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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스승의 명령 (2020년 5월 17일 주일낮설교)

최고 스승의 명령

스승의주일

5. 17, 2020

本文:요항복음13:12-17

說敎:崔仁根

 

지난 주 초 힘들어 하는 한 집사님과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다시 한 번 더 저 자신을 생각해 보게 하는 말을 하나 듣고 약간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요즘 몸 상태도 별로 안 좋고 마음도 공허하고 외롭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마음을 쏟아놓고 이야기 할 친구도 없고 믿을만한 사람도 없어서 그렇습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스스로 나는 아직도 성도들의 좋은 스승이 되지 못하였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물론 흉허물을 친구처럼 다 털어놓고 대화할 수 있는 대상이 꼭 스승이 될 수는 없겠지만 성도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선뜻 대화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그런 스승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 모두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귀한 교훈으로 남아 있습니다. 2020년도 스승의 주일을 맞아 함께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축복의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스승이십니다

(13:13-14)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친히 밝혀주셨듯이 우리들의 선생님이십니다. 이 말씀에는 우리들이 그 스승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따라야 한다는 의미와 우리들은 그 귀한 선생님의 제자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요즘 시대는 하나님을 섬기고 인생을 바로 살아갈 수 있는 스승을 찾기보다는 같이 즐기고 같이 놀 수 있는 동류를 더 찾고 있습니다. 같이 술 마시고 같이 개임하고 같이 도박하는 친구는 필요로 하여도 자신의 그릇됨을 꾸짖어 주고 같이 새 길을 개척할 좋은 스승이나 친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우연한 결과가 아닙니다. 지금이 말세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종말의 한 징조입니다.

(딤후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요즘 자식들 키우는 부모라면 모두가 다 공감할 것입니다. 이삭처럼 순종하던가요? 선선히 부모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한 번이라도 포기하고 따르던가요? 절대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자랄 때만 해도 언제나 부모님을 우선 생각하였습니다. 부모님께서 허락해 주실까? 좋아하실까?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모두가 제 마음대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고 맙니다. 바로 이것이 말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 단도직입적으로 선포하십니다.

(13:13-14)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고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옳다고 하시면 천 년이 지나도 옳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 예수님을 우리들의 선생님으로 새롭게 가슴에 모시고 그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일찍이 예수님께로 나와 배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배우기를 힘쓰는 제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배우고 인생을 배우고 천국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제자 된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배우려는 겸손과 열정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는 제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들이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 제자들일 진데 무조건 스승이신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배울 것이 어디 한 두 가지이겠습니까? 마태를 통해서 마태복음 11장에서 배울 것은 오직 하나 온유와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슴이 따뜻하시고 오래 참으셔서 단 한 사람도 정죄하거나 심판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와 같은 예수님의 온유를 배어야 합니다. 자신을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고 도망 가버린 베드로도 예수님은 친히 찾아가시고 빈 배가 만선이 되는 축복으로 보상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원수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그와 같은 원수를 해결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고 말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형제와 화목하는 것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보다 더 귀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을 닮은 온유와 겸손이 없다면 어떻게 그렇게도 강한 자존심을 버리고 원수와 화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아무리 미워도, 아무리 자존심이 상해도, 아무리 손해가 나도 우리들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중국의 유명한 노자는 상창이라는 스승에게 도를 배웠습니다. 어느 날 상창이 늙어서 죽게 된 것을 안 노자는 스승을 찾아가서 "사부님, 사부님께서 세상을 뜨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게 마지막 가르침을 주십시오."하고 부탁하였습니다. 상창은 얼마 동안 노자의 얼굴을 보더니 입을 열고는 "내 이빨이 있느냐?"라고 묻었습니다. 그러자 노자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시 상창은 "내 혀는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노자는 "사부님 혀는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상창은 ", 이제 알겠느냐?"고 했습니다. 노자는 "사부님 알겠습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하고 큰 절을 드리고는 물러나왔다고 합니다. 이들이 주고받은 이야기는 간단명료합니다. 그렇다면 노자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일까요? 이 세상에서 이빨처럼 굳고 강하고 날카로워서 입술과 혀를 물어서 피를 내는 것은 부러지고 깨지고 빠져나가고 없어집니다. 정치권력, 무력, 돈으로 사람을 물어서 피를 내는 강하고 굳고 날카로운 것은 결국 부러지고 빠져나가서 다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혀처럼 바보스럽게 물리고 피가 나고 연약한 것은 오히려 오래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노자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만이 오래 남는다는 진리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마지막 떠나가시는 스승 앞에서도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엎드렸던 노자는 결국 인생여정에서 가장 소중한 진리를 배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하늘에 계신 최고의 스승이신 예수님이나, 이 땅에서 지식과 경륜을 쌓으신 스승님으로부터 과연 이렇게 배우려고 사모하는 열정이 있습니까? 이렇듯 좋은 제자는 항상 스승을 사모하고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13:14-15)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우리들의 영원한 최고의 스승이신 예수님은 그 무서운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을 불러 모아 하나씩 하나씩 냄새나는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제자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이요 또 다른 하나는 나중에 그렇게 제자들과 이웃들을 사랑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1절과 15절에 그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렇게도 자상하게 몸소 모범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교회에서 아영이나 예빈이를 보면 그 부모나 할아버지 할머니가 동시에 어린 아영이와 예빈이로 돌아가는 것을 볼 우 있습니다, 윙크를 하라고 윙크하는 시늉을 보이고 할렐루야 하라고 두 손을 높이 들고. 사랑합니다 하라고 양손을 머리에 얹는 행위들이 그렇습니다. 그 누가 시켜도 하지 않을 점잖으신 분들이 왜 그렇게도 어린아이와 같이 놉니까? 귀염둥이 손녀들이 따라하도록 모범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시며 친히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냄새나는 제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씻어주셨던 것입니다. 아영이와 예빈이는 곧장 윙크도 하고 손을 모으고 기도도 하며 잘도 따라하는데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이처럼 몸소 친히 모범을 보이시며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신 최고의 스승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따라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오직 하나 이제는 스스로 많이 컸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늘이 보고 윙크! 하고 눈을 찡그리면 하늘이가 유민이처럼 따라 하겠습니까? 씩 웃고 따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하여 명령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 하나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들이 너무 커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오만한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하라고 체면도 버리고 모션을 막 취하며 보여주었는데 상대가 뚱한 눈으로 아니면 비웃는 모습으로 쳐다보면 참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 주님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이렇듯 섬기는 모범과 전도하는 모범과 기도하는 모범을 몸소 다 보여주셨는데 그렇게 따라 순종하며 그 스승의 멋들어진 제자가 되겠노라고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을 저는 아직 그렇게 많이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우리들이 어떻게 세상으로 나가서 그 세상이 최고로 좋다고 만족하며 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며 전도할 수가 있겠습니까? 역시 가서 제자 삼으라!“는 표어는 표어로만 붙어 있다가 한 해가 저물면 그 세월과 함께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의외로 좋은 선생님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자들과 눈높이와 키 높이를 맞추며 사명감을 가지고 제자들을 길러내는 훌륭하나 선생님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지금까지 살만 한 세상이 된 것입니다.

미국 밴드빌 대학 바로 건너편에 유명한 피바디 교육대학을 일으킨 피바디 선생님의 일대기 속에 퍽 감명 깊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피바디 선생님은 젊었을 때에 초등학교 교사로 있었습니다. 그가 초등학교 2학년생을 담임하고 있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하루는 교육 계획에 따라 자기네 반 아이들에게 박물관 유물을 구경시켜 주기로 계획하였습니다. 이 계획 때문에 피바디 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 유물에 대해서 설명해 주기 위해서 미리 알아 두어야 했기에 사전 답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박물관을 지키고 있던 수위는 하루 종일 앉은뱅이로 돌아다니며 메모를 하고 있는 피바디 선생이 정말 앉은뱅이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갈 때 보니까 벌떡 일어서서 걸어 나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수위는 "저는 선생님이 들어오실 때 앉은뱅이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성한 사람이었군요! 왜 그렇게 무릎으로 앉아서 돌아다니십니까? 무릎을 그렇게 꿇고 다니면서 유물을 보시는 분은 처음 보았습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피바디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내일 저는 우리 반 아이들을 이곳에 데려와 유물을 구경시켜 주려 하는데 우리 반 아이들은 이제 2학년이라 키가 다 작습니다. 그래서 우리 반 아이들이 바라보는 그 눈높이에서 즉 아이들이 볼 수 있는 그 시각에서 유물을 보았다가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선생님입니까! 이 피바디 선생은 아이들의 입장에 자기를 세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대로 된 훌륭한 스승의 모습입니다.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여줄 수 있는 선생님이 최고의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스승님께서 명령하십니다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는 말씀과 같이 우리 예수님은 온 몸으로 사랑을 실천하시고 이제 우리들에게 그렇게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우리 예수님의 사랑은 솔직히 죄인 된 우리 인생들이 그렇게 쉽게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복음서에 기록된 사건들을 중심으로 엿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예수님은 상대가 그 누가 되었던지 간에 정죄하거나 책망하거나 벌을 주지 않았습니다. 오래참고 기다려주시고 용서해 주시면서 끝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영원한 최고의 스승이신 예수님은 몸소 그렇게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신 후 우리들이 어떻게 그 스승의 그 제자가 될 수 있는지, 간단하면서도 강력한 명령을 던져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그대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 스승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끼고 있습니까? 사도 요한은 그것을 다음과 같은 단 한 마디의 말씀으로 요약해 두었습니다.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최소한 사도 요한의 눈에 비친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짜 사랑은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배신하거나 돌아서거나 변덕부리지 않는 사랑, 바로 그 사랑이 최고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날 어떻습니까? 이 종이 평생 목회하면서 경험한 성도들의 사랑이란 문자 그대로 변덕쟁이 헛 사랑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변덕이 심한지. 어쩌면 그렇게도 이기적인지, 어쩌면 그렇게도 순간적인지......, 그랬습니다. 명세기 예수님의 제자로서, 성도로서, 그들의 사랑은 완전 가짜였습니다. 이와 같은 오늘 우리들의 사랑을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그래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살아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의 가장 독특한 특징 하나는 변하지 않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면전에서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고 도망 가버린 베드로를 만나 똑 같이 세 번씩이나 물어보셨던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말입니다. 왜입니까?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하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배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이 많습니다. 새삼스럽게 잘못을 발견하게 된 냥, 호들갑 떨지 말고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지긋하게 사랑할 줄 아는 제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남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만큼 나도 남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잘난 척, 완전한 척 남을 비난하지 말고 참아주고 용서해주고 이해해주며 사랑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우리들의 기분 따라, 유익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싫어도 해야하고 힘들어도 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랑하게 되면 거기에 걸 맞는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엄마가 도망 가버리고 새엄마 밑에서 자라는 한 사내아이가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계모는 학대한다고들 하지만 그 계모는 그 아들을 친아들처럼 따뜻하게 사랑해 주었습니다. 아버지도 엄마 없는 어린 것이 불쌍해서 새엄마가 조금만 음성이 높아도 불쌍한 아들에게 왜 그러느냐고 채근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축하한다며 침대며 책상이며 의자를 새것으로 선물해 주었습니다. 엄마가 아들 방 정리를 도와준다면서 옛날 책상서랍을 쏟아, 버릴 것은 버리고 다시 보관해야 할 것은 보관하도록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여러 장의 상장도 있었고 성적이 좋은 통지표도 있었습니다. 옆에서 함께 거들던 아버지가 갑자기 안색이 변했습니다. 그 아버지의 손에는 서류 같은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아들의 혈액형이 쓰여져 있었는데 B형이었습니다. 자기는 O형이고 전부인은 A형이었기 때문에 B형의 아들이 나올 수 없었기에 너무나도 놀랐던 것입니다. 당장 이튿날 아들을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갔고 아들의 혈액형을 다시 조사하였지만 틀림없는 B형이었습니다. 노발대발한 아버지는 전 부인이 자기의 씨가 아닌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당장에 아들에게 전부인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던져주며 연락하여 찾아가라고 그 어린 것을 쫓아내버렸습니다. 아들은 그것을 들고 울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한참 동안 벨이 울린 후 엄마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울면서 전화하는 아들에게 매몰찬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감히 전화를 하느냐? 두 번 다시 이렇게 또 전화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아들은 할 수 없이 울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딱히 갈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다시 노발대발했지만 새엄마는 그런 아버지를 가로 막고 이 아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이 아이는 내가 책임지고 키울테니 제발 쫓아내지만 말아주세요.”하며 통사정을 하였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아버지는 툭하면 술을 먹고 들어와 새엄마에게도 폭력을 행사하며, “네가 낳은 딸도 내 씨가 아닐 것이라.”고 문제를 삼으며 행패를 부렸습니다. 이와 같은 남편의 학대를 견디다 못한 새엄마는 어린 자신의 딸과 이제 겨우 중학교에 들어가는 남의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손발이 부르트도록 일을 하며 어린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해나갔습니다. 아들은 너무나도 새엄마에게 미안했습니다. 친 엄마도 버린 자기를 이렇게도 고생하며 따뜻하게 키워주시니 새엄마에게 너무나도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은혜를 갚는 길은 열심히 공부하여 성공하는 길밖에 없다고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서울의 일류대학을 나왔고 훌륭한 직장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예쁜 여자도 만나 결혼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너무나도 긴 세월 고생을 하며 뒷바라지를 해 주신 새엄마를 모시고 지금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진짜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비록 남이 낳은 자식이지만 불쌍해서 거두어 주고 성공하도록 뒷바라지를 해 주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게 사랑을 심었더니 불행할 것만 같았던 자신의 미래가 이렇게도 아름답게 보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열매는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최고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명령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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