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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필요합니다! (2020년 6월 7일 주일낮설교)

사랑이 필요합니다!

6. 7, 2020

本文:요한일서4:7-12

說敎:崔仁根

 

[시민과 소방대원이 몸으로 차량을 막아 의식 잃은 운전자를 구출했다. 인명 피해는 없었다. 경북소방본부는 2일 김천소방서 소속 이윤진 소방대원과 시민 3명이 30대 운전자 A씨를 구조했다고 밝혔다. A씨는 지난 519일 오후 5시쯤 경북 김천의 감천터널을 지나다 경련을 느끼고 의식을 잃었다. A씨의 차량은 편도 2차선 터널 안에서 10여 초 간 차선을 넘나들고 벽에 부딪히며 느린 속도로 수십 미터를 움직였다. 당시 야간 근무를 위해 출근 중이던 이윤진 소방대원은 A씨의 차량을 뒤따라가다 이상 상황을 목격한 뒤 차선을 추월해 A씨 차량 앞에 정차했다. 이후 온 몸으로 A씨 차량의 전진을 막으려 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블랙박스 영상에는 이 소방대원이 온 힘을 다해 차량을 막았지만 힘이 부족했고 A씨는 여전히 운전석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의식을 잃어 위험한 상황이 담겨 있었다. 위기의 순간 시민 3명이 합세했다. 터널 내에서 차량들이 연달아 정차하자 시민 3명이 상황을 확인하러오다 힘을 보탠 것이다. 이윤진 소방대원은 차량을 몸으로 막는 동시에 합세한 시민들에게 창문을 두드려 의식을 잃은 운전자 A씨를 깨워달라고 요청했다. 다행히 A씨가 정신을 차리고 잠긴 문을 열자 시민이 직접 기어를 D(운전)에서 P(정차)로 바꾸면서 차량이 멈췄다. 이 소방대원과 시민들은 2차사고 예방을 위해 A씨를 터널 내 빈 공간으로 이동시켰다. 이들 모두 구급차와 경찰차가 도착할 때까지 현장을 떠나지 않았고 2차 교통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교통정리를 해 추가 사고는 없었다. A씨는 외상이 없어 병원 이송을 거절한 뒤 가족과 함께 자택으로 돌아갔다. A씨가 구급차에 이송되는 것을 본 시민 3명은 모두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사고를 조사한 김천경찰서 측 역시 별다른 피해가 없었고 의인들도 금방 자리를 떠나 이름을 알 수 없었다.”고 했다.](조선일보 62일자 기사에서 발췌)

오늘날 이런 의인들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문에 나올 정도로 희귀합니다. 남을 위해서 엄청난 희생을 감안하면서 헌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피를 흘리고 죽어가도 외면하는 이 시대에 참으로 아름다운 미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과 사회는 참으로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너무나도 사랑이 메말라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자기 사신밖에 모르는 극단주의적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요일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닙니다. 권세가 아닙니다. 평범한 소시민인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은 새롭게 주어진 현충의 달 6월을 맞아서 지금 우리들에게 왜 사랑이 필요한지 함께 배우며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사랑이 있어야 하나님이 있습니다

(요일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도 없다는 의미로 말씀을 남겨 두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사랑을 동등한 위치와 가치에 두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사랑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우리들이 사모해야 할 가장 소중하고 큰 은사는 곧 사랑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고전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제일 좋은 길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 말씀을 이어서 사랑장인 고전도전서 13장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구약 성경은 사랑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구구절절이 기록해 놓은 것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사도 요한은 단 한 절로 요약해 두었으니 요한복음 3:16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를 짧지만 강한 메시지로 남아 있습니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말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이렇게 성경을 읽고 배워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특별히 사랑의 사도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었던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이와 같은 사랑이아기를 그 누구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록해 두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말씀이 바로 그 중의 하나입니다. 결국 신앙생활이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에게 이처럼 소중한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이 없는 것과 같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심장 없는 사람처럼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아주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일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고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 누구도 자신에게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 점검조차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에게 유익이 있는가. 없는가만 따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이 말세이고 말세에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사랑이 식어지고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랑이 없어진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이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도 하나님도 오직 자신에게 유익이 될 때만 존재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가슴으로 한 말씀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에게 사랑이 없다면 결국 하나님도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돌아선 베드로에게 찾아가셔서 아무런 다른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만 거듭 거듭 물어보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21:15-17)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그랬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배신자 베드로에게 무려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똑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3은 하나님의 수로 완전수입니다. 이는 완벽하게 하나님의 사명인 하나님의 양을 인도할 지도자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오늘 우리들에게 꼭 있어야 할 요소 하나는 바로 사랑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랑이 그렇게도 필요한 것은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는 날 동안 이와 같은 사랑을 실천함으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객관적으로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이웃의 허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벧전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우리들에게 그토록 사랑이 필요한 것은 그 사랑이 있어야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의 허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상대방의 허물을 보지를 못합니다. 그럴 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콩깍지가 씌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콩깍지가 벗어지는 데는 최고로 6개월이 걸린답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뇌하수체에서 사랑의 호르몬이 분비 되어 상대의 허물을 볼 수 없게 되고 모든 것이 다 좋아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호로몬은 무한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최장 6개월 정도가 지나면 멈추게 되는데 바로 그 때 꽁깍지가 벗어진 듯 상대의 허물이 다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눈에 반한 사람일수록 더 빨이 싫증이 나게 되고 결국에는 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두 눈을 뜨고 상대의 허물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이와 같은 소중한 사랑에 빠지게 되면 상대방의 모든 허물이 가리워져서 보이지 않게 되고 그렇게 멋들어진 마음으로 상대방의 허물을 탓하지 아니하고 따뜻한 가슴으로 품어주고 안아주게 되니 그 무서운 율법의 요구를 다 수용하게 되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사랑은 결국 상대방의 모든 죄까지도 덮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되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풍성한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소개해 드린 위의 세 가지 성경 구절 외에도 사랑의 효능은 성경 곳곳에 보석처럼 박혀 있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풍성한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실례를 하나 든다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자신을 팔아 돈을 챙긴 가룟 유다를 향해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26:48-50)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가룟 유다가 로마 군인들로부터 돈을 받고 군호를 서로 정하였는데 자기가 입을 맞추는 그 사람이 예수님이니 내가 입을 맞추거든 잡으라고 하고 천연덕스럽게 예수님께로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하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렇게도 가증스러운 배신자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친구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에게 가능한 모습입니까?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이렇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셨을까요? 예수님 속에 하나님께서 심어 놓으신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상대방의 허물을 보이지 않게 하고 상대방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는 놀라운 능력과 권세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는 미우라 아야꼬가 쓴 빙점이라는 소설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는 사랑의 능력입니다. 주인공 여자는 목사인 아버지가 정해둔 신랑감을 버리고 세상에서 놀아나는 건달과 눈이 맞아 아버지를 배신하고 가출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부모를 떠나 타락의 길로 가버림으로 아버지의 위치와 사명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던 딸을 아버지는 바보처럼 대문을 열어 놓은 채 밤낮으로 기다리고 용서하여 결국에는 그 딸을 회복시키는 사랑 이야기가 소설의 맥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미움과 다툼과 배신이 난무하는 이 어지러운 마지막 때에 허물을 덮어주고 죄를 용서해주며 하나님의 심장소리를 듣도록 만들어 주는 길은 오직 하나 사랑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보다 더 큰 능력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이 지옥 불에 들어가야 할 우리들을 구원하여 천국 백성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강해집니다

 

(8:6)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지금 미국은 간신히 코로나바이러스로부터 해방 되려는 극적인 순간에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들에게 목이 눌려 사망한 사건으로 전 미국이 고통의 소용돌이 속에 잠겨들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이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가장 극명한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엣 말에 죄는 미워하여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죽을죄를 지었을지라도 이미 두 손에 수갑을 차고 있는 사람에게 무릎으로 목을 짓눌러 질식하여 죽을 때까지 폭력을 행사하였다는 것은 증오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이렇듯 이 세상에서는 이제 더 이상 가슴 뭉클한 사랑을 찾아보기란 참으로 어렵게 되었습니다. 가슴 속에는 증오만 가득하여 건드리기만 하여도 폭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도 코로나바이러스로 되는 사업이 없는데도 유독 주가가 폭등하고 물건이 없어서 팔지 못하는 사업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총기류 사업입니다. 지금 총 하나를 사기 위해서는 주문을 해 놓고도 5-6개월을 기다려야 할 정도입니다. 요즘 극렬하게 일어나는 데모로 사업장이 파손 되고 물건이 약탈 되며 아수라장이 되고 있는 현장에서 가게를 가진 업주들은 총을 들고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이 나라가 총으로 일어나 총으로 망하게 되는 가장 보편적인 모습입니다. 바로 이 때 우리 믿는 성도들이 사랑의 필요성을 가르치고 사랑의 능력을 보여주는 그런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지혜자 솔로몬은 사랑의 능력을 죽음처럼 강한 것이라고 선언해 두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삶의 현실은 사랑이 메말라 가을 낙엽처럼 마음도 영혼도 죽어가고 있으니 오늘이 바로 말세인 것입니다. 남을 죽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도 죽이는 일이 이 세상에 너무나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40대 초반의 전업주부가 남편의 박봉으로는 아이들의 학원비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직장을 구하여보려고 나섰지만 40대 가정주부에게 오픈 되어 있는 직장은 없었습니다. 몇 달을 쫓아다녔지만 직장을 구할 수 없게 되자 할 수 없이 지인이 소개해 준 장례식장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문객들이 식사를 하고 나면 뒷정리를 하는 정도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부가 교통사고로 동시에 세상을 떠난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전에 망자와 같이 일을 하던 몇 명이 다녀갔다고는 하나 자신이 일하는 동안에는 단 한 사람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상주라고는 아직 얼굴에 솜털도 안 떨어진 중학교에 다니는 딸 하나만 울고 있었습니다. 그 부부는 고아로 자라났고 형제도 친척도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조문객이 없었고 하나 있는 딸의 주변에도 또한 아무런 친척도 없었습니다. 밥도 안 먹고 울고만 있는 아이가 너무나도 불쌍해서 자기 일처럼 모든 장례를 도와 처리하고 외롭게 홀로 남은 딸을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다행히도 그 부모들이 미리 예상이나 했던지 생명보험에 들어 있어서 8천만 원의 돈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것을 아이의 장래를 위해 은행에 넣어 두고 아이가 독립하게 될 때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알뜰살뜰 보살펴 전문대학에 들어가게 하였고 졸업을 하고는 카이어프레틱 라이센스도 받아 직장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다니면서부터는 독립을 하게 되어 부모가 남긴 돈을 넘겨주고 어떻게든 열심히 잘 살라고 타일러 주었습니다. 그렇게 아이는 좋은 직장까지 얻었으니 한 시름을 놓았는데 어느 날 그 아이로부터 문자 하나가 날라 왔습니다. “그 동안 친엄마처럼 저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귀한 사랑을 가슴에 안고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언제든지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왠지 문자가 이상하게 느껴져 그 아이가 살고 있는 원룸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아이는 극단적인 길을 선택하였고 책상위에는 한 통의 유서와 통장과 인감도장이 놓여 있었습니다. “엄마, 너무 미안해요. 아빠 엄마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 때 따라가려고 했었는데 엄마가 워낙에 따뜻하게 사랑해 주어서 그 힘으로 지금까지 조금 더 버티어 올 수가 있었어요. 하지만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이 몸 하나 의지할 곳이 없어 먼저 떠나려고 합니다. 내가 그동안 벌어서 모아 두었던 돈 4천만 원과 아버지, 어머니 생명보험금 8천만 원을 나를 친딸처럼 사랑해 주신 엄마에게 드릴 테니 값지게 사용해 주세요. 이 세상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친엄마와 같은 사랑을 맛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록 짧았지만 그동안 너무나도 행복했어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렸던, 그래서 사랑이 너무나도 필요했던 그 아이는 결국 사랑이 없는 이 세상에서 홀로 버티기가 너무나도 힘들었던 것입니다. 20대 초반에 12천이라는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아이는 그 돈으로도 살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돈보다 더 사랑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식들에게 돈을 물려주려고 하지 말고 사랑을 물려주시기 바랍니다. 돈 때문에 자녀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놓쳐버리지 말고 가난하여도 자식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보다 사랑임을 알고 더 큰 사랑으로 따뜻하게 덮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웃들과도 이익만을 따지지 말고 돈을 주고 사랑을 사는 지혜로운 마인드로 인생을 새롭게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결코 돈과 출세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사실을 이제라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던 사요 요한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오늘 우리들을 다독거리고 있습니다.

(요일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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