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20일 주일낮설교 (신자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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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20 October 2019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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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사명
10. 20, 2019
本文:마태복음28:16-20
說敎:崔 仁 根 牧師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만드실 때에는 거기에 합당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 만물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을 죽을죄에서 선택하시고 예수님의 피를 묻혀 천국 백성이 되도록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왜일까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전파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거룩한 목적을 두고 만들어 놓은 사람들이 그만이야 타락하고 변심하여 그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끔찍한 노아의 홍수가 임하게 되었고 노아의 여덟 식구 외에는 몽땅 물의 심판으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지금 우리들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주목하고 있으면서도, 성경에 하나님을 떠나고 인간의 욕심대로 살아가면 반드시 망하게 된다고 기록해 두시고 경고를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끊임 없이 하나님을 등지고 오로지 자기 자신들의 유익만을 위해 쫓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은 떨리고 두려운 마음으로 우리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인식하고 그 사명을 완수하는데 삶의 초점을 맞추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자랑할 일도 특별한 일도 아닌 성도된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가서 제자를 삼아야 합니다
(마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우리들을 위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남긴 유언과 같은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와 같은 주님의 지상명령을 한 순간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사는 날 동안 가슴에 새기고 순종해야 하고 제자를 삼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이와 같은 뜻을 온 가슴으로 깨달았던 사도 바울은 그 사명을 또 다시 재생산하여 우리들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고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이와 같은 사명을 완수함에 있어서는 자신의 하나뿐인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와 같은 사도 바울에게 온갖 풍성한 은혜와 권세와 능력을 아낌없이 쏟아 부어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와 같은 놀라운 사명이 있음을 한 순간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막1: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예수님의 제자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의 목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일 진데 우리들의 삶의 방식 또한 예수님의 이와 같은 목적을 따라 전도하는 것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전도는 바로 오늘 우리들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한때 세계프로복싱 헤비급 챔피언으로 알리와 프레이저를 차례로 캔버스에 눕히면서 92.3%의 KO율을 자랑하다 77년 지미 영에게 통한의 판정패를 당한 후 은퇴, 전도자가 된 "세기의 복서" 죠지 포먼... 현재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포먼의 인생은 새롭기만 합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 가기가 싫어 어머니의 속을 무던히도 썩였습니다. 어머니는 모정에 이끌려 포먼의 앞날에 관해 마음 죄며 기도한 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휴스턴 뒷골목의 불량소년이었던 그에게 잊지 못할 사건이 하나있었습니다. 지난 66년 캘리포니아주 플리잰턴에서 16세의 포먼이 그가 속해있던 직업공단의 동료에게 반죽음이 되도록 폭력을 휘두른 일이 그것입니다. 기술 공단에서 벌어진 이 무자비한 폭력을 지켜본 권투 선수 지도자 브로더스는 그를 선수로 키우며 교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권투선수로서 하루가 다르게 성장, 68년 미국대표로 멕시코 올림픽에 출전했고 헤비급 금메달을 따내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그때로부터 74년 아프리카의 자이르에서 알리에게 8회 KO패 할 때까지 수백만 달러의 돈방석에 앉은 그는 하나님 따위는 아랑곳없이 자신의 주먹만을 신봉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77년 아르헨티나 산후안에서 가진 지미 영과의 시합에서 어이없이 패하고 앉아있던 탈의실의 체험은 잔인한 인생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적수가 못 되리라던 무명 선수에게 판정패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에게 엄습한 것은 난생 처음 느낀 죽음의 공포였습니다. "헛되고 헛되었다. 슬픔의 냄새를 맡으며 주위를 둘러보니 내게 있는 건 죽음뿐이었다"고 회고하는 포먼은 금고 속의 수백만 달러도 한낱 종잇조각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을 계기로 신앙에 귀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가 열매를 맺는 순간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하여 그는 인간의 영광과 부귀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내리신 지상명령을 순종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장 소중한 인생의 축복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섬겨야 합니다
(막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는지 분명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섬기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온전히 우리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군가를 위해 그 누군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몸과 마음과 시간과 재물을 온전히 헌신해 본 적이 있습니까? 결코 우리는 그렇게 살지를 않습니다. 타락하여 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에게 다른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주변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부모도 자기의 유익을 위해 죽이고 자식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 미련 없이 버리지 않습니까? 부모와 자식도 버리는 사람들에게서 일면식도 없는 남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제자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에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주님의 이 말씀에 거룩한 부담을 안고 억지로라도 사랑하고 섬기며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려고 마음으로라도 애를 쓰고 노력하는 그런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 모든 주변의 슬픈 소리들을 애써 귀를 막고 듣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숱한 성도들의 사랑은 입술로만 하는 사랑이요 행함과 진실은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말세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세에는 사랑이 식어지기 때문입니다.
(딤후3:1-5)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네 목숨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던 하나님께서 이처럼 섬길 줄도 모르고 사랑할 줄도 모르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떠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본 받게 되면 하늘의 신령한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손님대접은 손님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예의를 갖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성심껏 대접하고, 손님을 귀하게 여긴 아브라함은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냥 무심코 최선을 다한 나그네 3사람이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두 천사와 함께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손님 대접을 힘썼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직접만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평소에 섬기는 삶이 몸에 베어 있었기에 이처럼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섬기는 삶을 살라!”고 말입니다.
미국 윌리엄 맥켈리 대통령이 다른 나라에 대사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2사람이 선정되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학력이나 경력이 비슷했습니다. 대사는 굉장히 중요한 직분이고 명예직이지 않습니까? 누구를 뽑아야할지 정말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두 사람 모두 청년시절에 어느 정도 아는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누구를 택해야 되느냐? 고민하는 가운데, 갑자가 두 청년이 대학생시절에 버스를 타고 가는데, 한 노인이 자리가 없어서 힘들게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사람은 못 본척하면서 책을 보는척하고 있었고 한 사람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했습니다. 이 필름이 한 30년을 백한 겁니다. 누구를 선택할까? 생각하다가 30년이 지난 그때를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를 택하셨을까요?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한 이 사람을 선택한 것은 당연하지요. 결정적으로 대사를 임명하는데, 남에게 베풀었던 사소한 이 일이 적용되어서 대사로 발탁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은 누가 보던지 보지 않던지 우리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할 때, 우리의 삶이 승리할 줄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이 알아주고 잘 보이는 일들은(드러나는 일)은 열심히 해보려고 하지만 힘든 일이나 누가 알아주지 않는 일들은 별로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누가 알아주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숱한 사람들의 조롱 속에서 섬겼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모든 무릎이 그 이름 앞에 꿇게 하셨던 것입니다.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마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소금이요 빛이 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소금과 빛처럼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이 명령은 오늘 우리들에게 엄청난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냥 돈이나 벌고 우리들의 필요나 채우며 적당하게 세월을 죽이다가 죽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에게는 우리들 때문에 불쌍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금은 자신을 온전히 녹여서 짠맛을 냅니다. 빛은 자신의 몸을 태워서 세상을 밝게 합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들도 우리들의 소중한 것을 녹이고 태워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 그렇게 하라고 예수님께서 소중하고 정결하신 몸을 찢고 피를 쏟아 친히 희생하시면서 우리들을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명을 감당하라고 구원하여 주었더니 하나님의 그 놀라운 축복들을 오직 우리 자신의 육신만을 위해 산다면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 얼마나 실망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우리들에게 이처럼 주님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히11:32-38)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과연 이런 사람들은 바보였을까요? 왜 그들은 이토록 모진 고통을 당하면서도 도망가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살지 않았을까요? 그러므로 그들은 이처럼 성경에 기록 되는 위대한 인물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 때 그들이 자신의 유익과 안녕을 위해 도망가고 배신하며 살았다면 지금 무엇이 되었을까요? 과연 그렇게 해서 그들은 그들의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유익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 시간은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순간뿐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그 주어진 삶을 다 보내고 죽게 된다면 과연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가 있을까요?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살았을 때에도 보람이 있고 가치가 있고 칭찬을 들을만한 삶을 살아야 하겠지만 죽어서도 하나님 앞에서 상급과 천국을 보상 받는 그런 멋진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사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은 없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세상에는 수많은 모임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모임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모임을 구성합니다. 그런데 지금 소개되는 모임은 좀 특이한 모임입니다. 일곱 가정 정도 되는 부부모임인데 이들 부부는 수입의 십분의 일을 이 모임에 내 놓습니다. 물론 십일조는 다 각자 교회에서 하고 그 외의 십일조를 또 내는 것입니다. 이 돈은 자신들을 위해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강원도 골짜기의 한 교역자를 계속 돕고 있고 또 갑작스런 재난으로 갈증을 느끼는 이들에게 시원한 냉수 역할을 해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자기 이익을 위해 계모임을 갖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동창회, 상조회, 종친회, 계 등. 힘겨운 살림살이 앞에서 맨몸 빈손으로 살아남아 엉엉 우는 사람에게 이름도 모르는 사마리아인처럼 손에 수표를 꼭 쥐어주고 가는 이들의 모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부부들의 관심은 시시콜콜한 파마나, 신발이나, 차나, 아파트에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도울까에 있는 21세기 선한 사마리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부는 아파트 방 한 개를 항상 비워두고 누구든지 와서 쉬어가도록 오픈하우스를 한다고 합니다. 이 부부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부부인 것 같습니다. 이웃을 향한 열린 마음이 없고서야 행복이 그 가슴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행복이란 날카롭게 따지고 내 것을 꼭 움켜쥐고 부들부들 떠는 감정표현이 아니라 이웃을 향하여 열린 마음으로 대할 때 확장되는 것
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