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빌립보장로교회

-- 성령의 열매맺는 교회 --

Thu03282024

Last update12:00:00 AM

Font Size

Profile

Menu Style

Cpanel
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이 가정을 본 받으라! (2020년 5월 24일 주일낮설교)

이 가정을 본 받으라! (2020년 5월 24일 주일낮설교)

이 가정을 본 받으라!

5. 24, 2020

本文:욥기1:1-5

說敎:崔仁根

 

유치원생들이 그린 자신들의 엄마 그림을 보면;

1) 입만 큰 어머니 - 잔소리 많이 한 어머니

2) 손만 큰 어머니 - 매를 들고 때린 어머니

3) 귀가 없는 어머니 - 무슨 말을 해도 안 들어 주는 어머니

우리는 과연 어떤 부모일까요? 요즘 우리는 예쁘게 자라나는 아영이와 예빈이를 봅니다. 이렇게 Social Distance를 강조하고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해도 어떻게든 가까이 하려고 본능적으로 접촉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저마다 이뻐서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고 멀리서도 눈을 맞추며 사랑이 넘치는 눈과 얼굴로 함께 합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 세상 어디에서 어린 아이들이 이와 같은 사랑을 받으며 자라날 수 있겠습니까? 이런 환경은 아이들로 하여금 자존감을 갖게 하여 매사에 자신감과 긍정적인 성품으로 자라나게 되니 악한 이 세상에서도 당당하게 악을 이기고 승리하는 청년으로 자나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역사가 37년이나 되고 있기에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장성하여서도 변함없이 부모님께 효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젊은 권사들인 연정권사나 승영권사만 보아도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하게 그 증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종이 연정이를 처음 만났을 때는 고1이었고 승영이를 처음 만났을 때는 중3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거의 40여년을 지켜보지만 변함이 없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흐트러짐 없는 효성으로 부모를 섬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람의 됨됨이가 어릴 때부터 믿음에 굳게 서 있을 때만 가능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젊은 부모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귀하게 여기고 자녀들을 어렸을 때부터 믿음으로 훈련하고 모범된 삶을 보여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 아이는 문제 가정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은 인류 역사가 증거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정의 달 5월의 네 번 째 주일인 오늘은 욥의 가정을 중심으로 교훈과 지혜를 얻어 보려고 합니다. 함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욥의 믿음과 아버지로서의 역할

(1: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1: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의 자녀들이 큰 복을 누렸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그 아버지 욥의 놀라운 믿음과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스 땅에 살았던 한 사람 욥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인정 하시는 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품이 순전하였고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당대에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1:3)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 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는 말씀과 같이 욥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종은 참으로 긴 세월 동안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숱하게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습니다. 실로 잘 살고 갑질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출세하고 교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가 부산에서 참 잘 사는 부잣집에서 3년 동안 입주 가정교사를 하였습니다. 그 사장은 원목을 수입하여 용호동 앞 바다에 몇 년씩 담가두었다가 그것을 빚아 집을 지었는데 거의 50여 년 전 그 당시에 마루와 2층 계단과 집 벽을 그 통나무를 빚어 만들었으니 그 화려함과 친환경적인 분위기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방이 7개였으니 5남매에게 하나씩 주고 안방과 식모 방으로 그렇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방마다 인터폰시스템이 되어 있었고 전기값 비싼 당시 한국에서 모든 방에 전기코일을 깔아 방이 절절끓도록 만들어 겨울에는 방에서 단내가 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찬바람 부는 겨울 어느 날 인터폰으로 5남매를 불러 안방에서 보약을 먹이면서 식모와 가정교사만 딱 빼놓았을 때, 어린 마음에 눈물이 나도록 그것이 서럽고 슬펐습니다. 자기 자식을 가르치는 선생님인데 같이 먹이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랬던 그들이 저를 3년을 겪어보니 괜찮은 사람으로 보였던지 사위 삼겠다고 프로포즈하였을 때 만정이 떨어져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부자의 한 단면입니다. 하지만 욥은 이렇게 당대에 큰 자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부자였지만 그는 갑질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그의 성품은 순전하고 정직하였습니다. “순전하였다는 이 말을 NIV에서는 “Blameless”라고 써 놓았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결점이 전혀 없는, 흠잡을 데가 없는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흠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욥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욥은 정직하였다고 하었습니다. 이것을 역시 NIV에서는 “Upright”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신적으로 올곧고 청렴한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사랑하는 빌립보의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도 우리 자신과 우리들의 후손들을 위해 이처럼 고귀한 성품을 간직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우리들의 성품이 “Blameless” 즉 흠잡을 데가 없고 “Upright” 즉 청렴할 수 있도록 우리 속의 추한 교만과 욕심과 거짓을 걸러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그 성품 자체가 진실하시기 때문에 우리들도 최소한 이렇게 순전하고 정직하여야 그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욥이 그 풍성한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눈에도 보이지 않는 그의 속사람이 이렇게 순전하고 정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에서 떠난 영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매우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복을 주시고 친히 아벨의 제사처럼 받아주십니다.

(10:34-35)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10:27)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연세는 짧아지느니라

(14:26)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는 말씀들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복을 받고 그 자녀들이 복을 누리는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의 이와 같은 성품과 믿음을 보시고 그 후손들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욥과 같은 성품과 믿음으로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녀들이 복을 누릴 수 있도록 신선한 변화를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욥의 자녀들의 형제 사랑

(1:4)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자는 자기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을 아프게 하는 자요 그 다음에 가장 악한 자는 같은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형제자매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원수 맺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람이 부모님을 공경하고 형제자매간에 서로 아끼고 사랑한다면 그는 사회생활에서 결코 실패하지 아니하고 어디에 가든지 인정받고 성공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욥은 남들보다 좀 많은 10남매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녀들은 서로 우애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4절에 그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그 10남매는 생일은 맞으면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형제자매들을 몽땅 집으로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고 형제 되고 자매 된 사랑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평범한 것 같지만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닙니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10남매가 매번 그렇게 같이 모인다는 것은 그만큼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가장 큰 효도인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형제였던 가인과 아벨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형이 아우를 쳐 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이 형제지간에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의 부모는 인생을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세의 8형제들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그들은 서로 미워하고 싫어하며 콩가루 형제가 아니었습니까?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까지 찾아온 다윗을 형들은 그 얼마나 악담하며 미워하였습니까? 그리고 그들은 집안에서 득실거리고 놀면서 그 어린 막내 다윗을 들판에 내보내 양을 치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아버지 이새는 또한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야곱의 열 두 아들들은 또한 어떠하였습니까?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며 그 어린 동생 요셉을 구덩이에 내던졌다가 그곳에 물이 없어 요셉이 죽지 않자, 결국은 애굽의 보부상에게 팔아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아버지 야곱에게는 짐승이 요셉을 잡아먹었다고 거짓 보고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로 인해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당한 고통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피눈물 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이로 미루어 볼 때 단 한 가정도 자식들 때문에 부모의 가슴이 피멍으로 고통당하지 않았던 가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욥의 10남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욥의 10남매는 이렇게도 아름다운 자녀들이 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욥의 믿음으로부터 나온 풍성한 축복의 열매였기 때문입니다.

(1: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1: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잘나서 우리 자녀들을 잘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아볼로는 심었고 바울은 물을 주었으되 자라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라고 선언한 말씀처럼 우리 자녀들은 비록 우리들이 만들었고 우리들이 낳았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복 주시고 키우시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부모들은 아볼로와 바울과 같이 심고 물주는 역할만 할 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잘 키우시도록 하나님께 욥과 같이 믿음으로 반듯하게 서 있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112:1-3)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욥은 오늘 본문 1절에서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소개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112편 말씀에 하나님께서 복이 있는 사람이 누군지 기록해 두셨는데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말씀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욥은 바로 이 말씀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우리들의 자녀들이 땅에서 강성하고 복을 누리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욥과 같이 성품이 순전하고 정직하며 믿음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들을 축복하는 부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우리 자녀들에게 반드시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욥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

(42:12-17)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며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 그 후에 욥이 일백 사십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는 말씀과 같이 욥은 그 모진 고난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받았고 덤으로 놀라운 축복 또한 원 없이 누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우리들이 욥이 받은 이 축복 속에서 욥의 세 딸들이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딸이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욥의 일곱 아들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축복이 무엇이었는지 기록하지 않았지만 세 딸들의 아름다움은 일부러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아름답고 어디에 가든지 칭찬을 받는 것은 부모로서 최고의 축복이요 영광입니다. 욥이 하나님으로부터 덤으로 받은 140년의 세월이 어떠한 시간들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 딸의 아름다움으로 아버지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변의 칭송을 받으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행복하고 부족함이 없는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짧은 인생 살아가면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자녀들 때문에, 몸도 마음도 삶도 아름다운 자녀들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칭송을 받으며 말년을 보내는 부모가 아니겠습니까? 욥은 바로 이와 같은 축복을 누렸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도 욥과 같이 말년이 건강하고 자녀들 때문에 칭송을 받으며 행복을 누리다가 그 자녀들 품에서 천국으로 가는 고귀한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짧은 인생에서 무엇이 과연 행복인가? 저술가인 윌 듀랜트는 연구와 학식에서 행복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지식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여행을 해보았으나 권태만을 느꼈습니다. 재산을 모아보았으나 걱정과 불화만 확인하였습니다. 저술에 몰두했으나 피곤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차 안에서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을 보았습니다. 이어서 한 남자가 기차에서 내려 아기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여인과 아기에게 입 맞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족을 태운 차가 조용히 떠나는 것을 바라보며 듀랜트는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보고 느낀 것 중에 이 보다 더 포근하고 행복한 모습이 없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Add comment


Security code
Refre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