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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이 필요합니다! (2020년 6월 28일 주일낮설교)

희생이 필요합니다!

6. 28, 2020

本文:창세기22:15-18

說敎:崔仁根牧師

 

미국인의 희생정신에 대한 해리스 설문(Harris Survey)은 오늘 우리들에게 많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굶주리는 나라를 돕기 위하여 기꺼이 하루를 굶겠다는 사람이 75%, 에너지 절약이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된다면 에너지사용량의 10%를 삭감할 용의가 있다는 사람이 78%, 외국의 농업을 지원하여 식량증산을 돕기 위하여 내 집 잔디밭의 비료를 최소한으로 줄이겠다는 사람이 87%등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청교도들의 후손들로 믿음이 생활이 되어 있는 미국다운 백성들의 가치관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진정한 기독교인들이라면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다면 오늘 우리들의 삶의 자세도 이처럼 이웃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의 믿음도 사랑도 소망도 다 공연불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희생이 없는 믿음, 사랑, 소망이란 소설 속의 허구처럼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세지 말을 맞은 지금 우리들의 삶의 양태는 오직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생각하고 챙기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곁에서 죽어가고 있어도 물끄러미 처다 보거나 스마트 폰으로 사진이나 찍는 세태가 이젠 더 이상 신문 사회면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시대에 부모님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자녀들을 본적이 있습니까? 자신을 낳고 길러주시고 교육시켜 결혼까지 챙겨주시는 부모님이시지만 과연 그러한 부모님을 위해 용돈이라도 챙겨드리는 자식들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경험하고 있습니까? 이처럼 제 부모도 하나 챙기지 못하는 자식들이 교회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위해 희생하며 헌신하는 제대로 된 신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희생입니다. 현충의 달 6월을 마지막 보내면서 오늘 우리들도 희생이 필요함을 고백하고 왜 그렇게 희생하며 살아야 하는지 그 해답을 같이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쪼록 듣고 깨달아서 풍성한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희생은 신자의 기본도리입니다

(13:12-15)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이상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오늘 우리들이 과연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남의 발을 씻길 만큼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어지고 썩어지며 많은 열매를 맺혀서 세상 사람들 앞에서 칭찬과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오늘 우리는 그와 같은 열매로 친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공식적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저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하고 고백하고 선포한다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희생하면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인정하시는 객관적인 열매를 맺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와 같은 가치관으로 교회에 나오고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과연 얼마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 빌립보의 모든 권속들만이라도 제대로 된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한 곤충학자가 개미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개미들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곳에 나무젓가락을 넣고 그곳에 불을 붙였습니다. 불이 났을 경우 개미들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연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자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불을 끄는 방법을 몰라 당황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개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으로 불을 발견한 개미가 자신의 몸을 불 속으로 내던졌고 다음 개미들도 마찬가지로 불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자 불꽃이 점점 약해졌습니다. 개미의 몸을 이루고 있는 키틴질이 불에 타면서 불꽃을 줄이는 소화물질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희생에는 값진 열매가 뒤따르는 법입니다. 비록 말 못하는 미물에 불과한 개미들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몸을 불태워서 희생시킴으로 다른 동료 개미들을 위험한 불에서 건져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개미를 곤충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온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상에 희생되어 구원하러 오셨던 것입니다. 이렇듯 희생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요, 위대한 힘을 발휘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부모님의 희생의 삶은 자녀를 훌륭하게 성장케 합니다.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나라가 든든히 서 있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장을 가져온 것도 믿음의 선배들의 순교의 피가 이 땅에 뿌려졌기 때문입니다. 앞서간 믿음의 종들의 희생적인 삶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한국 교회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프리카 땅에 복음이 전파된 것도 리빙스턴 선교사와 슈바이처 박사같이 복음을 위해서 불타는 가슴으로 희생적인 삶을 살았던 위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구원받은 성도로서의 나의 삶은 과연 어떠합니까? 주님의 십자가 희생이 나의 삶 가운데 메아리치고 있는지요? 주님의 희생의 보혈이 나의 몸속에 흐르고 있는지요? 주님은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살을 갈기갈기 찢으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실로 이 세상에 주님의 희생만큼 아름답고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도 예수님의 이와 같은 희생정신을 본받아 희생할 줄 아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들에게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12:16-21)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교인들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 하나님도 부모도 스승도 이웃도 없이 오직 자기 자신의 창고만 지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오늘 우리들이 꼭 기억해야 할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는 성도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들의 생명 줄을 쥐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가지고 가시면 그 어떤 것도 우리들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 모두 확실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당대에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그는 73여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좋은 친구들도 많이 있었고 물론 건강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 보다 더 잘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마지막엔 병든 자신의 몸뚱아리만 남았습니다. 우리는 늘 이 기사를 기억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비록 나의 이름으로 된 나의 소유일지라도 결국 따지고 보면 그 모든 것 또한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내가 죽어버리면 그 모든 것들이 다 헛것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진 것을 나누며 희생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왕에 모든 것을 두고 가야 할 것이라면 살아 있을 때 흩어주고 나누어 주며 칭찬이라도 받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임종을 앞두고 나누어 주는 것 보다는 잘 살고 있을 때 하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나누어 주면 나누어 주고도 욕을 먹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을 누리며 잘 살아가고 있을 때 희생이 필요한 이유가 또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희생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하나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인 인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희생되셨습니다. 날로 각박해지고 험악해지는 오늘날 사람들은 이웃이 조금만 잘못하면 무섭게 심판하고 그것을 기회로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영생과 중생을 얻은 크리스천은 이 희생의 정신을 그대로 생활 속에 실천해야 합니다. 성경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한13:16)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성도들의 마땅한 도리요 하늘 상급을 받는 복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희생하며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하늘나라를 사모하지 못하고 오직 이 땅에서만 영원히 잘 먹고 잘 살기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요 제대로 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닮은 희생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소중한 희생에 빚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희생에는 반드시 보상이 따릅니다

 

(22:15-18)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아브라함은 나이 백 살에 얻은 천금과 같은 아들 이삭이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니 아낌 없이 바쳐드렸습니다. 희생도 이 보다 더 큰 희생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거듭 거듭 아브라함에게 거기에 상응하는 보상을 이렇게도 확실하게 약속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렇게도 유명한 축복 여호와 이레의 축복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무궁한 자손의 축복을 보장해 주셨습니다.

롯도 소돔성을 심판하려고 찾아 온 하나님의 사자들을 자기의 집으로 모시고 극진히 대접하여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 소돔성의 타락한 악당들이 몰려와 그 사람들을 내 놓으라고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롯은 그러한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 자신의 순결한 두 딸도 아끼지 아니하고 희생의 제물로 내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막무가내로 롯을 겁박하며 새로 들어온 그 사람들을 내 놓으라고 밤새도록 난리를 쳤습니다. 참다못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모든 사람들을 순식간에 장님으로 만들어버리고 흩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딸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신들을 보호하였던 롯에게 엄청난 보상으로 축복을 해 주었습니다. 소돔성을 유황불로 심판하실 때 특별히 롯과 그의 온 가족들을 죽음에서 면할 수 있도록 구원하여 주었던 것입니다(창세기 19).

사도 바울 또한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 곧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을 온 땅에 증거하기 위해서는 하나 뿐인 자신의 소중한 생명이라도 아끼지 않고 기꺼이 내 놓으며 희생의 제물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그에게 하늘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내어주시고 성경에 기록해 두심으로 복된 귀감으로 삼으셨습니다.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딤후4:6-8)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들의 아름다운 희생을 결코 모르는 척 무관심 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그 아름다운 희생에 하늘 상급으로 보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진정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이 세상 떠날 때 하늘 상급으로 보상 받고 싶다면 아브라함과 같이, 롯과 같이 값진 희생으로 남은 삶을 복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희생의 상징인 십자가에는 부활이라는 축복이 따릅니다. 값진 희생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12:24)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15억이 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빌립보의 성도 여러분이 한 알의 밀이 되어 희생할 때 하늘나라의 풍성한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가정과 교회를 위해 희생하는 성도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 대한 풍성한 보상으로 화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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