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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9년 1월 19 주일낮설교 (일어나라!)

2019년 1월 19 주일낮설교 (일어나라!)

일어나라!

 

스승의주일

1. 19, 2020

本文:이사야60:1

:崔仁根 牧師

 

 

 

 

성경에는 일어나라는 말씀이 대략 23번 정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일어나야 할 여건이 다양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실제로 일어나라고 하신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면 그만큼 일어나야만 하는 환경에 처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환경을 극복하고 일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도록 따뜻한 사랑으로 다가서신 모습도 또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들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케어스들이 있습니다.

 

(마17:7)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행12:7)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고통과 절망에 빠졌을 때)

 

(엡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잠을 자고 있을 때)

 

(사6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자들에게)

 

(마26: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지쳐서 쓰러진 자들에게)

 

이상에서 네 가지의 상황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우리들을 향하여 강력하게 명령하시는 말씀이 바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복된 새해를 맞이한지도 벌써 석주가 지나고 1월도 거의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렇게 살처럼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인생 끝자락에서 후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상 받아 누리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 명령 앞에 겸손히 서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들을 잘 아시는 분이 하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복된 새해와 우리들의 삶을 위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일어나야 하겠는지 함께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적인 잠을 자고 있을 때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엡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마26: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너무나도 고민하시고 괴로운 나머지 열 두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 따로 부르시고 함께 기도하도록 데리고 겟세마네로 올라가셨습니다. 참으로 땀방울이 피가 되어 떨어질 만큼 예수님은 간절하게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잠시 휴식을 취하시며 일어나 제자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기도는커녕 졸고 있었습니다.

 

(마26:39-41)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이것이 가감 없는 제자들의 실제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그렇게도 마음을 열어 놓고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셨는데 이렇게 자고 있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이와 같은 때에 명령하셨습니다.

 

(마26: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들에게 깊은 감동이 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함께 가자!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예수님을 눈물로 따라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실수했다고 부족하다고 잘못했다고 무능하다고 포기하시거나 버리지 않으십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면전에서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고 도망 가버렸으나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요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스스로 부족하다 능력 없다 자격 없다는 등의 어리석은 푸념을 내려놓고 베드로처럼 당당하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하고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다시 손잡아 주시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고아의 아버지 조지 물러는 믿음과 사랑을 지닌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조지 물러에 대해 깊이 연구하던 아더 피어슨 박사(미국 장로교회 목사)가 그의 성경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시37:23절 말씀 옆에 고인의 친필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리고 또한 멈춤까지도"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시편 37편 23절의 말씀부터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37:23)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죠지 뮬러는 이 말씀 옆에다 사람의 살았을 때의 걸음뿐만 아니라 그 걸음을 멈출 때도 함께 하시고 기뻐하신다는 말씀을 첨부해 두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멈춰 서성대고 좌절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 때까지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보행을 살피시고 힘을 주시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습니다.

 

(잠20:24)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삶과 우리 자손들의 발걸음은 우리들이 걷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에도 잠을 자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 가버렸던 어리석은 제자들도 예수님은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그 걸음을 인도하여 성경에 기록된 위대한 인물들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고통에 빠져있을 때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행12:1-11)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대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똑바로 믿고 섬기려면 숱하게도 많은 고난과 고통을 당하여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이 식어가고 모든 인간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을 들여다보면 너무나도 이에 대한 극명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먹고 살기가 힘들어 여기저기에서 가족들과 함께 자살하고 있는데 정치하는 대통령과 그 일당들은 경제가 잘 되어가고 있다고 헛소리를 하고 오로지 자기들만의 왕국을 위해 피탐 흘려가며 바친 세금을 강가의 모래를 뿌리듯이 허비하고 있으니 백성들은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뜻이 있는 성도들이 이렇게도 추운 겨울에 아스팔트 위에서 밤낮으로 저렇게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힌 것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이 당하는 고통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친히 사람의 옷을 입고 오셔서 그 모든 고난을 두 눈으로 보시고 온 몸으로 당하여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옥 속에 갇혀 있는 억울한 베드로를 이처럼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일어나라고 부르시고 이끌어 내셨던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택하신 자신의 백성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친히 일어나 도우시는 것입니다.

 

(히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시29:11)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당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이와 같은 도우심을 기대하며 당당하게 이겨내야 하겠습니다. 거룩한 고난을 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위대한 인물이 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과 도우심을 온 몸으로 체험하였던 사도 베드로는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성도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벧전5:8-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들을 고난의 늪으로 이끌고 가는 것이 사탄 마귀이며 그 어떤 고난이 따른다 할지라도 당당하게 깨어서 주님의 능력을 덧입고 싸워 이겨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고난을 이겨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이 된 인물은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크고 작은 고난을 오히려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기회가 되는 줄 알고 기뻐하며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시련과 고난을 통해 힘을 얻고 평강을 얻습니다. 운동선수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로드웍을 하고 끊임없이 신체를 단련합니다. 심한 훈련은 그들에게 있어 큰 고통이지만 이런 고통을 통해 운동선수의 체력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의 인격도 시험을 통하고 환난을 통해야 강해지고 굳세어지지 무풍지대에서는 결코 강건한 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고난은 신앙의 밥입니다. 성도는 시험과 환난의 밥을 통해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주의 종들은 수많은 시련과 고난을 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고 석사학위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잠자리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오해를 받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공격을 당하기도 하고, 짓밟히기도 하면서 강인한 신앙인, 성숙한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 하다가 많은 핍박과 고난을 당했으며 수없이 감옥에 들어가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통해 강인한 복음 전도자, 성숙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밥상 앞에서 자꾸 밥투정하는 자녀는 영양실조에 걸리고 몸이 허약해 잘 자라지 못하지만 주는 대로 무엇이든지 잘 먹는 자녀는 건강 하고 튼튼합니다. 시련과 고난은 물리치고 좋은 일만 편식하는 성도는 허약해지고 맙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난의 밥상이 다가 오면 주님이시여,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유익이 되니까 보내 주셨지 손해될 것을 보내 주셨겠습니까? 주님, 감사하게 잘 받아들여 승리하겠습니다.하고 외치면서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성도는 강인해지고 생활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을 기대하고 어떤 고통도 기쁘게 여기고 승리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다가서시고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말입니다. 할렐루야!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을 때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사6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마5:13-14)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이 말씀들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들에게 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증거해 주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왜 존재합니까?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스스로 이 세상에 나온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우리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뜻입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일까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하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왜 이 세상에 보내셨을까요? 그 이유를 깨닫는 것이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믿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분명하게 잘 정리해 두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 정도의 기본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먼저 그 말씀부터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 계신다는 것과 그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사명을 주시고 계심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라고 지금 재촉하고 계십니다. 일어나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밝고 소망찬 새해를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이 어두운 이 세상에 빛을 발하여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분연히 일어나 어두운 구석구석을 밝게 하고 신선한 소망이 넘치는 새로운 내일을 만들어 후손들에게 유산해 주어야 할 사명입니다. 이름 없는 풀 하나도 씨앗을 만들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 세상에 뿌리고 있습니다. 말 못하는 짐승도 새끼를 낳고 키우며 종족을 번식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너무나도 해야 할 일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은 어두운 이 세상에 빛을 발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유요 사명인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그 숱한 위대한 인물들은 한결 같이 이와 같은 사명을 위해 그들의 소중한 일생을 다 바쳤습니다. 하지만 그 사명을 감당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사명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명을 감당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가 자랑거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을 중심으로 기록하지 않고 한 일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건 중심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결코 사람이 성경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의 이야기도 신앙과 연관 되지 않은 삶은 아예 삭제해 버리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기록 할 때는 철저히 예수님 그 자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일을 기록함도 결국 예수님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사건이 중심이 아니고 철저히 예수님 자체가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와 예수님의 이야기가 다른 점입니다. 모든 인간의 역사란 주님을 위해서 일할 때 가치가 있는 것이지 자체로는 전혀 기록할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사건 보다 예수님 자체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 아닌 사람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죽은 사람도 많고 예수님처럼 고통을 받은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의 행하신 기적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면서도 예수님 자체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지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복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으나 주님은 깊이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는 모두 단회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야기는 영속적입니다. 그 사람이 죽으면 그 역사도 끝이 나지만 예수님의 사건은 모든 시대에 모든 인간에 주시는 영원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행복한 것은 단회적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영속적인 그리스도 안에서 단회적으로 끝나버릴 자신의 삶을 영원한 삶으로 전환시키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의 사명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사명을 아는 인생은 누구라도 자신의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아름다운 인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은 소리라고 했습니다. 소리는 알려주지만 그 자체는 보이지 않습니다. 성도는 주님을 세상에 알려야 할 사명을 가졌지만 자신은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주님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한 인간의 가장 위대한 면은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유익을 얻는데 있습니다. 아무리 위대해 보여도 자신이 그 삯을 받는 목적이었다면 전혀 위대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없어지고 주님께 영광이 되고 다른 사람이 유익을 얻을 수 있어야 사명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증인은 자신의 입장보다 자신이 전하는 내용을 더 귀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나 보다 주님을 더 귀히 여긴다는 실제적인 증거인 것입니다. 전도는 항상 외적인 사역과 내적인 사역이 있습니다. 외적 사역은 전도자의 사역이요 내적 사역은 복음이 전해질 때 그 마음을 감동 시키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이 시대의 성령의 동역자인 것입니다. 빛을 발하라!는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라는 뜻입니다. 마치 캄캄한 바다에 등대와 같이 흑암처럼 어두운 이 세상에 영원한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보여주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께로 나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21세기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일어날 수 있도록 이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6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마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사명을 감당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있었던 한 젊은이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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