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17일 주일낮설교 (최상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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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17 November 2019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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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의 사랑
11. 17, 2019
本文:요한복음15:12-17
說敎:崔 仁 根 牧師
[외할머니를 흉기로 잔혹하게 살해한 20대 손녀에게 법원이 1심에서 중형을 선고했다. 수원지법 안양지원 제1형사부(부장판사 김소영)는 존속살해 혐의로 기소된 A 씨(20)에 대해 12일 징역 2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자신을 가장 아껴주고 보살펴주던 외할머니에게 감사하고 더욱 존경하고 사랑해야 하지만, 너무나도 끔찍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했다”며 “범행의 심각성과 중대성은 일반인의 법 감정으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패륜적이고 반사회적인 범행을 저지른 피고인에게 중형을 선고함이 마땅하다”고 밝혔다.
A 씨는 올 6월 3일 0시 반경 경기 군포시 집에 온 외할머니를 흉기로 수십 차례 찔러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다. A 씨는 재판 과정에서 당시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임상 심리를 평가한 결과 조현성 성격장애, 조기 정신증 등의 증상이 의심된다.”면서도 “피고인은 사전에 범행도구를 미리 구입하고, 피해자가 잠을 자러 들어갈 것을 기다렸다가 범행한 점 등으로 미뤄 보면 피고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A 씨는 지난해 3월 대학에 입학했으나 한 학기를 마치고 자퇴했다. 학교를 다닐 때 성희롱을 당해 적응하지 못했다. 이후 취업 준비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온 것으로 전해졌다. A 씨는 ‘강서구 PC방 살인사건’과 관련된 내용을 접하고 살인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칼로 살인’ ‘칼 잡는 법’ 등을 검색하며 살인을 계획했다.
사건 당일 부모가 집을 비우고 외할머니가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고 전날 집 인근에서 길이 약 32.5cm의 회칼 5개와 목장갑 4개를 구입했다. 범행 도중 전화가 걸려올 것에 대비해 외할머니의 휴대전화를 방 밖으로 옮겨 놓기도 했다. A 씨는 외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든 것을 확인한 뒤 눈, 목, 어깨 등을 31차례 찔러 숨지게 했다. A 씨는 범행을 저지른 뒤 방 거울에 립스틱을 이용해 ‘극단적 선택을 하려고 했다’는 문구를 쓰고 밖으로 나가 길거리를 배회하다가 귀가해 숨진 외할머니를 발견한 부모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다](동아일보 2019년 11월 13일자 기사 중에서 발췌)
하나님은 마지막 때인 말세가 다가오면 사랑이 식어지고 무정해 질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딤후3:1-3)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참으로 요즘 인간들의 가슴 속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없으면 그 무엇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 없으면 이 세상에서 그 무엇을 다더라도 다 무익할 것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
(고전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 말입니다. 사람들의 가슴에서 사랑이 식어버린 이 마지막 때에 최고의 사랑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하고 아름다운 최고의 사랑이 무엇인지 친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라고 말입니다. 친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있을까요? 그러므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이는 최고의 사랑이라고 예수님께서 선언해 두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의 친구는 과연 누구일까요? 그 친구는 당연히 예수님이십니다.
(요15: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예수님은 이렇듯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면 예수님의 친구가 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계명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요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역시 예수님께서 주시는 계명도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란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들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으로 순종하면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친구가 되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우리들의 친구가 되어주신 예수님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과연 오늘날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내 놓을 사람이 있을까요? 역사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어보신다면 한 번 쯤은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본 군인들이 천황을 위해서 바치는 헌신 도는 세계적인 표본이 되고 있습니다. 만주 사변 당시 여순항을 포위하는 일본 군대가 철조망을 자르지 않으면 진군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약 300-400명의 중대원을 데리고 있던 중대장이 "여러분 가운데 10여 명을 희생시켜야 되겠습니다. 한꺼번에 달려들면 다 총에 맞아 죽지만 한 사람이 가면 둘째 사람이 가고 또 셋째 사람이 가고 한 10여 명이 가서 한 사람이 한 줄씩만 자르면 저 철조망을 모두 자를 수 있는데 누가 천황을 위해서 가겠습니까?"라고 말하자 그 중대에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300명이 다 나섰습니다. 그래서 중대장이 열 사람을 골라서 희생시킨 후에 그 철조망을 돌파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 젊은이들이 주님을 위해 이렇게 충성과 결사를 각오한다면 우리 민족의 복음화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우리는 조심스럽게 살아야 될 줄로 생각합니다. 어제까지 우리가 주를 위해 죽겠다고 이 일을 위해서 몸을 바치겠다고 서약을 했지만 오늘 그 마음을 헌신짝처럼 바꿔 버릴 수 있는 것이 간사한 인간들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고 주님은 친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목숨을 내 놓는 충성을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렇게 살 수가 있을까요? 목숨은 고사하고 재물이라도 다 내 놓을 수 있다면 이 시대의 위대한 신자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구두쇠 중의 구두쇠였었고 백성들의 피를 빨아 재물을 챙겼던 삭개오는 그의 모든 재산을 다 내어 놓고 예수님을 선택하는 위대한 인물로 성경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눅19:8-9)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만약 그가 그 많은 재물로 잘 먹고 잘 살았다 할지라도 지금까지 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훗날 우리들의 후손들이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충성하였다는 칭찬을 들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헌신하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진정한 믿음과 사랑의 제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이웃과 고통을 나누는 사랑입니다
오늘날은 말세라 이웃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미국은 더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이웃의 고통에 눈을 감지 아니하고 시간과 재물을 다 바쳐 섬긴 한 사람을 친히 소개해 주고 계십니다.
(눅10:30-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고통당하는 이웃들에게 무관심 하지 말라고 이와 같은 비유를 들려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고통당하는 이웃들을 도와주어야 할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것을 지나쳐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종교지도자가 되고 말았고 그러므로 그들은 결국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역사적인 저주거리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가장 싫어하고 인간으로 상종도 하지 않았던 사마리아 인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다 바쳤습니다. 바쁜 여행길에 시간을 들였습니다. 재물을 내 놓았습니다. 그 사람을 나귀에 태우고 주막까지 가는 거룩한 수고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고 친히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로 이제는 이렇게 고통당하는 이웃을 외면하지 아니하고 따뜻한 사랑으로 헌신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친히 명령하셨고 그것이 가장 최고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폴란드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웬일인지 이 마을에는 독일군이 나타나지 않아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 유대인 앞에 드디어 독일군이 나타났습니다. 일부는 마을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학교로 가 학생 중에 드문드문 섞여 있는 유대인 어린이를 끌어내려고 하였습니다. 코르쟈크란 이름을 가진 선생님은 두려움에 떨며 자기 앞으로 몰려오는 유대인 어린이들을 두 팔로 꼭 끌어안아 주었습니다. 선생님은 아무 죄도 없는 아이들을 왜 잡아가느냐고 호통이라도 쳐 보고 싶었지만 짐승만도 못한 그들에게는 아무소용이 없을 것 같아 입도 달싹하지 못했습니다. 트럭 한 대가 학교 운동장 안으로 들어오자 아이들은 선생님의 팔에 더욱 매달렸습니다. "무서워할 것 없단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면 마음이 좀 편해질 거야." 독일군은 코르쟈크 선생님 곁에서 유태인 아이들을 떼어놓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코르쟈크 선생님은 군인을 막아서며 "가만 두시오. 나도 함께 가겠소."라고 말했습니다. "자, 우리 함께 가자. 선생님이 함께 가면 무섭지 않지?" "네, 선생님,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코르쟈크 선생님은 아이들을 따라 트럭에 올라탔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독일군이 선생님을 끌어 내리려고 하자, "어떻게 내가 가르치던 사랑하는 이 어린이들만 죽음으로 보낼 수 있단 말이오." 하고 함께 수용소로 끌려가 마침내 트레뮬렌카의 가스실 앞에 도착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앞장서서 가스실로 들어갔습니다. 자신은 유대인이 아닌데도 사랑하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함께 목숨을 버린 것입니다. 히틀러에게 학살을 당한 동포들을 기념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세운 기념관 뜰에는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두 팔로 꼭 껴안고 있는 코르쟈크 선생님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고통당하는 이웃과 함께 하는 이와 같은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소외된 자와 친구가 되는 사랑입니다
시카고에서 한 이발사와 목사가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이발사가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지요?” “그럼요, 하나님은 사랑이시지요.” “그렇다면 목사님, 저 빈민굴을 한 번 보십시오. 사랑이라는 하나님이 왜 사람들을 저렇게도 비참하게 살아가도록 내 버려두셨나요?” “아, 그거요. 바로 당신과 내가 저 사람들을 케어하고 도와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고 대답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하나의 숙제가 있습니다. 소외된 이웃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라 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야 생의 마지막 순간에 염소로 구분 되지 않고 양으로 구분 되어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25:37-40)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구원 받은 성도들이 소외된 이웃들에 대해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되짚어 주신 고귀한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이웃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도덕적이거나 자비심으로 인한 것이 아닌 신앙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우리 몸의 지체를 돌보듯 이웃들의 삶에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접근해야 하는 것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은 우리들의 따뜻한 사랑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불쌍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버드대 심리학 교수팀이 얼마 전 [사랑은 바이러스에 대한 저항력을 강화 시킨다]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교수팀은 먼저 학생들에게 인자한 얼굴을 한 성직자가 난민병원에서 사랑으로 환자들을 돌보는 기록영화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IG-A(감기바이러스에 대항하는 저항력)를 검사한 다음 1주일 후 이번에는 나치가 유태인을 잔혹하게 학살하는 기록영화를 보여주고 똑같이 IG-A를 검사했습니다. 그 결과 연구팀은 학생들이 사랑을 느꼈을 때 IG-A수치가 더 높아졌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이처럼 이웃들도 소생케 하지만 우리 자신들의 삶에도 영향력을 끼쳐 더 보람 있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도와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19:18)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미국의 하와이는 아름다운 곳으로 사람들은 그 곳을 지상의 낙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곳은 어느 곳이든지 허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야자수가 우거지고 시원한 바다 바람과 더불어 춤추는 파도, 아름다운 물새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면 덩실덩실 훌라춤이라도 추고 싶어지는 곳, 백야가 펼쳐지는 밤의 정경도 가히 파라다이스로 손색이 없습니다. 그러니 에덴의 동산은 얼마나 아름다웠겠는가? 그런데 그곳에 모로카이 섬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섬에 문둥병 환자들이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누가 이 사실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벨기에의 성직자인 다미안 신부는 그 곳을 찾아가 평생 동안 복음을 전한 분입니다. 피나는 전도를 해도 심신이 일그러진 나환자들은 그의 전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미안은 생각다 못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문둥병자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말입니다. 몇 달을 두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얼굴에 반점이 생기고 손에 문둥병이 번져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그 모습으로 문둥병자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전도했습니다. "나도 이제 여러분과 같은 문둥병자입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과 다른 것은 문둥병과는 상관이 없이 마음이 기쁘고 즐겁기만 합니다. 왜냐고요? 내 속에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좋으신 하나님을 영접하여 영생을 얻으십시오." 문둥병자들은 다미안의 모습과 깊은 사랑에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여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모로카이 섬에는 탄식이 사라지고 푸른 파도를 타고 찬송이 멀리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소외된 이웃들에게 전한 사랑의 열매였던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