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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13일 주일낮설교 (신자의 거룩한 부담)

신자의 거룩한 부담

 

 

10. 13, 2019

本文:미가6:6-8

   :

 

 

 

 

   지난 9월 말에 전주에 있는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고 담임 목사님으로부터 너무나도 진정한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정성을 다해 섬기고 대접해 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위가 아프다고 그 비싼 생로얄젤리를 구해서 미국까지 가지고 오는데 상하지 않도록 각양 방법을 다 동원하여 정성껏 챙겨주시던 모습은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너무 은혜를 많이 받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말씀을 실제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증거하시는 새로운 방법도 배웠다면서 어린 아이와 같이 순전한 고백을 하며 가능하면 격년으로 모시고 부흥회를 하겠다고 까지 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받고 와서 보니, 나는 그 사랑을 어떻게 갚아야지? 하는 부담이 생겼습니다. 흐르는 세월 속에 그 사랑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가슴에 새기고 갚을 수 있는 길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부담입니다. 오늘 우리들 중에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그 사랑에 화답하고 보답하고자 하는 거룩한 부담이 일어나야 합니다. 미가 선지가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미6:6-7)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우리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에 화답하고 보답할 수 있을까요? 그 길을 미가 선지자를 통해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미6:6-7)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미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기뻐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의가 무엇입니까? 옳은 것을 옳다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는 것이 공의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신32:3-4)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위엄을 우리 하나님께 돌릴지어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단9:14)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재앙을 간직하여 두셨다가 우리에게 임하게 하셨사오니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는 행하시는 모든 일이 공의로우시나 우리가 그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예수님의 제자들일 진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이와 같은 공의를 본 받아 악에 빠지지 아니하고 선을 행하며 언제나 바르고 반듯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도 외쳤습니다.

 

(암5:24)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지로다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의 주변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그 어디에도 이처럼 공법이 물 같이 흐르고 정의가 하수 같이 흘러가는 곳이 없습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지 못해 안달이고 권세를 잡은 자들은 영원히 그 권세를 가질 줄 알고 안하무인으로 권세를 휘두르고 있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가 거짓이요 움직이는 모든 행동은 악을 감추고 선을 가장하는 이율배반적인 부끄러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바라보실 때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명령하십니다. 나의 공의를 행하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를 이 땅에 행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죄악의 시대에 방주를 지어 구원을 입었던 노아였습니다.

 

(창6:8-9)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 하였으며

 

이 말씀을 조용히 묵상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의인이 되고 의롭게 살아가면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찬송 작가인 윌리엄 카우퍼(William Cowper)는 서른 두 살이 되었을 때 인생이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느낀 나머지 이런 인생을 계속 살기보다 차라리 인생을 포기하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에 뛰어내릴 작정으로 마부에게 테임즈 강을 향해 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의 표정을 수상하게 여긴 마부는 청년을 내려놓고는 그를 지켜보고 있다가 그가 강에 투신하려는 순간에 붙잡았습니다. 그리고는 이 청년을 향해 이렇게 격려하고 돌아갑니다.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가 이런 일을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 용기를 가지고 굳세게 사십시오. 그 마부 때문에 그의 첫 번째 계획은 실패합니다. 그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음독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웃집에 사는 사람이 우연히 그의 집을 방문했다가 그가 아직 숨 쉬고 있음을 확인하고 해독제를 먹여서 살려 냈습니다. 두 번째 자살에도 실패한 그는 내가 이래서는 죽을 수 없겠구나!라고 생각하여 이번에는 면도날을 가지고 손목의 동맥을 끊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놀랍게도 면도날이 부러지는 바람에 세 번째 시도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네 번째는 꼭 성공하리라 결심하며 목을 매달았습니다. 그러나 목을 매단 순간 또 이웃집 사람이 와서 매달려 있는 그를 발견하고는 곧 끈을 풀어 병원으로 데려가 살렸습니다. 그는 병원에서 어렴풋하게 , 나는 죽을 수도 없는 운명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신적인 상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피폐해져 정신병 징후에 시달렸고 계속해서 정신적인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사랑했던 이웃들의 배려와 손길을 통하여 교회로 초청 받았고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그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님을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그에게 가장 도움을 주었던 분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 찬송가405장)을 작사했던 존 뉴톤 목사님이었습니다. 존 뉴톤 목사님은 그의 친구가 되어 늘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며 상담해주고 격려하면서 그의 믿음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도 목사님처럼 시적인 재능이 있었습니다. 자기를 양육해준 목사님을 따라 그도 자기를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위해서 찬송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쓰여진 찬송시 중에는 찬송가가 되어 전 세계 사람들에게 불리고 있는 곡이 무려 67곡이나 됩니다. 그 중 우리 찬송가에 세 곡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샘물과 같은 보혈은(190장)입니다.

 

인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미6:6-7)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미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인자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인자라는 말을 NIV에서는 Mercy로 번역해 두었습니다. 자비, 긍휼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하나님께서도 호세아를 통하여서 다음과 같이 가슴으로ㅓ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호6:4-6)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8:13-14)

내게 드리는 제물로 말할찌라도 저희가 고기로 제사를 드리고 먹거니와 여호와는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이제 저희의 죄악을 기억하여 그 죄를 벌하리니 저희가 애굽으로 다시 가리라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은 자를 잊어버리고 전각들을 세웠으며 유다는 견고한 성읍을 많이 쌓았으나 내가 그 고을들에 불을 보내어 그 성들을 삼키게 하리라

 

이상에서 우리는 인자, 인애,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은 놀라운 단어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말씀의 히브리말의 원 뜻은 충성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죄에서 해방 되어 구원 받은 백성들이라면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께 헌신하며 충성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이 지금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제사보다도 예배보다도 이와 같은 인애와 자비로 무장된 충성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고을에 두 명의 머슴을 둔 사람이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두 머슴 중 한명은 주인이 보건 안보건 상관없이 자기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여 주인의 농사일을 거들어 주었고, 또 다른 한명의 머슴은 그와는 달리 주인이 없을 때는 일을 하지 않고 있다가 주인이 나타나기만 하면 지금까지 가장 잘 하던 것처럼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주인은 이를 모르는 척하고 몇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해가 저물어 가고 있는데 주인은 이들 두 머슴에게 사경을 주기로 하고 그들을 불렀습니다.   "이보게, 자네들. 지금까지 우리 집 일 해주느라 고생이 많았네. 내일은 내가 자네들에게 사경을 줄 것이니 오늘 마지막으로 새끼를 꼬아 주겠나." 그러자 한 머슴은 아무 말 없이 짚을 가져다가 물을 추겨 새끼를 꼬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인을 위해 일하는 것이니 잘 해주고 가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또 한 머슴은 생각하기를 내일이면 이집을 나가는데 새끼를 꼬라고 하냐? 하면서 투덜거렸습니다. 일을 하기는 싫고, 하는 둥 마는 둥 한 발 정도 시작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는 이내 잠을 청하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주인은 꼰 새끼를 가져 오라고 하더니 새끼줄 길이만큼 엽전을 꼬여서 가져가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주인 눈치만 살피던 머슴은 한 발 정도 밖에 안 되는 새끼줄에 엽전을 가져가야만 하였습니다.

 

이렇듯 선한 마음으로 충성하고 자비심으로 남을 섬기면 공평하신 하나님은 참 좋은 것으로 반드시 보상해 주십니다.

 

일제 시대 때 황해도 운률에 이찬영 장로님이란 분이 계셨는데, 이 분은 큰 부자로 일 년 농사를 지으면, 특별히 마련한 십일조를 창고에 가득 넣어 두고 교회 살림을 하며 또 학교를 도와주는 등 좋은 일을 많이 하신 분입니다. 집안에 잔칫날이 되면 먼저 큰 잔치를 베푸는데, 그 잔치는 황해도 거지들을 다 초청하여 여는 잔치였다고 합니다. 황해도 뿐 아니라 평안도, 함경도 거지들까지 몰려와 잔치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 장로님은 가난한 장사꾼의 물건 값은 절대로 깎지 말라."고 자녀들에게 항상 당부할 만큼 선한 분이었습니다. 그곳에 공산당이 들어오면서 토지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이 장로님의 과수원도 토지 개혁으로 공산당에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로님은 내일이면 과수원이 공산당에게 넘어 가는 그 전날에도 하루 종일 과수원에 나가 김을 매고 거름을 주며 수고를 했습니다. 그 때 지나가던 사람이 "내일이면 남의 과수원이 될 텐데 무엇하러 그렇게 수고하십니까?"하고 물으니까, 이찬영 장로님은 "누구인들 이 과실들을 먹을게 아니요? 그러므로 나는 오늘 이 과수원을 가꾸어야 합니다."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6.25동란이 터졌습니다. 공산당에게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이 장로님이 오고갈 데가 없어졌을 때 그에게 자비와 긍휼을 입었던 거지들이 모여와서 이 장로님을 도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미6:6-7)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미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인하여 기뻐하시는 일은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겸손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겸손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과 동핼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불행하게도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또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에녹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는 놀라운 축복을 누린 사람인데 그는 무려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창5:21-22)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이와 같은 에녹을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3년도 아니고 30년도 아닌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는 자신을 온전히 죽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과연 훌륳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려면 가장 먼저 겸손으로 옷을 바꾸어 입어야만 합니다. 교만한 자는 결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도 친히 자신에게로 와서 예수님을 배우라고 권면해 주셨던 것입니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온유하심과 그 겸손하심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그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 그렇게 될 때 우리들과 우리 자손들의 삶은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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