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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이 필요합니다! (2020년 6월 21일 주일낮설교)

소망이 필요합니다!

6. 21, 2020

本文:로마서8:24-25

說敎:崔仁根牧師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홀어머니 밑에서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그러므로 변변한 직장 또 한 가질 수 없었던 그는 오토바이로 배달을 해주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홀어머니도 살림에 보태려고 목욕탕에서 떼를 밀어주며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 때에 아들이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와서 어머니에게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평생 장가도 못갈 줄 알았던 아들이 착하고 이쁜 여자 친구를 데려와 소개시키니 어머니는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그 여자는 부모님이 다 없는 고아출신이었습니다. 그들은 결혼을 했고 아들 하나를 낳아 키우며 가난하지만 서로의 상처를 보담으며 행복하게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오토바이 사고를 당하여 전신마비의 청천벽력과 같은 시련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아이를 키우며 직장을 다니며 꼼짝도 하지 못하는 남편을 간호하던 며느리는 점점 지쳐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어머니는 식탁 위에 놓여 있는 편지 한통을 발견하고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며느리가 쪽지 하나를 달랑 남겨 놓고 집을 나가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님, 너무나 죄송해요. 제 나이 이제 삼심대 초반인데 움직이지도 못하는 남편 뒷바라지나 하며 평생을 살 수는 없잖아요. 더는 저를 찾지도 마시고 힘드시지만 제 아들 잘 키워주세요. 제가 언젠가 잘 되면 아들을 찾으러 오겠습니다.”는 것이 편지 내용이었습니다. 6살 난 손주와 자리보전하고 있는 아들을 혼자서 감당해 나가려니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들도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몇 달의 시간이 흐른 후 일을 마치고 급하게 손주를 데리러 유치원에 갔는데 이미 시간이 늦어 모든 아이들은 다 돌아가고 손주만 혼자서 유치원 앞 놀이터에 앉아 있는데 어떤 낯선 사람이 손주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할머니가 달려가자 그 사람은 쏜살같이 사라졌습니다. 손주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 사람 아는 사람이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손주는 얼굴이 안 보여서 모른다고 하면서 벌써 몇 번이나 그렇게 찾아왔다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다음 날도 몰래 숨어서 기다렸습니다. 한 일주일이 지나도 그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계속 그 사람을 기다렸습니다. 왠지 손주의 엄마가 아닌가 싶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그 사람이 나타났고 할머니는 그 사람의 뒤를 밟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시골의 어느 산골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당도한 곳을 바라본 할머니는 졸도할 번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며느리가 맞았고 그 며느리는 산속 바위틈 굴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어 본 할머니는 더욱 더 충격을 받았습니다. 며느리는 힘겹게 일하며 남편과 아들을 키우던 중 배가 너무 아파 병원에 갔더니 위암이었습니다. 자신이 돈을 벌 수 없고 위암을 치료하려면 돈이 또 들어가야 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형편으로는 불가능하여 조용히 산속에 들어가 죽으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아들이 보고 싶어 이따금씩 내려와 아들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희망이 사라지면 절망이 찾아오게 마련이고 절망에 사로잡히면 결국 죽음을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모두에게는 소망이 필요한 것입니다.

소망이 있어야 절망하지 않습니다

(고후4:7-9)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이것은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위대한 성경의 인물들이 저마다 다 고생하고 수고하였지만 사도 바울처럼 금수저에서 흙수저로 내려 앉아 부하고 가난함을 떠나 목숨조차도 보장 받지 못한 채 살아간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실로 동족들로부터도 배척을 받았고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로부터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기피를 당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잡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겠다는 사람이 무려 40명이나 되었을 정도였습니다.

(23:12-13)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 여명이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가 오죽하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였다.”고 하였으며 답답한 일을 당하였다.”고 하였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던 것은 보배로우신 예수님께 소망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소망은 등불과 같아서 등불이 있는 한 어두움이 찾아오지 못하는 것처럼 소망이 있는 한 절망은 찾아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키엘케골은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였습니다. 지옥이란 절망이 영원화 된 곳이며 꺼지지 않는 풀무불 속에서 죽지도 못하는 버러지 같은 삶을 지속해야 하는 곳입니다. 인간이 인간인 한 사랑과 믿음과 소망 이 셋은 항상 있을 것입니다(고전 13:13). 신망애라는 신학적인 3덕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원천이요 대상이십니다.

요즘과 같은 삶의 현실은 조금만 마음을 놓아버려도 절망하게 됩니다. 지난 주간 신문에 올라온 기사 하나가 이와 같은 인간심리의 현상을 정확하게 보고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사람들이 코로나바이러스로 집에 갇혀 있게 되자 코로나베이시대가 새롭게 열릴 것이라고 전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지옥 같은 3-4개월의 시간이 흐른 후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태어나던 아이들의 수에 비하면 지난 3-4개월의 코로나 사태에서는 거의 절반 수준으로 아이들이 더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코로나로 인한 실직과 고통 속에서 아이는 무슨 아이?”라는 생각이 대세였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마음이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되면 모든 생산성은 저하되기 마련이고 내일에 대한 희망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도 사도 바울의 믿음과 고백을 가슴에 새기고 소망으로 절망을 내어 쫓는 진정한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작은 반딧불도 캄캄하면 더 빛이 나듯이 우리 구주 예수님도 절망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바로 그 때에 보배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으로 새로운 소망의 닻을 내리는 우리 빌립보의 모든 권속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소망은 참고 기다리는 삶을 살게 합니다

(8: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사도 바울은 우리들이 눈으로 보는 것을 바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단언합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진정한 소망이 아니라고 역설적으로 소망을 설명해 줍니다.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고 기대하며 그것을 소망으로 착각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사랑덩어리이신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할 것을 미리 아시고 알아서 해결해 주신다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6: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 아시느니라

 

(6:31-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을 소망이랍시고 구하고 기대하고 바라는 어리석은 교인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사모하고 구하고 바라야 할 것은 이처럼 눈에 보이는 육신적인 것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령한 것들이어야 진정한 소망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진정한 소망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은 바로 천국입니다. 영원한 미래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에 대한 정의를 소망과 동일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말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는 앞서 믿음과 사랑에 관한 진리를 이미 공부하였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사랑이 있고 사랑은 상대를 한 없이 믿고 의지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사랑과 믿음은 서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과 소망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는데 소망은 눈에 보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이기에 믿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소망도 믿음이 있어야 기대하고 바라게 되는 것이지 보지도 못하고 기대도 하지 않는데 바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진정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참음으로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애서 우리는 소중한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소망을 가진 자는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은 아이들이나 어른들을 막론하고 참지를 못합니다. 참지를 못하니 자연 기다리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인스턴트 식물을 먹고 사는 이 세대는 거의가 다 참지를 못하고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믿음도 진정한 소망도 없는 것입니다. “Patience is bitter but it's fruit is sweet."(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는 말은 이젠 오래된 고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참는다는 말 Patient환자라는 말로도 쓰입니다. 환자는 한 순간에 병이 다 낫고 퇴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자가 퇴원하려면 응급실로 와서 수술을 받고 다시 회복실로 갔다가 병이 완전히 호전 되었을 때 비로소 퇴원을 하게 됩니다. 그 과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소망을 우리 앞에 이루어 놓으려면 무엇보다도 오래 참고 묵묵히 기다릴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계란에서 병아리가 되는 데는 21일이면 되지만 사람의 복중에 잉태된 아이는 10달이 차야만 됩니다. 사람은 그만큼 고귀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제발 경망스럽게 방방 뛰지 말고 묵묵히 주님의 뜻을 기다리며 소망으로 오래 참는 믿음의 미덕을 갖추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산에 가면 명물인 용두산 공원이 있습니다. 부산의 명동인 남포동에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부산 앞바다와 영도다리와 영도섬 그리고 송도 앞바다까지 다 내려다보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부산의 명물입니다. 그곳에는 특별히 비둘기가 많은데 그 비둘기를 자신의 팔이나 손에 내려앉도록 하는 개임을 많이 합니다. 비둘기를 유혹하기 위해 양 팔을 들고 손에 먹을 것을 두고 기다리면 되는데 비둘기가 생각할 때 사람이 아니라 동상이라고 느낄 수 있을 만큼 오랜 시간동안 움직이지 않고 서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서 있으면 웃게 되거나 눈을 깜빡이게 되거나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면 절대 비둘기가 날아오지 않습니다. 문자 그대로 마네킹처럼 꼼짝 않고 오랜 시간 서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가만히 서 있으면 마침내 예민한 비둘기가 사람이 아닌 줄 알고 날아와 팔이나 손에 앉게 되고 손에 있는 먹이를 먹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목표 즉 소망을 이루는데 있어서도 꼭 필요한 조건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때까지지 길이 참고 기다리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들의 소망을 성취하는 믿음의 조건인 것입니다.

소망은 구원을 이루어 줍니다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여러분들은 교회에 다니면서 소망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을 들어 본적이 있습니까? 우리들이 상식과 같이 알고 있는 말씀은 믿음으로 구원 받는 말씀이 아니었습니까?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참으로 놀라운 진리를 또 하나 우리들에게 선포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망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서로 상충하거나 잘못된 진리가 아니라 같은 맥락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사랑이 되고 사랑하게 되면 믿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바라게 되고 바람이 이루려면 믿고 기다려야 하는 것과 동일한 이치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어떻게 왕 앞에서 감히 그 명령을 거역하고 풀무불 속으로 들어갈 각오를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왕에게 한 말을 곱씹어 보면 믿음과 소망이 함께 작용하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3:16-17)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이 말씀을 묵상해 보면 그들의 믿음과 소망이 절절히 가슴에서 흐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믿음이고 왕이 불에 넣을지라도 건져내실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이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소망은 함께 쓰여지는 공통된 의미인 것입니다. 이는 요셉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믿었기에 보디발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고 또한 하나님께서 반드시 감옥에서도 건져 내실 줄을 기대하고 소망하였기에 감옥 속에서도 묵묵히 인내하고 최선을 다해 섬기며 모범수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그 어떤 풍랑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 해도, 그리고 더 이상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 갇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해 주실 줄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그 날을 소망하며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에게 소망이 필요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나치 독일의 처참한 유대인 수용소에 대한 관찰기록을 중심으로 쓴 프랭클박사의 저서 "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색"이라는 책은 매우 권위 있는 책입니다. 그는 수용소에 있는 인간상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였습니다. "마음으로 포기한 사람은 몸도 곧 쇠약해졌다. 소망을 끝까지 가진 사람이 끝까지 살아남았다. 혼자서 소망을 이룰 뿐만 아니라 철망 속에 있는 이웃들을 도와주고 소망을 계속 갖도록 격려하던 사람은 몸도 마음도 가장 건강한 상태에 있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소망은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도 살리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소망이 삶을 살리는 구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이처럼 구원을 만들어 내는 소망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제임스 와트라는 사람이 그린 소망이란 유명한 명화가 있습니다. 이 명화의 내용을 보면 지구가 있는데 그 지구 위에 남루하게 옷을 입은 어떤 소녀가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녀가 거기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바이올린 줄을 가만히 보면 그 줄들이 가닥가닥 끊겨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의 줄만 남아 있습니다. 이 소녀는 그 하나밖에 없는 바이올린 줄을 가지고 열심히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것입니다. 줄이 정상적으로 모두 있어도 바이올린을 켜기 어려운데. 가닥가닥 끊어지고 하나밖에 없으니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 줄을 가지고 소녀는 열심히 바이올린을 켭니다. 그것이 소망이라는 명화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화입니다. 인맥의 줄이 끊어지고 금맥의 줄이 끊어지고 세상 줄과 믿었던 사람과의 관계도 끊어져 배신당하고 나 혼자만 남은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과 내가 교통할 수 있는 한 가닥 줄만 있으면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노래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사방이 캄캄하게 막힌 암담한 상태에 처해 있었을 때에도 예루살렘을 향한 동쪽 창문을 열어놓고.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자굴 속에 던져진 다니엘을 건져 주셨고 땅에서도 높여주셨습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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