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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24일 주일낮설교 (최상의 감사)

최상의 감사

 

추수감자주일

11. 24, 2019

本文:욥기1:13;22

:崔 仁

 

 

 

 

미국 남부 도시의 큰 정신병원의 구급차 운전수로 일해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여전한 일과로 정신병 환자를 병원에 내려놓고 차를 돌리려고 하는데 병원의 위층 창문을 통하여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 좀 보시요!" 운전수는 병실 위를 바라보며 "나를 부르는 겁니까?" 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병실의 창문에다 상체를 내어 놓은 어느 사람이 대답하기를, "그렇소. 그런데 내가 당신에게 한 가지 물어 보아도 되겠소?"라고 하였습니다. 운전수가 "무슨 질문인데요?"라고 하자, "당신은 건강한 정신을 가졌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해 본 일이 있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운전수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15년 동안 이 병원에서 일하며 매일 정신병 환자를 운반하면서도 나의 건강과 정신에 대하여 단 한 번도 감사해 본 일이 없었음을 크게 깨달았습니다." 어떤 분이 태어난 애기의 손가락을 하나씩 세면서 열 손가락을 다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감사를 하지 않는 인생은 마치 돼지가 도토리나무 밑에서 떨어진 열매를 주워 먹으면서도 그 도토리가 어디서 온 것인지 위를 한 번도 바라보지 않는 것과 같은 인생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의 뚜렷한 특징인 것입니다. 2019년도 감사주일을 맞아 우리들도 이처럼 생활 속에서 감사드리며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우리들도 감사로 무장하고 인격과 신앙의 성숙함을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회복할 수 있도록 오늘도 풍성한 은총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감사에 관한 명언들-

 

성령 충만이 감사 충만입니다(토리박사)

감사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는 자는 축복의 열쇠를 손에 쥔 자이다 모든 음식에 소금이 들어가야 맛이 나듯이 모든 일에 감사가 들어가면 형통합니다. 아무리 주어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가 개인주의자인 까닭입니다. 환난과 슬픔 중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축복으로 변화 시켜 주실 것입니다(크리소스톰)

 

감사는 여러분의 축복에 자물쇠를 채우는 비결입니다(조용기)

 

감사는 하나남께 자원하여 드리는 제사의 행위입니다(손기태)

 

감사는 겸손에서 시작 됩니다

인생의 형별은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내촌)

 

감사는 성령중만의 증거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최고제사 행위요 천국민의 생활 특징입니다. 감사치 않는 자녀를 두는 것은 독사의 이빨보다 더 날카롭게 찌르는 가시이다(섹스피어)

 

이렇듯 위대한 인물들은 한결 같이 감사로 하나님을 만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최상의 감사를 드릴 수 있을까요? 함께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난 중에 드리는 감사가 최상의 감사입니다


 

(욥1:20-22)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우리는 이 간단한 몇 절의 말씀 속에서 오늘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욥의 믿음과 감사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한 순간에 욥은 10남매를 잃어버리고 또한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맨붕상태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단번에 하는 말이, 하나님, 왜 하필이면 저입니까?하고 항변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자식들 중에 하나를 잃어버려도 부모는 거의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것이 지극히 상식적인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한 순간에 그것도 10남매가 함께 모여 즐겁게 생일파티를 하고 있다가 몽땅 다 죽어버렸는데도 욥은 어떻게 이런 표현과 고백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확실히 욥은 오늘 우리들과 다른 뭔가가 있는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인정 하시는 바 위대한 신앙인으로 성경에 당당하게 기록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욥1: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1: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그는 과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경외하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기고 오로지 그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거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듯 오늘 우리들도 고난가운데서 감사할 수 있는 믿음과 인격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최상이고 최고의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1914년 12월 뉴저지주(N,J)의 Westerwemandy에 있는 에디슨 실험소에서 60년간 이룩한 200만$ 어치의 연구재료와 결과, 그리고 시설이 다 불타버렸습니다. 그의 아들 Charles가 위로할 말이 없어 할 때, 64세의 아버지 에디슨이 어머니를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아들과 부인이 함께 다가오자 에디슨은, "이 재난에는 위대한 교훈과 가치가 있다. 우리의 모든 과거는 다 타 버렸다. 이제 다시 시작케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리자."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글로 읽거나 들을 때는 간단하지만 삶의 현실에서 이렇게 감사드리며 사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이는 고도의 인격과 신앙으로 무장되어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고통 중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면 이는 최상의 감사인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할렐루야!

 

범사에 드리는 감사가 최상의 감사입니다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해 한 가지 감사에 대한 명령을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범사란 모든 일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에게 유익이 있어야만 감사합니다. 그것도 불신자들은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희,노,애,락을 막론하고 모든 일에 하나님께 먼저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성경에 기록하시고 명령하시는 것은 우리들이 그렇게 살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숙하고 아름다운 최상의 감사는 범사에 드리는 감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을 대신 기록한 사도는 바울입니다. 그는 오늘 우리들의 삶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끝내는 악당들에게 잡혀서 고귀한 목숨조차도 빼앗긴 비운의 사도였습니다. 그가 스스로 고백한 간증을 간단하게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후11:22-27)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오늘 우리들은 과연 이와 같은 사도 바울이 겪은 고난에 몇 퍼센트나 공감할 수 있을까요? 정말 엄청난 고난의 길을 지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는 뭣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하여야만 하였습니까? 직장 때문입니까? 사업 때문입니까? 아니면 가정이 원만치 못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 예수님을 증거하는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이렇게 고난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토록 무서운 고난의 길을 걸어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하는 말은 원망이 아니었습니다. 불평이 아니었습니다. 단 한 마디도, 하나님, 왜 나를 도와주지 않습니까?라며 하소연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범사에 감사드렸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가장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변인복목사님을 통해서 가슴에 큰 감동이 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변목사님과 함께 신학교 동기였던 한 목사님은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사모님이 교통사고를 당하여서 두 다리를 잃었다고 합니다. 자동차가 무릎 아래를 지나가서 두 다리가 박살이 나버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에는 휠체어도 없었고 또 그런 것을 구입할 수 있는 여유도 없는 가난한 신학생이었기 때문에 그 사모님은 하루 종일 꼼짝도 못하고 집에 갇혀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모님은 원망하거나 절망하지 아니하고 하루 종일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며 그 서러운 환경을 극복해 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 사모님에게 놀라운 기도의 능력을 허락해 주셔서 성도들의 거의 모든 문제를 기도로 해결해 주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유의 은사까지 주셔서 환자들을 위해 기도하면 거의 다 나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대형교회를 이루게 되었고 이제 은퇴를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범사에 감사로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면 어떤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가를 그 사모님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롤 모델로 친히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직분주심에 드리는 감사가 최상의 감사입니다

 

(딤전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이것은 사도 바울이 자기와 같은 못난 자에게 거룩한 직분을 주심에 감격하여 감사를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도 자신이 받은 직분에 대해 만족하고 감격하며 또한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이 종은 반세기 동안 부산 서울 미국에서 성도들을 경험해 보지만 이처럼 자신이 받은 직분에 대해 감사하며 감격하는 성도들을 거의 본적이 없습니다. 감사는커녕 오히려 원망하며 불평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보았습니다. 특별히 오래 전 토론토에서 만났던 한 신부는 평생 저에게 잊을 수 없는 충격을 주었습니다. 토론토의 한 지인의 집에서 3-4일 머물면서 사랑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집안은 모두가 천주교 신자들이어서 성당엘 나가는데 특별히 신부님과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한 날은 그 집 부부와 신부와 함께 골프를 치고 돌아와 저녁을 함께 나누는데 그분들은 양주를 마시며 저녁을 먹었습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에는 이미 그 신부님이 취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나온 세월 동안 겪었던 고통을 늘어놓으며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자기도 사람인데 신부는 3년 정도만 한 성당에 머물게 하고 또 다른 곳으로 보내버리는 것이 너무나 싫다고 하였고, 무엇보다도 신자들이 신부를 함부로 대하고 고통을 주는데 진절머리가 난다고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종은 그런 것은 오늘 개신교의 목사들도 마찬가지이니까 공감을 하며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신부가 모함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데도 예수님은 자기를 도와주지도, 알아주지도, 해결해주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예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죽을 만큼 고통을 당하고 힘이 드는데도 예수님은 한 번도 자기를 구해주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없는 것이라고 단정하였습니다. 그 때 그 신부의 나이가 42살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 때의 상황이 제 머리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만약 그 신부가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욥과 같은 고난을 당하였다면 그는 아마도 모든 것을 다 집어던지고 하나님을 떠나버렸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고귀한 그 성직을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의 예수님은 우리들을 구원하시려고 그 모진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모욕과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그 모든 축복보다 우리들이 받은 거룩한 성직이 더 고귀함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성직을 고통과 눈물로 잘 감당하였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하늘의 상급으로 보상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계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딤후4:6-8)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꿈을 꾸듯이 이 세상의 짧은 삶이 끝나면 우리는 우리들이 짓지 않은 더 나은 새집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진정한 소원은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하늘나라에서의 상급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귀한 직분자들에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오늘 드려야 할 최상의 감사는 부족하고 미련한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거룩한 성직을 주셨음에 정성을 다해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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