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9일 주일낮설교 (부르심을 입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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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09 February 2020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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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을 입은 자
2. 9, 2020
本文:로마서8:28
說敎:崔仁根 牧師
기독교와 일반 종교의 차이는 아주 간단합니다. 일반 종교는 사람이 신을 찾아가는 것이고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잘나고 지혜로워서 하나님을 찾아 만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들을 찾아오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심으로 신자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잘 알지 못해서 오해를 하거나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의외로 많이 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에 관한 진리로 가득한 성경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롬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한 번 곰곰이 묵상해 보신다면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는지 자세히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코 우리들이 잘나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삶이 너무나도 힘들고 지쳐서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만나 의지하고 도우심을 덧입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세상에서 낙심하고 절망하고 허망하게 인생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아직 죄를 지으며 이 세상에서 죄인인 줄도 모르고 살아갈 바로 그런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그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사랑을 확증해 주셨던 것입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렇듯 성경은 올바른 진리를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믿는 자들에게 고통과 환난과 시련이 닥쳐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구별하셨다면 세상에서 제 맘대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과 다른 그 무엇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바로 이와 같은 문제에 관해 해답을 찾아내고 하나님과 선택 받은 우리 성도들과의 관계에 관해 자세히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그 결론부터 말씀 드린다면 고통과 축복과 시련과 행복을 반복하면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지만 그 결국에는 평안하고 승리하는 삶으로 변화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약속입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베드로의 생애를 통해서 부름 받은 자의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눅5:10-11)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이 말씀은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입니다. 결코 그가 예수님을 찾아갔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여전히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가시고 그들을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의 고귀한 제자가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실패와 좌절과 고통을 맛보아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이라는 끔찍한 질책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것도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는 엄청난 신앙고백을 하고 난 바로 직후에 말입니다.
(마16:21-23)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순간에 극과 극을 달리는 초라한 인간의 모습을 연출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연약한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결국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고 예수님을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였고 마침내 성령 충만을 받고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사명을 완성해 나갔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성령 충만을 받고 하루에 3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를 이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헤롯의 폭정에 희생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행12:1-4)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쓰임을 받아도 우리는 이 세상의 고통에 직면하게 되고 엄청난 재난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국에는 승리하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어려서부터 믿음으로 자라났고 믿음의 사람으로 소문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듭되는 실패를 체험하여야만 하였습니다. 자그마치 실패는 30년 동안이나 그의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그의 실패를 부분적으로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832년 주 의회 선거에서 패배하였습니다. 1833년에는 사업에 실패 하였습니다. 1836년에는 신경쇠약에 걸려 고통을 당하여야만 했습니다. 1843년 하원의원 지명에서 또 실패하였습니다. 1854년 상원의원 선거에 나갔지만 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1856년 부통령 지명에 실패하였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원망하거나 불평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실패와 고통을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 끝내는 미국의 16대 대통령에 당선 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실패가 바로 그에게는 더 크게 승리하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를 통해서 부름 받은 자의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행9:15-16)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자칭 잘 나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는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은 원래 예수님을 핍박하고 살인하던 악한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위대한 스데반 집사님을 죽이는데 앞장섰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그를 친히 선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워낙에 악한 자여서 부르시되 매우 강하게 부르셨습니다.
(행9:1-5)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 과정에서 사울은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예수님께서는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보내시고 사울을 부르시는 주님의 대역으로 그를 위해 기도하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그가 직접 만났던 예수님을 증거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울은 사도 바울로 거듭나게 되었고 평생을 통해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는 전무후무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기적같이 부르심을 입었지만 사도 바울 역시 만만치 않은 고난의 길을 걸어야만 하였습니다.
(고후11:22-27)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불치병을 앓고 있어 참으로 많은 고통을 당하면서 꾸준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병을 고쳐달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고쳐주시지 않았습니다.
(고후12:8-9)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을 부르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사실만 보더라도 예수님은 온갖 병자를 다 고치셨고 바람을 꾸짖으시어 잔잔하게 하셨고 심지어는 죽은 자를 말씀 한 마디로 살리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특별히 하나님께서 친히 부르시고 사랑하시는 사도 바울에게 이렇게도 무서운 고통과 재난이 머물도록 놓아 두셨을까요? 사실 우리는 이에 대해 정확한 답을 내놓을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우리들이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처럼 아픈 고통과 하나님의 축복을 통하여서 끝내는 하나님의 선을 이루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역경과 고통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복음을 세상 만방에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생 끝자락에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만족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친히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종을 친히 간섭하시고 합력하여 선이 되고 축복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딤후4:6-8)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세상에 과연 그 누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이렇게도 장렬하게 최후를 맞으며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역시 하늘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요 인도하심임에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성경에 다음과 같은 참 고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시29:11)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힘과 평강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축복은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로드 웍을 하고 끊임없이 신체를 단련합니다. 심한 훈련은 그들에게 있어 큰 고통이지만 이런 고통을 통해서 운동선수의 체력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의 인격도 시험을 통하고 환난을 통해야 강해지고 굳세어지지 “무풍지대”에서는 결코 강건한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고난은 신앙의 영양제입니다. 성도는 시험과 환난의 영양제를 통해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주의 종들은 수많은 시련과 고난을 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고 석사학위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잠자리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오해를 받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공격을 당하기도 하고, 짓밟히기도 하면서 강인한 신앙인, 성숙한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당한 고난이 바로 그 좋은 실례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이와 같은 고난은 오히려 귀한 복음전도자로 성숙해지는 놀라운 축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부름 받은 자의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창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 말씀 역시 하나님께서 우르 땅에서 우상장사나 하며 살아가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에게는 불행하게도 자식 하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롯이라는 조카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도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 친히 불러내셨으나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런지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런지 그에게는 이 기본적인 대책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숱하게도 많은 위험을 온 몸으로 겪으며 싸워나가야만 했습니다. 애굽에서는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길 뻔 하였고 조카 롯과 그의 온 가속들이 적의 침입으로 빼앗기게 되자 목숨을 걸고 쳐들어가 다시 찾아오기도 하였습니다.
(창14:12-16)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 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십팔 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 왔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나이 백 살에 기적 같이 얻었던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 아들을 데리고 삼일 동안이나 걸어 모리아 산에서 아들을 바쳐드리는 비정의 아버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이시라면 이런 고통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아브라함도 예외 없이 처절한 고통의 늪을 거쳐 나와야만 했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께서 친히 쓰시려고 구별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시려면 세상 사람들과 달리 뭔가가 더 좋고 풍요롭고 고통도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아브라함도 예외 없이 이토록 모진 고난의 강을 건너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바로 오늘 본문에 기록 되어져 있습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는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가는 길을 친히 인도하시고 막판에는 반드시 축복이 되게 하시려고 때로는 깊은 강도 주시고 넓은 바다도 주시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성도에게 있어서 믿음의 고백이며 하나님의 은총을 얻게 하는 길입니다. 멘솔래덤 상표와 주인공 알버트 하이드는 십일조를 드린 다음 언 손에 바르는 약 맨솔래덤을 발명하여 큰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십일조생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YMCA 에 수천 만 달러를 헌납 했고 87세로 죽을 때는 1백50억이 넘는 돈을 선교사업으로 내놓았습니다. 윌리엄 콜게이트도 뉴욕으로 가는 뱃길에서 노인을 만나 “네가 훌륭한 비누업자가 되려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운데 십일조를 드려라.”는 조언을 듣고 이를 실천하여 세계의 재벌이 되었으며 록펠러도 주급 1달러 50센트를 받았을 때부터 십일조 생활을 하여 큰 재벌이 되었습니다. 돈은 모든 사람들이 목숨처럼 지키려고 하는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재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수입의 1/10이라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바로 우리들의 진정한 헌신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총을 얻는 비결은 먼저 하나님께 헌신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이라도 아낌없이 바쳐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전무후무한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