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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손들의 미래를 위하여 (2020년 5월 3일 주일낮설교)

자손들의 미래를 위하여

어린이주일

5. 3, 2020

本文:여호수2:1-12

:崔仁根牧師

 

우리는 지난주일 야곱이 그의 삶에서 최악의 위기를 맞았을 때 어떻게 그 위기를 극복하고 전화위복의 축복을 누렸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당한 위기의 요인도 또한 살펴보았습니다. 야곱처럼 심은 대로 거두는 사람도 그렇게 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는 고향에서는 형과 아버지를 속였고 멀리 타향 외삼촌댁에서는 또한 외삼촌을 속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도 많은 아내들과 자식들 그리고 풍성한 재물은 얻었지만 한 순간에 그 모든 것이 다 날아가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사기꾼에게 하나님은 왜 그렇게도 분에 넘치는 축복을 주었을까요? 단순하게만 살펴보아도 그는 외삼촌의 살기등등한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형 에서의 살기 또한 피해갈 수 있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한결 같이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시고 그렇게 야곱을 보호하시고 지켜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에 대해 그 어떤 대답도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성경을 중심으로 조용히 묵상해 보면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이 숨어 있음을 발견할 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소개하실 때 꼭 이 세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십니다.

(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3: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이로 미루어 볼 때 비록 야곱은 이름 그대로 사기꾼과 같이 살았으나 그 아버지 이삭과 그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은덕으로 위기에서 구원 받고 특별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소중한 자녀들이 오늘 우리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을 누리고 살도록 주어진 인생을 믿음으로 무장하여야 하겠습니다. 남의 나라에 이민 와서 근근이 살아가는 우리들이 우선 살기도 바쁜데 자손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겠습니까? 사업장을 물려주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것보다 천 배 만 배 더 소중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물려주는 부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020년도 어린이 주일을 맞아서 이와 같은 소중한 결단을 하게 된다면 먼 훗날 자손들에게 풍성한 축복이 되어 질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구체적인 신앙생활은 어떠하여야 하겠는지, 오늘 본문에서 그 소중한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적인 선택을 하여야 합니다

(2:1-6)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혹이 여리고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몇 사람이 땅을 탐지하러 이리로 들어 왔나이다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탐지하러 왔느니라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가로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 하였으나 실상은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우리는 이 사건에서 라합의 용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여리고 왕이 라합의 집에 정탐꾼이 들어와 있는 것을 다 알고 사람을 보내어 그 사람들을 끌어내라고 어명으로 명하는데도 그는 그 왕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왕의 명령을 어기고 적국의 간첩을 숨겨준다면 그것은 극형에 처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합은 이렇게도 무서운 결단으로 왕을 대항하고 있으니 실로 대단한 선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라합이 이렇게 한 배경에는 자신과 자신의 모든 가족들의 미래를 내다보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는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권세 있는 군대이기에 그들이 여리고를 쳐들어온다면 왕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다 다 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똑바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라합은 그녀가 하는 사업의 특성상 온갖 사람들의 정보를 다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들이 처한 현실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단 한 번만 유행하고 지나가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바이러스는 그 누구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 급속도로 전 세계를 파고들었습니다. 스스로 변이를 일으키고 확장하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무서운 속도로 전파하며 치명적으로 사망에 이르게 하며 전 세계의 생명과 경제를 삼켜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내일을 예측하거나 장담하지 못하도록 너무나도 짧은 시간에 너무나도 무서운 역사를 이 땅에 만들어 놓았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인류사회는 획기적인 변화를 만들고 그 변화를 따라 말세의 비참한 역사를 체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그럭저럭 고통을 당하며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의 후손들은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라합과 같은 결단을 해야만 합니다. 여리고 왕이냐, 아니면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이냐,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부디 우리들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손들을 위해 이 세상의 모든 것의 상징인 여리고 왕이 아니라 지금은 초라하고 보잘 것 없어도 정탐꾼을 선택하는 놀라운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라합의 이와 같은 놀라운 결단과 선택은 결국 모든 가족들을 죽음에서 구원하는 기적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2:8-11)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비록 라합은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술을 팔며 살아가는 기생에 불과하였지만 그의 속사람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하나님에 대해 정확하고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단순하게 기적을 행하는 능력 있는 하나님 정도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일하시던 하나님을 이렇게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녀는 이렇게도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왕 앞에 굴하지 아니하고 담대하게 정탐꾼을 숨기고 목숨을 건 모험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아는 것이 힘입니다. 솔직히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직분을 받고 충성하고 헌신하지만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라합에 비하면 너무나도 연약하고 부족한 종들임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 그 누가 라합을 기생이라고 무시하거나 천대하거나 하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윤리를 따르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하나님을 절대자로 믿고 고백하고 따르는 생명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들이 믿는 하나님을 절대적인 전능자로 분명하게 알고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들의 자손들에게 가슴 깊이 가르치고 새겨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훗날 삶의 위기를 만났을 때 라합과 같이 왕 대신 하나님을 선택하고 따르는 결단을 할 수 있도록 키워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코로나바이러스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기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과연 이 힘든 때에 집안에 아이들과 함께 갇혀서 여러분들은 무엇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까? 희망을 전해줍니까? 아니면 짜증과 불평을 보여줍니까? 먼 훗날 코로나바이러스로 일도 못하고 형편도 어렵고 영육간에 짜증나고 힘들 때 엄마 아빠가 믿음으로 대처하고 그런 중에서도 감사를 잊지 않고 최악의 경우에도 힘을 다하여 예배를 드리던 그 멋들어진 모습들을 아이들에게 보여준다면 이는 천 마디 교훈보다 더 아이들의 영혼에 복된 영향력을 끼쳤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더욱 우리들이 그와 같은 값진 영향력을 이이들에게 보여주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들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에 관해 똑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인생은 우리들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거기에 필수적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아이들에게 똑바로 보여주고 우리들도 또한 그렇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승리자였던 성군 다윗은 명령하고 있습니다.

(37:5-6)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맡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알고 믿는 자라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맡기고 기다리며 기대하게 될 때 놀라운 그 하나님의 축복을 만지게 되는 것입니다.

(37:9)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할렐루야!

라합은 온 가족들을 죽음에서 건져냈습니다

(6:23-25)

정탐한 소년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 부모와 그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 진 밖에 두고 무리가 불로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사르고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더라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탐지하려고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었더라

라합이 여리고 왕의 명을 거절하고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을 숨겨 주었던 것은 그로 인하여 자신과 온 가족들이 여리고성이 멸망을 당할 때 구원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2:12-13)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먹고 마시며 현실에 급급하고 있을 때 라합은 비록 기생이었지만 내일에 이루어 질 일을 예감하고 그 길을 대비하는데 모든 역량을 다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오늘 우리들도 오늘이라는 날에 연연하지 말고 먼 미래를 내보다보며 그 시대를 살아가야 할 우리 자손들의 삶과 구원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라합은 이에 대해 성경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결정적인 결단과 소망을 안고 대처하여 온 가족들을 구원하는 기적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수아 6장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진실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의 그 약속은 결국 여리고 성이 멸망을 당할 때 정확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여리고 왕을 배신하고 한갓 정탐꾼들을 숨기고 섬겼던 라합은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온 가족들도 멸망의 순간에 구원 받는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내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라합의 이러한 모종의 결단을 믿음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결국은 영혼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벧전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세에 믿음이 필요한 이유를 우리는 이렇게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최후 마지막 순간에 구원을 받기 위함입니다. 여리고와 같이 굳게 성문은 닫혔고 성은 견고하여 難攻不落(난공불락)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無用之物(무용지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여리고 성 사람들이 안주하고 평안하고 있을 때 이미 라합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구원 받을 길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라합의 판단과 선택을 하나님은 믿음으로 보셨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이와 같은 믿음입니다. 그것만이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고 우리들과 우리 자손들의 미래를 보장 받을 수가 있습니다. 모쪼록 이 복된 5월 첫 번째 주일에 이와 같은 놀라운 믿음이 어린주일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가득차고 넘치기를 구원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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