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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15일 주일낮설교 (나의 나 된 것은)

나의 나 된 것은

 

 

9. 15, 2019

本文:고린도전서15:10

   :

 

 

 

 

   성경에는 수 천 수만의 위대한 인물들이 나열 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배우고 가장 잘 난 사람 하나를 들라면 서슴지 않고 사도 바울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학문으로나 가문으로나 신앙적인 차원에서 손색이 없이 잘 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모든 자랑할 만한 것들을 마치 배설물과 같이 미련 없이 버리고 결혼조차도 하지 않은 채 일평생을 한결 같이 예수님을 위해 헌신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생 마지막 순간에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해 주실 하늘 상급을 기대하며 기꺼이 이 세상을 떠나갔던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오늘 본문에서 21세기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함께 배우면서 은혜 받고 풍성한 도전을 받으시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아니요 하나님이십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 중에서 가장 실천하고 순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늘 우리들의 생각과 육신적인 우월감이 하나님의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잘났던 못났던 이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생활 속에 녹아 있는 악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예 이와 같은 모든 악습을 제거해버리기 위해 자신의 자랑할 만한 모든 것들을 배설물에다 비유하고 과감하게 내버렸던 것입니다.

 

(빌3:7-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고백한 바와 같이 자신에게 별 볼일 없는 것들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가장 유익하고 소중하던 바로 그것을 내버렸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와 같은 비장한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너무 자기 자신에게 관대하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초라하게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과감하게 내어 놓고 포기하고 하늘의 하나님의 것을 기대하는 진정한 예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그 모든 유익한 것들을 버렸기 때문에 망하거나 실패하였거나 인생의 낙오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늘 우리들보다 훨씬 더 위대한 삶을 살고 갔습니다. 그렇게 사도 바울과 같이 자신을 포기하고 버리고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고 기대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은 지극히 작은 그것이라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손해 보지 않으려고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1500년경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매우 신비스러운 미소를 띤 아름다운 여인이 도시에서 꽤 이름난 화가를 어렵사리 만났습니다. "그림 값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제 초상화를 좀 그려주시겠습니까?" 여인을 본 화가는 거만한 태도를 보이며 말했습니다. "나는 너무 바빠 당신의 초상화를 그릴 수 없습니다. 저기 길 건너 초라한 곳에 가면 일거리가 필요한 화가가 하나 있소이다. 그 사람에게 가서 부탁해 보시지요." '일거리가 필요한 화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였고, 그 여인은 모나리자였습니다. 지나치게 자신의 것을 의지하고 거만하고 교만하게 되면 이렇게도 소중한 축복의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전도자였던 무디는 원래의 직업이 구두수선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회심의 체험을 한 뒤에는 전도자가 되어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느 곳에서 15분 동안 설교를 하였는데, 그 설교 후에 어느 대학교수가 다가와서 무디 선생, 당신이 지금 15분간 설교하면서 문법에 맞지 않는 말을 16번이나 하였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무디는 얼굴이 벌겋게 변하면서, "내가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이라 그러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나는 비록 무식하지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데, 당신은 그 많은 학식을 가지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소?라고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 어리석은 대학교수처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무식한 무디가 되어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된다면 더 큰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가장 필요하던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과감하게 다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에게 이와 같은 용기와 결단이 있다면 우리들도 바울만큼은 아닐지라도 제법 주님의 영광을 위해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는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데 그리고 주님께 바쳐드리는데 너무나도 인색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우리 이상의 삶이나 열매를 맺히지 못한 채 그날이 그날인 초라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살아가지 못하는 것일까요? 의외로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오늘 우리 자아가 너무 강하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손해 보지 않으려는 인색한 마음, 헌신하지 않으려는 자기중심적 자아, 내 인생은 내가 돈 벌어 내가 살아가는 줄로 착각하는 어리석음 등이 오늘 우리들의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나은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어리석게 인생을 허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한 가지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는 대단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날마다 죽는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이름을 걸고 선포하였습니다.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 말입니다. 이렇듯 자신의 욕심과 아집과 생각을 죽이고 나면 비로소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피 흘리시던 예수님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예수님을 위해 죽는 것까지도 개의치 아니하고 온전히 평생을 통해 헌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를 가진 그였기에 보통 사람들이 선호하는 가정이나 자식이나 육신적인 미래를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는 고백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바울만큼은 아닐지라도 조금은 우리 자신을 죽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자손심도 좀 죽이고, 욕심도 좀 죽이고, 지나치게 잘난 우리 자신을 좀 죽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와 같이 말이 없고 죽은 자와 같이 탐심도 없고 죽은 자와 같이 잘난 척도 하지 않는 그런 진정한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사용하시기에 편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공생애 3년을 사역하시는 동안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셨던 무리는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마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마12: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왜입니까? 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이렇게도 책망하시고 미워하셨을까요? 그들은 도무지 자신을 죽이지 못하는 교만이 넘쳐났기 때문입니다.

 

(눅18:11-12)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라는 말씀과 같이 이들은 자기 의에 깊이 빠져 도무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과연 어떤 자들을 미워하시는지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들 속에도 이런 내면적 오만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회칠한 무덤과 같이 겉으로는, 남이 보기에는 가장 잘 믿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가장 목사님을 챙기고 섬기는 것 같아도 일 년 내내 식사 한 번 대접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도 많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은 우리 자아를 죽여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의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위해 진정한 헌신을 할 수 있고 이웃을 위해 생색이 아니라 제대로 된 순수한 사랑을 베풀 수가 있는 것입니다.

 

   더욱 주님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주님의 일은 한 두 번 결단하고 다짐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 장로로 임직을 받는다고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일은 믿음이 있어야 하고 열정이 있어야 하고 헌신적이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마침내 자신의 고백을 마치고 오늘 우리들을 향해 권면하고 있습니다. 더욱 주님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일은 힘을 써야 합니다. 견고하게 서야 합니다.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일은 Sometime 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Always 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사도 바울은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알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수고는 결단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수고를 예수님께서 친히 다 보시고 보상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계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충성하여야 합니다. 그치지 말고 수고를 해야만 합니다.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우리 인생 여정에서 그 마지막 순간에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축복을 받아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 그 누구도 몰라줄지라도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렇게도 분명하게 알아주시고 인정해 주시고 상을 주신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수고하고 충성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영국 런던의 워커 미술관에는 콘트러라는 화가가 그린 유명한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그 그림은 폼페이라는 도시가 베스비우스 화산의 폭발로 인해 그 화산재에 묻혀 전멸당하는 비참한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화산재와 용암이 비와 눈처럼 폼페이 성에 내렸습니다. 사람들은 화산재와 불을 피해 목숨을 걸고 성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이들로 인해 대 혼란이 야기되었습니다. 이 혼란 속에서도 성문 곁에서 묵묵히 서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그 성의 문지기였습니다. 뜨거운 화산재와 불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그 혼란 속에서도 자신의 맡은 일에 충성하고자 그는 그 소용돌이 속에 서서 성을 지켰던 것입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바로 '충성'이었습니다. 충성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책임을 잃어버리지 않는, 다시 말해서 죽음을 이기는 사명감인 것입니다.

 

[신림동교회 장로, 할머니, 18년 동안 꽃꽂이 한 여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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