰총장이 무엇이라고 국회 앞에서, 전국에 생중계 되는 카메라 앞에서 두 눈 똑 바로 뜨고 아니라고 장담하고 대답하였다가 자신이 아니라고 했던 그 말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자신의 목소리가 녹음 된 녹취록을 들고서야 자기가 거짓말했음을 고백하는 초라한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변명이나 늘어놓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라가 썩어도 엄청 썩었다는 사실을 씁쓸하게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이것 하나만 보아도 대한민국의 공직자들이 얼마나 부패하고 성공지상주의 자들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 자리만 차지하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 권세를 휘두르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성공자인 척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성공의 소중한 배경들을 두 번 다시는 미련을 가지지 않기 위해 배설물과 같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세상에서 실패하고 있는 것 같으나 진정한 성공자인 것입니다. 그는 개인의 성공을 포기하고 버림으로 그는 영원한 성공자요 승리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과연 어떻게 이와 같은 멋들어진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삶의 목표를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빌3: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최고의 목표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입니다. 이 땅에 있는 성공과 부귀영화가 우리들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일이라도 그것들은 다 두고 떠나야 할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목표는 바로 하나님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이런 성도들에게 풍성한 축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도우심을 입어야 합니다

 

과연 사도 바울은 인류 역사 중에서 한 둘이 나올까 말까 할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는 평생을 남자로서 장가 한 번도 가지 아니한 채 오로지 예수님만을 위해서 살았던 놀라운 위인이었습니다. 그는 그가 만났던 예수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헌신하였던 인물이었습니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생명조차도 아끼지 아니하고 오로지 예수님만을 위해 충성하고 헌신하는 그런 인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삶을 마감할 때에는 이 세상 그 어떤 부귀영화를 누렸던 자들보다 더 만족하고 더 소망 넘치는 임종을 맞았습니다.

 

(딤후4:6-8)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정도면 성공 정도가 아니라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대한 인물인 것입니다. 과연 그는 어떻게 이렇게도 놀라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그 해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다마스커스에서 나타난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는 이렇게도 놀랍게 변화를 입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와 같은 배경을 단 한 마디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그 누구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변함없으신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기만 하면 이처럼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사도 바울과 같이 제대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을 따르려니 시험에 들게 되고 낙심하게 되며 포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임직을 받는 19명의 일꾼들과 우리 빌립보의 모든 권속들은 한결 같이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짧은 삶 후회 없이 충성하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풍성한 은총을 누리기게 되기를 축원 드립니다. 할렐루야!

 

아메리칸 인디언의 전래 동화 가운데 지금까지도 자손 대대로 이어가고 있는 우화가 하나 있습니다. 추장이 늙어서 아들 셋 중에 후계를 삼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세 아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습니다. 마침 추장의 눈에 멀리 나무 위에 올라 앉아 있는 독소리가 들어 왔습니다. 그곳에다 여장을 푼 추장은 세 아들을 불러 놓고 큰 아들부터 물었습니다. 아들아 지금 네 눈에는 무엇이 보이느냐? 그러자 장남은 당당하게 대답하였습니다. , 아버님. 소자의 눈에는 푸른 하늘과 푸른 산이 보입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크게 실망하며, 둘째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둘째 아들아 지금 네 눈에는 무엇이 보이느냐? 그러자 둘째 아들이 대답하였습니다. , 아버님. 제 눈에는 큰 소나무와 거기에 앉아 있는 독소리가 보입니다. 역시 크게 실망한 추장은 막내아들을 불렀습니다. 막내아들아 지금 네 눈에는 무엇이 보이느냐? 그러자 막내아들이 대답하였습니다. , 아버님. 제 눈에는 큰 독수리가 보이고 그 독수리의 두 날개 사이에 독수리의 가슴이 보입니다. 마침내 아버지는 만족하며 명령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서 그 독시를 향하여 네 활시위를 당겨라!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그 추장의 후임은 막내아들로 결정이 났습니다. 사냥을 간 목적은 짐승을 잡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냥을 나간 아들의 눈에 하늘이 보리고 산이 보이고 소나무가 보여서는 안 되는 입니다. 이렇듯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과연 우리 눈에 무엇이 보여야 하겠습니까? 정확한 목표도 없는데 어떻게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달려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는 누가 봐도 말세입니다. 이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들을 한 번 묵상해 보십시오. 오늘날 인생들의 생각과 가치관이 과연 성경적입니까? 돌아가는 세상 정세가 정상적입니까?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야 하는 우리 주변의 환경이 과연 정상적입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지구촌인 프랑스의 온도가 50도를 육박하고 있다면, 그리고 곳곳에 지진이 일어나고 화산이 터지고 있는 것이 정상적입니까? 지난 금요일 새벽에도 몬로쪽에 진앙지를 둔 4.6의 지진이 일어나 새벽잠을 깨우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정확한 목표로 우리들에게 주어진 인생을 멋들어지게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제대로 된 목표만이 이를 가능케 하니 목표를 바꾸는 지혜와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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