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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부류의 사람들 (2020년 7월 5일 주일낮설교)

세 부류의 사람들

7. 5, 2020

本文:누가복음23:32-43

說敎:崔仁根牧師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겪는 흔한 문제점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 하게 해줄 이러한 적극적인 태도를 발산하지 않는 것입니다. 독일에 관련된 한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베를린이 분단되어 동독은 공산치하에 서독은 자유진영이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일단의 동베를린 사람들이 한 트럭의 쓰레기 더미를 서베를린 진영으로 쏟아 부었습니다. 서베를린 사람들은 쓰레기를 주어모아 트럭에 실어 다시 동쪽으로 내버릴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히려 덤프트럭 한 대에 통조림과 쉽게 부패하지 않을 식량을 채워 동독으로 가서 그것을 산뜻하게 쌓은 후 그 옆에 표시판을 하나 세웠습니다.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준다." 이것은 정말 멋진 인간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내면적으로 열매 맺는 삶을 살 때만 다른 사람들에게 열매를 나눠 줄 수가 있습니다. 요즘 이 종은 인터넷에 올린 사람 사는 이야기를 참으로 즐겨 듣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눈물을 흘리고 또 어떤 때는 같이 분노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시원 통쾌해 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참으로 다양하고 너무나도 멋진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너무나도 야비하고 악한 사람들도 의외로 많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20살 때부터 지금까지 부산, 서울, 미국에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지만 종이 직접 겪은 것보다 남이 겪고 써 놓은 글을 통해 더 많은 희비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 길어야 100년도 안 됩니다. 그 중에서도 어린 시절을 빼고 나중에 늙었을 때를 빼면 가운데 토막은 고작 30-40년도 채 안 됩니다. 그것마저도 직장과 사업을 시작하고 안정을 누릴 때까지 엄청나게 힘들고 그나마 잘 되지 못하면 인생 자체를 망치게 되고 또한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 부대끼는 세월을 빼버리고 나면 내가 누군지, 생각해 보면서 보람 있고 생산적인 삶을 살아가는 순간은 거의 없는 지경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과연 이와 같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이 땅에 존재하는 인간들이 75억이 넘는 엄청나게 많이 있지만 그것을 몽땅 묶으면 세 가지로 요약이 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과연 오늘 우리는 어디에 속해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남은 삶은 어떤 부류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겠는지, 함께 배우면서 결단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으니 모쪼록 잘 듣고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누리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 자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처지보다 이웃을 비난하는 이 사람은 지극히 비정상적이 악인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이미 우리들이 다 아는 바와 같이 당시 십자가에 달릴 정도의 죄는 살인 등 최악의 죄수였습니다. 그렇게 악한 죄를 짓고 사형선고를 받을 정도로 못되게 살았으면서도 이웃을 비난하는 이런 정도의 인간형은 그 속에 오로지 자기중심적인 利己(이기)가 가득한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가장 비난하시고 싫어하셨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그러하였습니다.

(18:11-12)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고 기도하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가장 싫어하신 무리였습니다. 자신의 허물은 덮어 놓고 이웃의 허물을 들춰내어 비난하는 모습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들 속에도 이와 같은 안타까운 모습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처럼 초라한 우리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예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들이 타락한 죄인들의 전형적인 悖惡(패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권면하고 계십니다. 지혜로운 자는 이웃의 허물을 이처럼 들춰내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 주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17: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19:11)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그런데 자신이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웃을 비난하며 자신의 처지를 망각한 이 십자가의 한 강도는 가장 어리석은 자의 초라한 대명사인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돈도 많고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모가지가 삐뚤어졌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약을 쓰고 의사도 많이 청해서 치료를 해 보았으나 도무지 낫지를 않아서 퍽이나 근심을 하고 속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것이 한이 되어서 그 삐뚤어진 모가지를 고쳐 보려고 몹시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어느 곳에 침술에 용한 사람이 있는데 그런 병을 곧잘 고친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장 찾아갔습니다. 자신의 삐뚤어진 목을 보인 다음 의원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내 모가지를 고칠 수 있겠소?"라고 묻자 의원이 대답하기를 ". 내가 고쳐드리죠."라고 장담을 하는 것을 듣고 이 부자는 말합니다. "그럼 내 모가지를 고쳐주면 얼마를 받으시겠소?"라고 치료비를 따져 물어 보았습니다. "3백 냥만 내시오." 그러니까 그 부자는 잠깐 무슨 생각을 하더니 "2백 냥만 냅시다."하고 값을 깎았습니다. 그래도 그 의원은 두말 하지 않고 "그러시오."하고 침 한 대를 주니 과연 삐뚤어졌던 목이 바로 서게 되었습니다. 이 부자는 평생의 소원이 이루어져서 좋기는 좋은데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까, 침 한 대에 2백 냥이라는 것이 좀 과해 보였습니다.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백 냥만 냅시다."하고 또 값을 깎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의원은 그 사람을 한 번 힐끗 보고는 선뜻 "그러시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그런데 당신 모가지가 다시 삐뚤어질 염려가 있으니 침을 다시 한 번만 맞아 두시오. 그러면 염려 없이 오래 갈 테니 한 번만 더 맞으시오." 이 말을 듣고 욕심쟁이 부자는 그럴 듯해서 "그럽시다. 한 번 더 놓아 주시오."하고 모가지를 내밀었습니다. 그래서 의원이 침을 한 대 놓고 웬걸 바로 잡혔던 모가지는 도로 삐뚤어졌습니다. 그제야 그 부자는 깜짝 놀라서 "이거 웬 일이요?"하고 눈이 동그래서 의원을 쳐다보니 "왜요? 이제 어서 가시오." 그제야 이 부자는 "선생님 제발 3백 냥을 낼 테니 다시 고쳐 주세요."하고 사정을 하면서 돈 3백 냥을 꺼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의원은 성을 내며 그 돈을 집어 던지면서 말했습니다. "어서 가시오. 이제는 3백 냥이 아니라 만 냥을 내어도 소용없어요. 당신 같은 사람은 그 모가지가 꼭 어울려. 그러니 어서 가시오."하고 아무리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딱 잡아떼고 듣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제가 잘못했으니 용서하시고 다시 고쳐 주십쇼."하고 빌어도 당신은 모가지보다 마음이 삐뚤어졌으니까 그 삐뚤어진 마음을 고쳐야겠소."하고 끝까지 듣지 않았답니다. 우리는 욕심을 버리고 은혜를 귀하게 여기며 사는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기 자신을 알고 내일에 소망을 두는 자

(23:40-42)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또 한 사람은 이렇듯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면서도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앞에 말씀 드렸던 이기주의적인 사람에 비해 비교도 할 수 없는 품성을 지닌 사람입니다. 죄의 대가를 깨닫는 것은 신앙의 근본이요 하나님의 긍휼을 덧입을 수 있는 최상의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풋사과와 같이 영적으로 영글어진 삶을 살지는 못했습니다. 진정한 믿음으로 열매를 맺히며 그 믿음으로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 십자가에 달려서 형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오늘 우리들이 깨달아야 할 소중한 교훈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성도들이 머리로만 하나님을 믿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열매를 맺히기를 기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제대로 된 신자는 이 두 가지 요구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 하나님께는 영광을 올려드리고 이 땅에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열매를 맺히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타락한 죄인에서 구원 받은 성도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 길이 바로 열매를 맺히는 것입니다. 그 열매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뜻합니다.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을 입증하는 삶을 살아야 제대로 된 신자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고 있는 이 사람은 열매 없는 무화과와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지도 못하고 이처럼 아름다운 열매도 맺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 하나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 사람이 마지막 천국에 소망을 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라는 말씀과 같이 그는 주님이 가시는 낙원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께 부탁드려 이 놀라운 소원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음에 있어 우리들의 공로가 필요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죄를 범하고 세상에서 허무하게 살았으니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만나 천국을 소망하는 순간 아무런 공로 없이 천국을 허락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모든 성도들도 이와 같은 진리를 꼭 배워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비록 이 사람과 같이 헛되게 살았을지라도 그래서 십자가의 형틀에서 죽어야 하는 끔찍한 죄인이 되었을지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복음을 전하여 구원의 반열에 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여 한 영혼이라도 구원시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길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길임을 또한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딤전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도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대하고 소망하겠습니까? 바로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을 기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그렇게도 애지중지 했던 그 모든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살아 있을 때 깨닫는다면 얼마나 더 값진 영적인 삶을 살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처럼 소중한 진리를 가르쳐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부디 깊은 깨달음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유명한 템플대학교를 창설한 러셀 콘웰 박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의 백만장자들을 조사해 보았다고 합니다. 적어도 백만 불 이상을 모은 사람 4043명의 생애를 조사한 결과 놀라운 것은 이들 중 고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은 불과 69명밖에 없었습니다. 크게 성공해서 백만장자가 된 사람들은 그들이 백만장자가 되기까지 교육과 정규훈련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부족한 생활을 했다는 결론이 추론 되었습니다. 그러나 콘웰 박사는 그들의 생애가 평범한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삶을 출발할 때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뛰었으며,

둘째로 그들은 그 마음속에 열화 같은 소원을 가지고 있었으며,

셋째로 그들은 뒤로 물러서지 않는 굳은 결의의 기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재산이 성공의 표준이 될 수 없으며 권력이나 명예가 성공의 표준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방면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의 생애에서 교훈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재산이나 명예나 권력에 성공을 하였을지라도 참 만족과 기쁨과 평안과 소망이 없다면 그는 인생의 성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부족할지라도 참 기쁨과 만족과 평안과 소망을 얻게 되었다면 이는 세상을 이긴 사람입니다. 거기에다 천국에 대한 소망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헌신이 있다면 더욱 더 錦上添花(금상첨화)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희생으로 일관하신 예수님

(23:33-34)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 쌔

우리 예수님께서 지금 그 무서운 십자가에 못이 박혀 돌아가시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인한 유대인들이 이렇게도 모질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까지도 빼앗아 제비뽑아 나누는 잔인한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도 없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것은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도 억울하게 죄인들의 손에 잡혀 십자가에 못이 박히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우리들의 죄악을 대신 지시고 희생하심으로 우리들의 모든 죄를 해결해 주셨던 것입니다.

(53:4-5)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와 같은 예수님께 엄청난 빚을 진 것입니다. 우리들의 죄짐을 예수님께서 대신 져 주심으로 오늘과 같이 우리들에게 자유와 나음을 입고 천국까지도 상속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빚을 갚는데 결코 인색하거나 망설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고후9:5-7)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날 신실한 성도들이 그렇게도 바쁜 이민생활 혹에서도 시간을 바치고 밤낮으로 일을 하고 피곤하지만 몸을 바치고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빠듯한 생활 속에서도 힘을 다하여 헌금하는 것은 다 이처럼 희생해 주신 예수님께 빚을 갚는 심정으로 헌신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이렇게 영글어 가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나 행동이나 정성에 오직 예수님의 이와 같은 희생정신이 묻어나야 제대로 된 예수님의 제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제아무리 충성한다 해도 십자가에까지 올라가신 예수님 앞에서는 늘 부끄러운 것뿐인 것입니다.

페르시아 우화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한 여행객이 길을 가다가 점토 덩어리를 발견했습니다. 그 흙덩이에서는 아주 좋은 향기가 풍기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여행객이 물었습니다. "이 고상하고 놀라운 향기는 어떻게 해서 나는 것인가?"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흙덩이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내가 장미꽃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엇과,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우리네 삶의 꼴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승을 닮고 위인을 닮고 친구를 닮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그러나 우리가 꼭 닮아야 할 영원한 한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얼굴을 닮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닮아야 하는 것은 얼굴이 아니라 바로 그 희생적인 마음입니다. 제아무리 예수님처럼 얼굴을 성형하고 수염을 기르고 유대인의 복장을 하고 발에는 샌들을 신는다고 해도 예수님을 닮는 것은 아닙니다. 닮는다는 것과 흉내를 낸다는 것은 엄격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흉내 내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 고귀한 생명까지도 기꺼이 내어 주신 그 놀라운 사랑을 말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위하는 일에 우리들의 시간과 몸과 재물을 드리는 일에 인색해서야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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